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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도의병장 김덕령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는 팔도의병장 김덕령(1567∼1596)의 시호를 딴 도로명이다.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忠壯祠)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고, 북구 충효동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593년 11월에 김덕령은 모친상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매형 김응회와 내외종 송제민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의병은 한 달 만에 3000명이 모였다. 송제민은 제주에서 말을 가져왔고 지역 유지들은 양곡을 지원했다.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도 도왔다. 이러자 12월13일에 전라감사 이정암이 김덕령을 장수로 추천하는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다. 12월27일에 광해군은 전주에서 과거시험을 주재하였다. 김덕령은 무과시험장에서 무술시범을 보였고, 광해군은 김덕령에게 익호장군(翼虎將軍 날개를 단 호랑이)이란 칭호를 내렸다. 1594년 1월에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에 임명하고 충용장(忠勇將)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영남으로 가도록 했다.     이에 김덕령 의병은 4월12일에 진주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선조는 각도의 의병을 혁파하고 그들을 김덕령에게 소속시키도록 명하였다. 김덕령이 팔도의병장이 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1594년 4월 1일) 당시는 명군과 왜군의 강화협상이 진행 중이었는데, 조선군의 기강은 정말 엉망이었다. 1594년 4월17일에 선조는 대신들을 인견하고, 경상좌병사 고언백의 보고서를 영의정 류성룡에게 전했다.   먼저 류성룡이 아뢰었다. “요즈음 듣건대 영남의 일들은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변장(邊將)들이 굶주린 백성들의 목을 베어 그것을 왜적의 수급이라고 한다니, 속이는 일들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도원수가 자기 종사관을 시켜 각진(各陣)을 순찰하게 한다면 검찰(檢察)할 수가 있을 것이건만, 지난번 권율의 종사관 이경함에게 물었더니 지척에 있는 의령에도 가보지 않고 서울에서 보낸 공문마저도 덮어둔 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난날은 명군만 믿고 있다가 지금 와서는 또 김덕령에게 의지하고 병사(兵使) 등 장수들은 앉아서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러자 선조가 말했다. “병사는 한 도의 주장(主將)인데 부하 병졸들을 멋대로 김덕령에게 이속(移屬)시켰으니 될 일인가?”다시 류성룡이 아뢰었다. “병사를 나눌 때 각 장수에게 배속시켰으니 멋대로 옮겨 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1594년 4월 17일) 정말 그랬다. 1594년 4월1일에 선조는 권율의 종사관 이경함에게 조선군의 상황을 묻자, 이경함이 아뢰었다. “각진(各陣)에 전염병이 번지고 있는데 순변사 이빈 역시 앓고 있습니다.”선조는 약을 조제하여 내려보내라고 명하면서 원수가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 물었다. 이경함이 말했다. “군량이 모자라 군대 양성이 어려워, 원수가 거느린 군사도 매우 적어 수십 명의 아병(牙兵)만 있을 뿐입니다.” (선조실록 1594년 4월 1일) 4월18일에는 비변사가 장수들이 몰래 속인 일을 조사할 것을 아뢰었다. “장수들이 적과 싸운 일도 없는데 이긴 것처럼 꾸며 공(功)을 올린다고 합니다. 왜적의 수급은 얼마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굶주린 백성들을 몰래 죽여 머리털을 깎은 다음 그것으로 숫자를 채우고 있고, 인두(人頭)를 매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장수가 사실을 알면서도 원수를 속이고, 원수는 또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조사를 시키소서.” 이러자 선조가 따랐다. (선조실록 1594년 4월 18일) #1594년은 명과 왜의 외교 협상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굶주림이 심했고, 전염병도 창궐했다. 