• 최종편집 2022-09-2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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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영월 청령포 단종 소나무
      강원도 평창군 북부 오대산 남쪽에서 나온 평창강과 횡성군 태기산 남쪽에서 나온 주천강이 영월 한반도지형에서 만나 서강이 된다. 이 서강이 영월읍으로 들어가기 전 검각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를 만나 한 바퀴를 기라죽이 휘도니 바로 청령포이다. 또 이 서강이 곧 영월읍에서 동강을 만나 남한강의 이름을 얻는데, 이곳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이고 청령포는 그 머리다. 아니다, 잠시나마 비운의 왕 단종(1441~1457)이 머문 곳이니 봉황의 머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처 날아오르지 못했고 지금도 엎디어 있다 생각하니, 열여섯에 생을 마감한 왕의 유배지였구나 하면서 가슴이 절절하다. 1452년 11살의 단종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재위 1년만인 1453년 10월 10일 숙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그렇게 모든 권력을 장악한 수양은 1454년 1월 단종과 송현수의 딸을 역시 강압적으로 맺어준다. 1455년 윤유월 11일이다. 마침내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으니,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며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물론 이것은 단종의 뜻이 아니다. 역시 수양대군과 그 측근들의 강압이었다. 상왕이 된 단종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집에 머물렀다, 역시 강압적인 연금상황이었다. 세조 3년(1457) 6월 1일로 정한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의 단종 복위 거사가 밝혀져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6월 21일 단종은 영월로 유배길에 올랐다. 아직 후사도 얻지 못한 정순왕후와도 왕심평대교에서 눈물로 헤어졌으니, 그 뒤 다리 이름도 영원히 건너간 다리,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영도교가 되었다. 관리 3명, 군졸 50명이 호위하는 삼엄한 유배 행차는 광나루를 건너 여주, 양평, 원주, 신림, 주천을 지나 배일치를 넘어 이레 만에 서강으로 내려섰다. 여기서부터는 실핏줄 같은 강변길이다. 서강이 크게 두 번 구부러지며 험상궂은 바위산 세 개가 선돌로 서 있는 그곳을 지나 마침내 단종은 청령포에 이르렀다. 청령포는 폭우에 물이 불으면 위험한 곳이다, 평상시에도 배가 없으면 오갈 수 없으니, 생각에 따라 창살 없는 감옥인 셈이다. 그해 10월 단종은 사약을 받았다. ‘조정 대신들이 노산군을 처형하라고 주장해 세조가 이를 윤허했는데, 사약이 내려지자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실록의 기록이다. ‘유배길에도 호송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번에는 사약을 들고 왔다. (중략)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 했다. (중략) 통인이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중략) 그때 단종의 나이 16세였다.’ 이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권 4의 내용이다. 이렇게 죽음만이 아니라, 관련된 여러 일이 정사와 야사가 다르고, 허구의 소설, 드라마처럼 해석도 분분하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곡학아세, 곡필, 허구가 아닌, 냉정, 냉철함과 판단이 필요하다. 충신과 난신, 영웅과 악인 등의 이분법은 오히려 비정한 권력의 속성을 감춰주고, 역사발전의 도움도 아니다. 하지만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으며 지켜본 관음송과, 머물던 어소를 향해 허리 굽혀 자란 충절송 앞에서는 그저 평안과 안식의 염원만 빈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9-22
  • (사)버팀목복지회 ‘함께 나누는 사랑의 빵과 음료’ 봉사활동
      어르신과 장애인의 행복길잡이 (사)버팀목복지회는 국제라이온스협회 후원받아 지난 19일 광주 전남지사 대한적십자사 봉사관에서 ‘함께 나누는 사랑의 빵과 음료’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번 봉사활동은 버팀목복지회 이사들과 라이온스회원들이 함께 전문 제빵기사의 지도아래 카스테라 소보루 300여개를 직접 만들고 포장해 비피더스 음료 300개와 함께 동천동 경로당과 광천동 경로당에 전달했다. 버팀목복지회 조숙정 대표이사는 “국제라이온스협회에서 후원과 함께 봉사활동까지 선한 영향력을 선사해주셔서 감사하고 덕분에 독거노인, 취약계층 어르신들게 또 한번 이런 값진 나눔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 피플
    2022-09-20
  • “일본은 대낮 강도보다 더 비열하고 야수적”
    이위종의 연설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  3년간 일본에 당한 고통50년간 고종 정권보다 커1907년 7월 8일 밤  이위종은 네델란드 헤이그의 언론인 클럽 ‘국제협회(The Foundation of Internationalism)’에서 세계 각국 기자들 200명이 모인 가운데 유창한 불어로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연설을 하였다. “일본은 황무지 개척 계획이 실패하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려 했습니다. 1905년 11월 초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천황의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왔습니다. 그는 11월 15일에 일본의 기마병과 보병  그리고 포병을 총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한 후 고종 황제를 알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토는 보호조약을 승인하라고 황제에게 제시하였습니다.그 내용은 4개 조항입니다.  첫째, 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한다. 둘째, 한국 정부는 일본과 통하지 않고는 외국과 어떤 조약도 체결하지 않는다. 셋째, 서울에 일본의 통감부를 설치한다. 넷째, 일본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한국의 관공서에 일본인을 임명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황제 폐하와 대신들은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황제 폐하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 조약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황제 폐하와 대신들과 이토 히로부미 간의 담판은 17일 자정까지 이어졌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의 위협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일본 군인들이 다가와 발을 쾅쾅 굴러대는 공포 속에서, 대신들의 마음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일본군들은 가장 거세게 반대하던 한규설 총리대신을 강제로 밀실로 처넣고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한규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나머지 대신들은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우리 정부가 원치 않는 조약을 그들 뜻대로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언론은 전 세계에 한국과 일본 간의 조약이 원만하고 우호적으로 체결되었다고 선전했습니다. 