선조가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릴 정도였다. (선조수정실록 1594년 4월 1일) 김덕령도 군량 확보에 고심하며 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1494년 9월 하순에 삼도체찰사 윤두수는 장문포 공격을 지휘했다. 왜군은 거제도 장문포에 성을 쌓고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수륙합동 작전을 벌였다. 육군은 권율과 김덕령·곽재우 등이 나서고 수군은 이순신과 원균이 참가했다. 이들은 9월28일부터 10월 9일까지 장문포 왜성을 공격했다. 3차에 걸친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덕령은 당시에 각기병을 앓고 있어서 9월 29일 첫 전투는 아예 참가하지도 못하고, 10월 4일 두 번째 전투에도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1년 뒤인 1595년 9월에 김덕령은 윤근수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다. 김덕령은 첩보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고,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매질하여  죽였는데 죽은 자가 바로 윤근수의 노복이었다. 선조의 어명을 받고 남쪽 지방을 순시한 윤근수는 김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을 부탁했는데도 김덕령이 죽였던 것이다. 이에 윤근수는 분노했다.  김덕령은 진주 감옥에 갇혔다가 1596년 2월에 의금부로 이감되었는데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해명하자 선조는 특별히 방면하고 전마(戰馬) 1필을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1596년 2월 1일)   한편 1596년 7월 6일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충청도 여섯 고을을 금방 점령할 만큼 초반 기세가 거셌다. 이때 김덕령은 권율의 지시로 운봉까지 갔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 돌아왔다. 조정은 이몽학의 모주(謀主) 한현을 잡아 국문하였다. 한현은  김덕령·곽재우·고언백·홍계남 등이 연루되었다고 자백했다. 그런데 선조는 김덕령만 잡아 올 것을 명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불문에 붙였다.(선조수정실록 1596년 7월 1일)  8월4일에 선조는 김덕령을 친국했다. 김덕령은 해명했지만 허사였다.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너무 많았다. 선조도 김덕령에게서 마음이 떠났다. 옥중에서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조 한 수를 짓는다.  춘산(春山)의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붓는다저 뫼 저 불은 끌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연기)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결국 그는 추국을 6차례나 받고 정강이가 부러진 채 옥에서 죽었다. 나이 29세였다. 김덕령이 죽자 왜적들이 가장 좋아하였다. 그는 왜적 진영에서 호랑이 두 마리를 손으로 때려잡아 왜적들이 몹시 그를 두려워했다. 김덕령이 죽자 남도의 군민(軍民)들은 원통하게 여겼고,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1596년 8월 1일)   김덕령의 손위 처남 이인경은 병을 핑계삼아 군수직을 사임하고 은거하였고, 동생 김덕보도 무등산에 풍암정을 짓고 세상과 등졌다.   김덕령이 죽은 후 시인 권필(1569~1612)이 취시가(醉時歌)를 지었다.   장군께서 지난날에 창 잡고 일어났지만, 장한 뜻 중도에서 꺾여지니 다 운명인 걸 어찌하리오. 지하에 계신 영령이여 그 한스러움은 끝이 없지만   취시가 한 곡조로 억울함을 나타냈구려. 권필은 송제민의 사위이다. 그는 장인에게서 김덕령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무등산 자락 운암서원에는 송제민과 권필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취가정은 김덕령의 한을 기린 정자이다.     김덕령은 1661년 현종때 신원되어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숙종 6년에는 병조판서로 올라갔다. 1788년(정조 12년)에 정조는 김덕령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벼슬도 좌찬성으로 가증하였고, ‘김충장공 유사’를 편찬하였다.   충장로가 광주의 역사 거리이듯이 김덕령은 무등산의 전설이다.  