입으로는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손으로는 형제의 주머니를 훔치는 일본은 대낮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하고 야수적입니다.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은 오로지 무력으로 한국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모든 기관을 접수하고 곧 그 기관들을 통하여 오로지 일본의 재정적인 이득만을 취했습니다. 일본인은 지난 3년 동안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한국인을 착취·강탈·학대했습니다. 이 피해는 우리 한국인이 가장 나쁜 구(舊) 정권(고종 정권을 말함-필자 주)에게 50년 동안 당했던 것보다 훨씬 심했습니다.”(이승우 지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2019, p 159-161, 342-345)이위종은 한국인이 1905년 이후 3년간 일본에게 당했던 고통이 지난  50년간 고종 정권에게 당했던 고통보다 더 크다고 연설했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이위종은 조선 백성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가장 나쁜 정권이 바로 자신들을 특사로 임명한 고종 정권이라고 성토하고 있다.이어서 이위종은 일제의 학정을 비판했다.  “최근 간행된 책자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산업은행에서 1000만엔(500만 달러)을 빌려다가 도로 건설, 수리 사업, 교육시설 건축을 위해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의 약탈적이며 이기적인 수법을 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속이 다 들여 보이는 허구일 뿐입니다.1000만 엔을 빌려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돈이 한국인을 위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을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일본인은 대한제국의 요직이라는 요직은 모두 차지하고선 그들이 일본에서 받았던 월급보다 3-4배의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른바 수리 사업이라는 것도 서울과 제물포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에만 국한된 사업이었습니다. 이처럼 1천만 엔이 탕진된 것입니다.” (…)일본 당국은 군사 목적을 핑계삼아 우리 정부의 공공건물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개인 사유지까지도 정당한 보상없이 마구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수천 가구의 사람들이 그들의 재산을 빼앗기고 파산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농지를 강탈당한 농부들은 산으로 들어가 화적이 되기도 하며 처자식을 데리고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맨몸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 땅과 연해주 땅으로 나라를 떠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본인은 입만 열면 항상 ‘평화, 평화’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총구 앞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각하는 평화란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그들 손아귀에 쥐고 그들을 반대하는 한국인을 모두 죽였을 때에야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의 독립과 자유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동양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이 순간 연설회장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이위종은 조용한 장내를 천천히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모두 먹어 치우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정의의 신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정의의 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문명국가의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여러분은 지금 일본의 침탈과 압제로 고통받는 우리 대한제국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아직 잘 조직되어 있지 않으나,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정신적으로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의 잔인하고도 비인도적, 이기적인 침략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에 처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다시 하나로 뭉쳐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경고합니다. 침략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일본에 저항하는 2천만 한국 국민을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는 일이 결코 유쾌하지도, 쉽지도 않는 일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한국의 독립 약속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준엄하게 약속한 ‘개방’도 위반하였습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이위종의 연설이 끝나자 청중들은 ‘브라보’라는 함성과 함께 박수를 계속 쳤다. 사회자 스태드가 손짓하자 박수가 멈추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위종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각국 신문기자들은 이위종의 연설문 전문을 자기 나라로 송고하느라 분주했다. 기사의 제목은 ‘한국을 위한 호소 (A Plea for Korea)’ 였다.  7월 10일에 <헤이그 신보>는 이위종의 연설을 상세하게 실었다. 한편 이위종의 연설문은 1907년 8월 22일의 미국 인디펜던트 잡지에 게재되었다. 1907년 10월 19일에 뉴질랜드 신문 <오아마루 메일(Oamaru Mail)>도 이위종의 영문 연설문을 실었다. 뉴질랜드 신문의 영문 연설문은 이승우의 저서 <시베리아의 별>에 실려있다. (이승우 지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p 341-347) #. 이준, 헤이그에서 순국하다.   7월 14일 저녁 7시, 헤이그 특사 이준(1859∽1907)이 헤이그 숙소인 바겐 스트라트(Wagen Straat) 124번지의 드융 호텔에서 갑자기 죽었다.  헤이그 특사 동향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던 헤이그 일본공사관은 일본 외무성에 ‘한국 황제 밀사 이준 병사(病死) 건(件)’을 즉시 보고했고, 일본 외무성은 7월 17일 오후에 이토 통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서번호 : 내전(來電) 제149호    발신일 : 1907년 7월 17일 오후 4시 7분 동경 발(發)발신자 : 진전(珍田) 외무차관     수신일 : 1907년 7월17일 오후 7시 58분 경성 착(着)   수신자 : 이토 통감     제목 : 한국 황제 밀사 이준 병사(病死) 건(件)한국인 이준 얼굴의 종기를 절개한 결과 단독증(丹毒病:헌데나 다친 곳에 연쇄상 구균이 들어가 생기는 급성 전염병)으로 엊그제 사망하여 오늘 아침 매장했음. 장례에 참석한 자는 호텔 사환과 동행한 한국인뿐임. 자살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나 앞에 기록한 사실은 차츰 세상에 알려질 것으로 믿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 문서 5권, 헤이그밀사사건 및 한일협약체결)한편 헤이그에 있는 <만국평화회의보>와 <헤이그 신보>는 7월 17일 자신문에 “이준이 얼굴의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 뒤 패혈증에 걸려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데 텔레그라프(De Telegraaf)>도 7월 17일에 “이준은 볼에 종기를 앓고 있었고 이를 수술로 제거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수술의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고종의 퇴위 논의가 분분했던 한국에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1907년 7월 18일 자 <대한매일신보> 호외는 “어제 동경 전보를 접한즉 이준 씨는 분격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자처(割剖自處)하여 만국 사신 앞에 열혈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라고 이준의 순국 소식을 전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오보로 지금도 이준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서 할복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1956년에 문교부 장관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진상 조사를 요청하였고 1962년에 국사편찬위원회는 이준은 할복자살이 아니라 분사(憤死)했다고 발표했다. (김태웅·김대호 지음,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p 400-401)7월 16일에 이준의 유해는 헤이그 아이큰 다우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 장례식은 이상설과 호텔 주인만이 참석한 가운데 침울하게 치러졌다. 한편 미국의 여론을 얻고자 한 달 동안 미국에 갔던 이상설?이위종이 8월 31일에 헤이그에 돌아왔다.  9월 6일 오전 11시에 이준의 정식 장례식이 이준의 사촌동생 이운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준은 뉘애크 엔다운 시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비문에 이상설이 ‘이준(李儁)’이라 이름자를 썼고 이위종이 영문으로 “1859년 한국 북청에서 출생하여 1907년 화란(和蘭) 공화국 헤이그에서 순절하다”라고 썼다.1963년 9월 30일에 이준의 유해가 순국 55년 만에 헤이그에서 고국으로 송환되었고, 10월 4일에 국민장(國民葬)을 치른 뒤 서울 수유리 선열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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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0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화성 신풍루 삼정승 느티나무
      조선 22대 왕 정조는 보위에 오르자, 아버지가 묻힌 양주 남쪽 배봉산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했다. 또 행궁인 화성을 현륭원 북쪽 팔달산에 지었다. 이 화성은 정약용이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새로운 기술로 1794년 1월에 시작하여 1796년 8월에 완공하였다. 이의 일을 봉조하 김종수 등이 정리하니 10권 10책의 화성성역의궤이다, 이 책은 각종 공사법, 수성과 공략의 무기와 대응, 공사 기자재의 모습과 사용법, 관청의 명칭과 관원 이름, 정조의 윤음 및 각종 지시전달문과 보고문,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까지 담고 있다. 심지어 건물 격자의 모양, 축성 재료가 어느 지방 것인가? 석수 642명, 목수 335명 및 기타 일반 백성들의 이름 등 2년 8개월의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적혀있는 축조일지이다.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정조는 문무백관, 가족과 함께 화성에 갔다. 이때의 기록인 ‘화성원행반차도’가 또 있다. 여기서도 1,779명의 사람, 779필의 말, 당시의 의복이나 가마 등을 눈앞의 모습처럼 볼 수 있다. 당시 현륭원은 이제 융건릉이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의 융릉, 10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으로 이를 합쳐 융건릉이다. 현륭원이 융릉이 된 것은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세자와 세자빈,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부모 무덤은 원이기 때문이다. 또 주인은 모르나 유물 가치가 있으면 총이고, 오래된 유적지는 고분이다. 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무덤을 그냥 묘라고 해도 괜찮다. 여기 화성은 중국 요 임금의 화봉삼축에서 얻은 이름이다. 요 임금이 화 지방을 순행할 때 그곳 벼슬아치인 봉인이 장수, 부, 다남 등 세 번 임금을 축복했다. 정조는 이곳 화산의 화(花)와 화봉삼축의 화(華)가 같은 꽃 화라며 성의 이름을 화성이라 했다. 옛 도읍지나 국왕의 행궁이 있던 곳, 군사 요지에는 유수부를 두었고 책임자를 유수라 했다. 조선의 대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를 혼자 힘으로 저술한 서유구도 이곳 화성유수였다. 서유구는 재임(1836~1837) 2년여의 일상과 공무를 기록했으니, 화영일록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도난으로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 도서관에 있으니, 이곳 민간인 삶의 모습까지 생생히 담긴 이 관직일기 하나 지키지 못함도 조선의 몰락은 우연이 아닌 필연의 결과이다. 여기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 삼정승을 의미하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품(品)자 모습으로 서 있다.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삼괴(三槐)’ 유적이다. 삼괴는 궁궐 뜰에 괴목인 세 그루의 회화나무나 느티나무를 심고 삼정승을 의미하는 말이다. 온천지인 온양에 역대 왕들의 휴양을 위한 초수행궁이 있었다. 