    • 기획.연재
    2020-10-06
  • 진주성 순절 -징비, 임진왜란 (9회)
      제2차 진주성 싸움은 1593년 6월21일부터 29일까지 계속되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엔 전투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6월21일에 왜군이 진주성을 에워쌌다. 22일에 적의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첫 교전은 조선군의 승리였다. 23일에도 조선군은 낮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4번 싸워 4번 물리쳤다. 24일에는 왜군은 증원군을 투입했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25일에 적이 동문(東門)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 성을 내려다보면서 탄환을 퍼부었다. 그러자 순성장 황진도 성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황진이 직접 흙을 져 나르고 성안의 백성들이 힘을 다해 쌓는 일을 도왔으므로 하룻밤에 끝마쳤다. 이에 현자총통을 쏘아 토옥(土屋)을 파괴하니 적이 물러갔다.26일에 왜적은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귀갑차를 이용해 쇠망치로 성을 뚫으려 했다. 조선군은 섶에 기름을 붙여 귀갑차를 태우자 왜군은 퇴각했다. 적은 또 나무 궤를 만들어 쇠가죽을 입힌 뒤 각자 짊어지기도 하고 이기도 하면서 탄환과 화살을 막으며 성을 무너뜨리려고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성 위에서는 비 오듯이 활을 쏘고 큰 돌을 연달아 굴러내려서 격퇴시켰다. 그러자 적은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위에 판옥(板屋)을 만든 뒤 성안으로 화전(火箭)을 쏘아 보내니 성안의 초옥(草屋)에 일시에 불이 번졌는데, 황진이 또 마주 대하여 나무를 세우고 판자를 설치하여 총을 쏘니 적이 곧 공격을 중지하였다.27일에도 왜군은 귀갑차를 이용해 성에 접근하여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붙여 귀갑차를 태우자 적이 물러갔다.   이 날 왜적이 ‘대국(大國)의 군대도 항복하였는데 너희가 감히 항거하는가’라는 글을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그러자 ‘우리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군 30만이 너희들을 추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할 것이다’라고 답하니, 적이 ‘명군은 이미 다 물러갔다’답하였다. 그랬다. 명군은 오지 않았다. 성안의 조선군은 고립무원이었다.  28일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싸워 물리쳤다. 황진이 순행차 이곳에 이르러 성 아래를 굽어보고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고 말했다.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쏘았는데, 황진의 이마에 맞아 즉사하였다.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백성들이 두려워하였다. 29일에 동문의 성이 비로 인해 무너지자 적의 무리가 개미 떼처럼 기어올랐다. 이종인이 활과 화살은 놓아두고 칼과 창을 가지고 육박전을 벌여 죽인 적의 시체가 구릉처럼 쌓이니 적이 물러갔다.오후 2시경에 적이 서쪽과 북쪽을 힘을 다해 공격하니 조선군이 버텨내지 못하였다. 적이 드디어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 군사들이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갔다. 김천일도 촉석루에서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고종후·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성이 함락되자 적은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하였다. 서예원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고, 여러 장령들도 다 죽었다. 성안의 사녀(士女)들도 앞다투어 남강에 투신자살하여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7만이나 되었다. 왜적은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으므로 성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며칠 후 왜군은 촉석루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이때 최경회의 소실 논개는 기생으로 변복하여 왜군의 흥을 맞추다가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왜장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진주성엔 그녀를 기리는 의암사적비와 의기사가 있다.  왜군은 전라도 구례·남원 등지로 들어가서 노략질하였다. 이때 명나라 낙상지과 홍계남이 왜적과 싸우니 왜적이 김해로 물러갔다. 한편 진주성이 함락되자 명나라 유격 오종도 글을 지어 김천일을 제사지냈는데 내용이 매우 슬펐으므로 사람들이 그 글을 돌려보았다. 그런데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천일이 전쟁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멋대로 할 뿐만 아니라 서예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명령이 어긋났다. 