사도세자가 이곳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고 영괴대라 했다. 이 일을 정약용에게 들은 정조는 아버지를 기려 화성행궁 정문 앞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하지만 이 일은 기록에 없고, 나무 수령과 행궁 건축 시기와도 차이가 있다. 그러더라도 예전에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이다. 아무튼, 이 품자를 이룬 삼정승 나무의 존재는 하늘의 신묘한 뜻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 정조가 쌀죽을 쒀 맛을 본 뒤 굶주린 백성에게 손수 나눠주고, 행궁을 훼손하던 일제의 만행, 수원 권번의 의기 김향화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바로 옆 경찰서로 끌려가던 모습도 가까이 지켜봤던 삼정승 느티나무이다. 부디 오래오래 살았으면 한다. 시멘트 등 환경공해와 수원 고갈 등 무관심으로 이 느티나무가 해를 입는다면 이 역시 서유구의 화영일록처럼 시대의 몰락이 필연이라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삼가 삼정승 느티나무 세 그루 앞에 허리를 굽힌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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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5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함안 산인면 고려동 이오 자미화
      재령 이씨는 황해도 재령군이 본관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 이오는 본관이 재령이며 고려 사재시(司宰寺)의 종3품 관직 사재령을 지낸 이일선의 넷째 아들이다. 성균관 진사이던 이오는 고려가 사라지자, 송도의 두문동에서 망복수의의 결의를 다지고 경남 밀양으로 내려왔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의 옛 지명으로 고려 성균관의 태학생 72명이 은거한 곳이다. 이들은 조선이 건국되자 이곳에 들어와 동·서쪽에 문을 세워 빗장을 걸고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당시 성균관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 인문사회 3개 학과에 900여 명, 율학, 서학, 산학 등 자연과학기술계 6개 학과에 400여 명의 학생이 있었다. 조선 태조는 이들을 불러 자신의 집인 경덕궁에서 과장을 열고 회유에 나섰으나,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 뒤 이 고개를 부조현이라 하고 부조현 북쪽에 관을 걸어놓았기에 괘관현이라 했다. 망국의 개성 아낙들이 쌀을 씻거나 빨래를 하며 다시 돌아오라는 뜻의 ‘도리, 도리!’의 입소리를 냈으니 500년 망국의 한 맺힘이고 우리가 되새길 교훈이다. 또 망복수의는 망국의 신하로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겠다는 절의이니, 은나라 망국 무렵 기자가 ‘나라가 망해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밀양에 살던 이오는 조선초 육조의 으뜸 벼슬인 정3품 전서 ‘남의’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인 의령을 자주 다녔다. 그러던 중 함안군 산익면 모곡리에서 수풀 사이에 자미화가 활짝 피어있는 걸 보고 그곳 나무 밑에 말을 매고 쉬었다. 이오는 마침내 그곳에 터를 잡아 담장을 쌓고 고려동학이란 비를 세웠다. 또 담안에 주거와 우물, 전답 등을 마련하여 자급자족의 기틀을 세웠다. 마을 이름을 고려동, 고려촌, 또 담장 안을 뜻하는 장내동, 담안이라 부르는 연유이다. 또 아들에게 새 왕조에서 벼슬하지 말 것과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후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섰지만, 이오의 유지는 그렇게 600년이 넘어 고려를 잇고 있다. 자미화는 백일홍, 배롱나무이다. 그런데 ‘하늘의 제왕은 자미궁에 살고 땅의 제왕은 그것을 본떠 만든다’는 ‘후한서’ 48권의 기록처럼 수·당 시기 낙양성은 ‘자미성’이고 명·청 시기 북경성은 ‘자금성’이다. 그러하니 고려동학은 함안의 고려황성이고 자미화는 그 상징이다. 이 고려동의 자미화는 이오가 세상을 떠나고 백여 년 뒤 말라 죽었다, 그리고 30여 년 뒤 다시 고목의 밑동에서 싹이 나온 것이라 한다. 또 이오의 무덤 자미화도 처음 심었던 나무의 밑동에서 새로 나온 가지라고 한다. 그렇게 이오의 자미화는 고려 황궁의 상징이며 고려에 대한 단심의 꽃, 충절의 꽃이기도 하다. 이오는 죽음에 이르러 ‘나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느냐? 내가 죽으면 할 수 없이 담장 밖 조선의 땅에 장사할 것이니 묘비를 세울 경우 내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하나 새기지 마라’고 유언했다. 조선왕의 묘호를 새기기 싫어서이니, 청백리의 백비와는 결이 다른 연유이다. 또 함안 가야 혈곡리의 무덤 모양이 부인 의령 남씨는 사각이고 이오는 팔각으로 둥글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의 천원지방사상이다. 살아서 신념을 지키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 고려의 남쪽 황궁에 핀 이오의 자미화에 예를 갖춘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9-07
  • “법과 정의, 평화의 신을 만나러 왔다”
    이위종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 연설을 하다  1905년 불법적 을사늑약상설중재재판소 심판을1907년 7월 5일에 이위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앞에서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태드(Stead)와 기자 회견을 가졌다. 스태드는 1898년 제1차 만국 평화회의 때는 신문기자로서 활약하였고, 제2차 만국 평화회의에서는 헤이그에서 발간되는 일간신문 「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Courrier de la Conference ‘만국평화회의보’) 편집자였다. 그런데 고종의 또 다른 특사 헐버트는 베를린에서 스태드를 만나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여 그의 협력을 얻는데 성공했다. 이에 스태드는 6월 30일 자 「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 신문에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 호소문을 게재하였고, 편집자 주석 기사를 통하여 특사들의 신임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황제로부터 받은 것이며, 한국 대표들은 공식초청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러면 이위종의 기자회견 내용을 살펴보자. “스태드 :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습니까?이위종 : 우리는 이곳에서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각국 대표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스태드 : 그들은 전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약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위종 :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말입니까? 