이러고야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적었다.  진주성 평가는 1593년 6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자세한데 요약하면 이렇다.   “적이 10배의 병력으로 계속 들이닥쳤으니 이는 김시민이 당하던 적과는 중과(衆寡)가 현저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천일 등이 충의(忠義)만을 가지고도 군사와 백성을 격려하였던 것인데 황진·이종인·장윤·김준민 등이 왜적을 살상하면서 9일이 지나서야 힘이 다하였으니, 전투 방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때에 김천일 등이 아니었더라면 겁 많고 미련한 서예원으로서는 필시 하루 이틀도 막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서예원의 형 서인원이 김천일을 교묘하게 비방하면서 서예원을 신원하려고 하였던 까닭에 사대부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선조 앞에서 모함하여 ‘김천일의 뜻은 숭상할 만하나, 재주가 졸렬하여 일을 그르쳤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천일이 국사를 그르친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6000명 대 10만 명의 절대 열세, 명군과 조선군의 지원이 전혀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6월12일부터 6월29일까지 9일간 사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했다. 비록 패한 전투였지만 왜군의 피해도 많았기에 호남은 온전할 수 있었다. 진주성 안에는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다. 임진대첩은 1592년 10월 김시민의 진주대첩, 계사순의는 1593년 6월의 진주성 순절을 말한다.  창렬사 사당에는 진주성에서 순절한 이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중앙 사당에는 김시민·김천일·황진·최경회·장윤·고종후·유복립(김성일 누나의 아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동편 사당에는 양산숙·김상건·김준민·강희열·강희보 등이, 서편 사당에는 이잠·이종인 등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한편 1593년 6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창의사 김천일, 순성장 황진, 김해 부사 이종인, 거제 현령 김준민, 부장 장윤, 경상 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공조 좌랑 양산숙, 의병장 강희열의 졸기가 실려 있다. 아울러 ‘호남절의록’에는 진주성에서 순절한 이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창의사 김천일과 같이 순절한 이는 유희진·서정후·임희진·강희열·강희보·윤성립·최희급·박운 등이고, 황진과 같이 순절한 이는 송제·정명세·소제·황박·양응원 등이다. 고종후와 함께 순절한 이는 오유와 오빈, 김인혼·고경형· 조곤남·김언희·서홍도·충노 봉이와 귀인 등이고, 최경회와 함께 순절한 이는 문홍헌·고득뢰·김예수·구희·최억량·안기중·오방한·김인갑·김의갑 등이다. 장윤과 함께 순절한 이는 남용개·김대민·김신민이고, 표의장 심우진과 같이 순절한 이는 임두춘·김보원·김부행·최인 등이다. 태인 의병장 민여운도 정윤근과 함께 순절했다. 어디 이들뿐이랴! 이름 없이 흔적도 없이 쓰러진 무명의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의 애국 충절은 널리 기억되리라.
    • 기획.연재
    2020-09-23
  • 경상감사 “진주가 무너지면 湖南도 무너진다”
    # 진주 대첩 1592년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이 진주성을 지켰다. 자세히 살펴보면 김성일의 지도력과 전라·경상 의병의 외곽 지원, 그리고 진주 백성들의 합심이 없었다면 이기기 힘든 전투였다.    9월 들어 초조해진 왜군은 진주성 공략을 추진했다. 진주성을 점령하여 경상도를 장악하고 전라도에서 겨울나기 식량을 확보한다는 작전이었다. 9월24일에 왜군 2만명은 김해에서 진주로 진군했다.    진주목사 직무대리로 임명된 진주판관 김시민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총통 170자루를 제조하는 등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사천·고성·진해의 왜적을 무찔렀다. 이런 공로로 그는 5단계 뛰어넘어 정3품 목사가 되었다.왜적이 쳐들어오자 산청의 지휘부에 머물던 경상감사 김성일은 김시민에게 전령을 보내 결사 항전을 지시했다. 아울러 김성일은 나주목사를 했던 인연을 살려 호남에 의병을 요청했다. 호남과 진주는 입술과 이빨의 관계로서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곽재우·김준민 등 경상우도 의병장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김시민은 곤양군수 이광악과 진주판관 성수경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 전술을 펼쳤다. 이때 진주성에는 3800여 명의 군인과 약 2만 명의 백성이 있었다. 10월 5일에 왜군이 진주성 동쪽에 진을 쳤다. 김시민은 남녀노소에게 군복을 입혀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 전술을 펼쳤다. 6일에 왜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하였다. 하지만 김시민은 동요하지 않고 대응했다. 저녁에 조선군은 외곽에 횃불을 올렸다. 곽재우의 부장 심대승이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향교 뒷산에서 불을 지폈고, 고성 의병장 최강과 이달도 달려와 협공 작전을 폈다. 7일에도 왜군은 공격했으나 성은 견고했다. 