그렇다면 대한제국을 왜 회의에서 제외했습니까? 스태드 : 그것은 귀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1905년 조약으로 귀국이 외교권을 일본에 위탁했기 때문 아닌가요? 이위종 : 방금 조약이라고 하셨나요? 선생은 크게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단은 조약을 체결할 권한이 있습니까? 스태드: 대표단이 자국군주의 전권을 위임받았을 때는 물론 가능합니다. 이위종: 동의합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군주의 권한을 위임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1905년 조약은 우리 황제 폐하의 재가도 없이 외부대신이 일본의 협박을 받아 임의로 체결한 것이어서 조약이 될 수 없고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법적이고 효력이 없는 조약을 근거로 우리 대표단은 회의 참가를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스태드 :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위종 :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은 1905년의 조약이 만국공법에 의해 합법적인지 아닌지를 심판받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불법적인 조약을 상설중재재판소에서 심판받아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합니다. 스태드 : 하지만 조약이 취소되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찾는다고 한들 강대국 일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이위종 : 스태드씨, 저는 그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본이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한 이후 열강들은 모두 우리를 외면했습니다. 일본이 독립 국가인 대한제국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는데도 열강들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까?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로 희생되어야 하는지요? 그렇다면 이곳에서 법과 정의를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한제국은 평화를 존중한다는 당신들의 말을 믿고 그대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우리 민족은 전쟁을 저주하고 평화를 사랑하므로 2천만 동포중에 군대는 불과 몇천 명에 불과합니다.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여 일본의 침략을 초래하였다면 앞으로 어떤 나라가 법의 틀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지키려고 하겠습니까? ” 스태드는 1907년 7월 5일 자 ‘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 신문 1면에 특사 세 명의 사진과 함께 이위종의 인터뷰 내용을 실었다. 그런데 신문 기사의 제목이 ‘해골의 축제’이다. 참 특이하다. 이는 “이집트인은 즐거울 때일수록 죽음이라는 허무함을 잊지 않기 위해 축제의 테이블에 해골을 올려두었다.”는 의미심장한 뜻이다. 이 인터뷰 기사가 실리자 한국 특사들은 다시금 주목받았다. (이승우 지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2019, p 150-153)# 이위종의 연설,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        7월 8일 밤에 이위종은 이상설과 함께 ‘국제협회(The Foundation of Internationalism)’에 초대되었다. 국제협회는 스태드가 베르타 폰 주트너 여사(190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헤이그 시내에 있는 언론인 클럽이었다.  스태드는 세계 각국 기자들 200명이 모인 가운데 이위종을 ‘프린스 이(이 왕자)’로 소개하였다. 이위종은 유창한 불어로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연설을 하였다. 연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러일전쟁 초기에 일본 정부는 전쟁의 두 가지 목적은 첫째 한국의 독립 유지와 영토보전, 둘째 극동아시아 교역을 위한 ‘문호개방(open door)’ 지속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번 전쟁은 일본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역 국가의 문명개화와 상업적 이익을 위한 싸움이라고 여러 차례 선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 영국과 같은 상인과 선교사들 그리고 극동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그 약속을 지키리라 믿었습니다. 대한제국은 국민과 정부 모두가 우리나라의 독립과 영토의 주권을 보장하겠다는 일본의 진지한 약속을 확실히 믿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1904년 2월 23일에 한일간에 체결한 한일의정서 제3조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필자 주)  이 협약에 의거하여 대한제국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사기지를 일본에 개방하고 또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러시아와 싸우는 일본을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다방면으로 도왔습니다. 구(舊) 정권(고종 정권-필자 주)의 부패, 수탈과 학정(虐政)에 지쳐 있던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기대와 희망으로 맞이하였습니다. (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received the Japanese with sympathy and hope.)당시에 우리들은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만민에게는 정의를 구현하며, 행정당국에게는 솔직한 조언을 해주리라 믿었습니다. (We believed, at that time, that Japan, while dealing possibly stern measures against corrupt officials, would give justice to the common people and would give honest advice in the administrative work.) 우리는 일본이 이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잘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뜻밖에도 이위종은 연설 서두에 고종 정권의 부패 · 수탈 · 학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고 독일 · 러시아 등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던 이위종은 ‘외국이 본 대한제국’에 대하여 무엇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헤이그의 또 다른 특사 헐버트는 1906년에 발간한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제3장 정치제도’에서 매관매직을 비판했다.“19세기 초기에 정치에서 돈이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관직에 등용되는 데 돈의 구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관직은 일반상품과 마찬가지로 사고팔았다. 모든 관직은 그 가격이 결정되어 있어서 도의 관찰사는 미화로 5만 달러, 방백 수령들은 500달러 정도였다.  각 관찰사나 방백 수령들은 자기의 짧은 재임 기간에 자기가 상납한 밑천을 뽑고 또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백성에게 과중한 과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매관매직에서 거래되는 돈이란 결국 백성들이 부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헐버트 지음 ·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2019, p 60-61) 이위종의 연설은 계속된다.    “우리들은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만민에게는 정의를 구현하며, 행정 당국에게는 솔직한 조언을 해주리라 믿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이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잘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자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놀랍게도 야만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일본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이른바 ‘황무지(荒蕪地) 개척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개간되지 않은 전국의 많은 땅을 황무지라 하여 50년간 일본인에게 무상 대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땅들을 자기들이 비용을 들여 경제가치가 있는 땅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제안이 너그럽고 합리적인 제안으로 들리십니까?  그들이 황무지라고 주장하는 땅은 우리가 잠시 사용하지 않는 땅일 뿐이지 버려진 땅이 아닙니다. 일본은 겉으로는 우리를 돕기 위한 제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 땅의 절반 이상을 공짜로 삼키겠다는 야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이러한 계락은 우리 국민의 거국적인 반대에 부딪쳐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우리 국민들 사이에는 일본에 대한 반발 심리가 크게 일었습니다.(이승우 지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p 159-161, 342-345)  
    • 기획.연재
    2022-09-0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밀양 표충사 유정 베롱나무
      사명대사(1544~1610)의 당호는 사명당이고 법명은 유정이며 속성은 임(任), 어릴 적 이름은 응규이다. 1544년 경남 밀양에서 임수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황악산 직지사에서 승려가 되어 명종 16년(1561) 선과에 급제하였다. 묘향산 보현사의 서산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금강산 등 각처를 다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사명대사 유정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승인 휴정의 격문을 받고 금강산 건봉사에서 의승병을 일으켰다.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그해 3월에는 서울 인근의 노원평과 우환동, 수락산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때 74세의 휴정이 자신의 직함인 팔도도총섭의 직함을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에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남 의령에 내려가 의승병을 이끌었다. 1594년에 유정은 울산의 적진을 세 번 찾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왜군의 동정을 살폈다. 또 팔공, 용기, 금오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전투에 필요한 말과 무기를 비축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명의 장수 마귀와 울산왜성 전투, 이듬해에 명의 장수 유정과 순천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임란 초기 왜군은 유교 국가인 조선이 불교를 탄압하니, 자신들에게 동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승병이 봉기한 이후에는 각처에서 절은 불에 타고 탑은 무너졌다. 유정이 통도사의 부처님 진신사리 등을 스승인 휴정에게 맡겼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이때 수많은 절의 소중한 유물, 유적이 잿더미가 되고 마구잡이로 분실되었다. 선조 37년(1604)이다. 유정은 강화교섭을 위해 왜국으로 갔다.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이듬해에 조선인 포로 3500명과 함께 돌아왔다. 귀국하여 묘향산의 스승을 찾았으나 휴정은 이미 지난해에 입적한 뒤였다. 스승의 영탑에 애도하고 유정은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찾았으나, 고령의 나이에 병을 얻은 유정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머물다 1610년 8월 26일 입적했다. 우리나라에 이 임진왜란에 왜적을 무찌르는데 앞장선 휴정, 유정, 처영, 영규 등의 대사를 모신 사당이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 묘향산 수충사, 밀양의 표충사이다. 밀양의 표충사는 절집 표충사(寺)와 유교의 서원인 표충서원과 표충사(祠)가 함께 있는 곳이다. 절집 표충사는 무열왕 1년(654) 원효대사가 지어 죽림사라 했고, 흥덕왕 4년(829)에 인도의 황면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봉안할 곳을 찾다가 오색서운이 감도는 황록산 남쪽 죽림사에 3층 사리석탑을 세우고 중창했다. 이때 흥덕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전국의 약수를 찾아 헤매다 이곳에서 약수를 마시며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하였다. 이에 왕이 절을 크게 짓고 이름을 영정사, 산 이름을 재악산으로 바꾸었다. 헌종 5년(1839)에는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는 밀양의 표충사를 옮겨오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뀌었다. 그런데 의열단 김원봉을 비롯한 밀양인들의 독립 열망의 불길을 억누르고자 일제강점기에 재악산(載岳山)을 왜왕을 뜻하는 천황산(天皇山), 수미봉을 재약산(載藥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지리 표현은 왜식이나, 표충사는 ‘재악산표충사’ 현판을 당당히 걸고 있다. 여기 표충사의 여름 배롱꽃은 아름답다 못해 눈부시다. 절과 사우가 함께 어우러진 곳이어서 그런가 보다 한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포용과 화합이 피워낸 배롱꽃이니 어찌 눈부신 아름다움이 아니랴.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9-01
  • 주성식의 어른 왈/광주는 패망하는가!
    또 광주다. 이제 ‘역시 광주!’라는 비아냥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까지 이 꼴을 견뎌야 하는가’라는 절망감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갈수록 모질어지고 끔찍해질 따름이다. 며칠 사이에 채 약관(弱冠)도 되지 않은 젊은이 둘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슬프다는 듯한 어조로, 온갖 비장(悲壯)한 표현들이 쏟아졌다. 이어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뻔한 원인 분석과 낯뜨거운 대책이 제시됐다.  젊은이들의 끔찍한 선택과 겹쳐 보이는 것이 있다. 얼마 전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린 건설현장사고다. 과거 개발 과정에 대형 건물과 교량까지 무너진 적이 있기는 한다. 그러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는데, 손꼽히는 대형 건설사 현장에서 연이어 후진국형 사고가 발생한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변고(變故)’일 뿐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의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해당 건설사는 전국적으로 대형 공사만 수십 개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왜 광주 현장에서만 사고가 발생했을까? 그 회사가 광주를 무시해서 광주 현장만 함부로 관리했기 때문인가?  전국 각지의 수많은 아동들이 때가 되면 보호(조치)가 끝나는데 왜 광주 청년들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신(神)이 빛고을을 증오해 저주를 내린 것인가?  젊은이들의 좌절과 건설 현장의 붕괴 등 광주를 ‘참혹한 사고’의 나락(奈落)으로 몰아넣는 것의 실체는 확실하다. 한 뿌리에서 뻗어나 온갖 파행(跛行)과 폐해(弊害)로 광주 전체를 뒤덮고 집어삼키는 것, 부스럼을 만들고 썩게 하다가 마침내 온몸을 망가뜨리는 것! 그것은 바로 독점 즉 ‘나뿐(獨善)’이다.  집행부도 대의기구도 모두 한통속이 돼, 어떤 불법·비리도 덮고 가리면서 온갖 더러운 짓으로 뱃속을 채운 결과가 우리 앞에 선연(鮮然)하게 놓여 있다. 전제 군주라도 부러워할 만한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지역민을 볼모 잡힌 종(從)처럼 다루는 것들의 패악이, 건물을 붕괴시키고 마침내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막바지로 내몬 것이다. 지들 허물은 숨긴 채 무너진 건물 잔해(殘骸)와 폐허 앞에서 공사 관계자들이나 탓하며 꾸짖고, 치 떨리는 참척(慘慽)의 고통 위에 ‘성장·자립·동행’ 따위 소리(!)나 쏟아내는 것들이 저지른 명백한 범죄며 확실한 죄악 아닌가? 광주는 패망(敗亡)하고 있다. 그래도 민주를 뇌까리고 광주를 들먹이기만 하면 괜찮은가? 좋은가? 
    • 기획.연재
    2022-08-30
  • GS칼텍스, 한가위 맞아 소외이웃에 1억원 후원
    GS칼텍스(대표 허세홍 사장)가 다가오는 한가위를 앞두고 전남 여수지역 소외이웃에게 1억원 상당의 성품을 전달했다. GS칼텍스 여수공장은 지난 26일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 정기명 여수시장, 장영 여수시지역사회보장협의체 공동위원장, 이두희 GS칼텍스 생산본부장과 지역 복지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GS칼텍스와 함께하는 한가위 사랑의 온정 나누기' 후원금 전달식을 가졌다. 후원금은 총 1억원으로, 여수지역에서 생산된 20㎏ 쌀 1310포대와 식료품 선물 세트 600개를 마련해 지역 내 132개 복지기관과 독거노인 460가구, 북한 이탈주민 140가구 등에 전달된다. 후원금 전달식 행사 후 정기명 여수시장과 이두희 GS칼텍스 생산본부장 등 40여명은 식료품 선물 세트 제작과 포장에 참여했다. 제작된 선물 세트는 복지기관 등을 통해 미리 수혜 대상 가구의 선호도를 파악해 반영한 것으로, 식용유, 설탕, 밀가루, 부침가루, 햇반, 된장, 즉석 삼계탕, 즉석 곰탕, 참기름 등 명절 음식 준비에 쓰일 15개 품목을 넣었다. 이두희 GS칼텍스 생산본부장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지원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며 "준비한 선물 세트가 한가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기명 여수시장은 "한가위 명절을 맞아 한결같이 힘든 이웃을 위해 통 큰 기부를 해주는 GS칼텍스에 감사를 드린다"면서 "앞으로도 큰 성장과 발전으로 지역과 함께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GS칼텍스는 2005년부터 '한가위 사랑의 온정 나누기'를 18년간 이어오고 있다. 이를 통해 여수지역 소외 이웃에게 전달된 성품의 누적 규모는 총 15억원에 달한다.
    • 기획.연재
    2022-08-28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논산 연무읍 견훤왕릉 배롱나무
      금강을 젖줄로 태평성대를 누린 백제의 텃밭 고을이 논산이다. 오늘의 논산시도 동북쪽에 대전광역시, 동쪽에 계룡시와 금산군, 서쪽에 부여군, 북쪽에 공주시, 남쪽에 전라북도 익산시, 완주군과 이웃하는 풍요로운 삶의 터다. 호남선 철도, 논산천안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지선이 분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렇게 논산은 참으로 사람살이가 오랜 역사의 고을이다. 피 끓는 투혼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풍요와 번영의 찬가가 울리던 고을이다. 그 역사 속에 또 기억하고 추억할 위대한 인물이 있으니, 이곳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의 후백제 시조 견훤왕릉이다. 조선 초의 고려사 지리지에 충청도 은진군 풍계촌에 위치한다는 기록으로 전(傳) 견훤왕릉이라 부르는 곳이다. 전(傳)이란 말이 참으로 마음 아프다. 승자의 기록이 역사라는 생각이 가슴을 쿵 친다. 하지만 민심을 얻은 패자의 기록도 사람들 마음에 남아 후세에 전승되니 이 역시 역사이다. 견훤왕! 이루려던 대업을 매듭짓지 못하고, 구차하게 정적에게 의탁했고, 또 그 적장에게 자식이 나라를 바쳤던 황산불사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풍운아이다. 문득 당나라 낙양성 북망산의 고혼이 된 이웃 고을 부여 의자왕의 비운까지 떠오르니, 만사가 뜬구름이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사는 법이다. 옷깃 여미고 저 멀리 의자왕, 눈앞의 견훤왕 영전에 고개를 숙인다. 견훤(甄萱 867~936)은 속리산에서 발원한 영강 물줄기가 만든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아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자개이며 이씨였다. 견훤 왕의 견씨는 15세에 이르러 스스로 바꾼 성으로 전주 견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또 이곳 금하굴은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깃든 굴이다. 흙 속에 묻혀버린 것을 해방 이듬해 마을 주민들이 다시 복원했다. 또 광주광역시에도 견훤 탄생설화가 있다. 광주 북촌 어떤 부자의 딸에게 자주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밤마다 찾아왔다. 아버지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남자의 옷에 찔러두라’고 했다. 다음 날 북쪽 담 아래에 허리를 바늘에 찔린 큰 지렁이가 있었다. 그 뒤 딸이 사내아이를 낳으니 15세에 자칭 견훤이라고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그것이다. 935년 3월, 전주의 후백제 왕궁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견훤의 장남인 신검과 이찬 능환 등이었다. 그들은 4남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은 살해하였다. ‘가련하구나 완산 아이여(可憐完山兒), 아비 잃고 눈물만 흘리고 있네(失父涕連濡)’는 이때 완산주 어린이들이 불렀던 동요이다. 그렇게 역사의 이슬로 스러져간 견훤이 꿈꾸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견훤은 삼국에서 가장 뛰어난 국제 외교정책을 폈고, 당대 학자인 최승우를 영입했다.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승려 경보를 나루터까지 마중 나가 스승으로 모신 혜안과 덕망을 두루 지닌 지도자였다, 또 삼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다. 전주의 서고가 불타면서 그 고대사 서책과 함께 후백제의 역사도 헌 줌 재가 되었지만, 그가 꿈꾼 통일대국, 문화대국의 꿈은 결코 지나간 허망한 역사가 아니다. 견훤왕릉은 쓸쓸하지만, 한여름 붉은 배롱꽃이 화사하다. ‘내가 죽으면 모악산을 바라보게 하라.’는 유언에 따라 묘를 썼다는 연무읍 금곡리 낮은 구릉 위 왕릉에서는 저 멀리 전주의 산자락이 보인다. 한여름 따가운 햇살이 너른 들녘의 낱곡을 키우니, 견훤이 꿈꾸었던 통일대국, 문화대국의 꿈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슬퍼하지 말라 완산 아이여, 아비의 뜻 다시 이루어보세’ 왕릉 앞 붉은 배롱꽃에 기대어 ‘완산주 동요’를 새롭게 불러 본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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