밤에 왜군은 아이들을 시켜 ‘빨리 항복하라’고 외치도록 했다. 이러자 김시민도 악공을 시켜 피리를 구슬프게 불게 하여 심리전을 폈다.   8일에 왜군이 대나무 사다리로 성으로 기어오르며 공격해 왔다. 김시민은 현자총통을 쏘아 사다리를 파괴하고 진천뢰 등으로 왜적을 막았다. 이날 밤 고성의 조응도와 진주의 정유경이 군사 500명을 각각 이끌고 외곽에 진을 쳤다. 성안에 화살이 떨어지자 김성일은 하경해를 시켜 화살을 보급하도록 했다. 하경해는 어두운 밤에 남강을 통해 화살을 가져왔다. 이러자 성안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9일에 김준민이 단성의 왜군 2000여 명을 격퇴했다.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와 전라좌의병장 임계영도 구원병 2000명을 거느리고 왜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왜적은 조선 의병의 외곽 지원이 많아지자 내심 당황하였다.   이날 밤 도망쳐 나온 한 아이가 내일 새벽에 왜군이 총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알렸다. 성안 군사들은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10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밤 1시에 왜군은 후퇴하는 척하다가 2시가 되자 1만 명이 동문에 쳐들어왔다. 나머지 1만 명 왜군은 북문을 공격했다. 이러자 군인들은 물론 성안의 백성들 모두가 합세하여 돌을 던지고 끓눈 물을 붓는 등 사력을 다해 싸웠다.  새벽 동틀 무렵에 왜군의 공세가 느슨해졌다. 이때 숨어있던 왜군의 총탄이 김시민의 이마를 관통했다. 이러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나서서 적을 막아냈다. 날이 밝자 왜군은 퇴각했다. 6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마침내 끝난 것이다. 하지만 김시민은 상처가 깊어 한 달 후에 죽었다. 조정은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선무공신 2등과 충무공 시호를 봉했다. 진주성에는 김시민 장군 동상과 전공비가 있다.   #  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6월 29일,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시키자 김천일·최경회·고종후 등 6000명이 전사하였고 6만명의 백성과 소· 돼지·닭까지도 모두 도륙되었다. 1593년 1월 8일, 명나라 이여송이 지휘하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 2월 12일 전라감사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이후 왜군은 서울에서 고립됐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심유경과 협상한 뒤, 4월18일에 양곡 2만 석을 명군에게 넘겨주는 대신 신변안전을 보장받고 서울에서 철수했다. 명군이 조선군에게 일체의 군사행동을 엄금하자, 조선군은 왜군을 추격하면서도 공격 한번 못했다. 그런데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3번에 걸친 지시로 진주성 공격을 준비했다. 왜군은 10만 명으로 1차 때 2만명의 5배였다.    왜군의 움직임이 명군에 알려지자, 경락 송응창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부산까지 간 심유경을 꾸짖었다. 당황한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항의했으나 고니시는 가토가 한 일이라고 시치미를 뗀 다음 진주성을 비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심유경은 선산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만나 진주성을 비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마치 고니시의 대변인 같다. 왜군의 공격 징후가 농후해지자, 도원수 김명원은 급히 장수들을 의령에 집결시켰다. 권율, 이빈 등 관군과 김천일, 곽재우, 고종후 등 의병장들이 모였다. 먼저 김천일이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 장수들은 진주성을 비우자는 입장이었다. 왜군이 30만 명이라는 소문에 싸울 엄두가 안 난 것이다. 이러자 김천일이 ‘나 혼자라도 진주성을 지키겠다’고 다시 나섰다. 이에 황진 ·최경회·고종후가 따랐다. 하지만 권율은 남원으로, 이빈은 산청으로, 곽재우는 창녕으로 물러갔다.안타까운 일은 경상감사 김성일이 두 달 전인 4월29일에 전염병으로 진주성에서 죽은 점이다. 그는 죽으면서 누이의 아들 유복립에게 ‘진주성을 반드시 지키라’고 유언했다.  한편 명나라 이여송은 장수 유정·오유충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진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장수들은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전라좌의병 부장 장윤, 의병장 이계련과 심우신 ·민여운,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 등이 35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갔다. 거제 현령 김준민 및 김해부사 이종인 등은 먼저 성안에 있으면서 진주목사 서예원과 수성방안을 의논하였다. (선조실록 1593년 7월 16일)   김천일 등이 성안을 점검해 보니, 창고에 곡식이 가득했다. 그는 장수들에게 ‘이만하면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수성군을 편성하였다. 김천일과 최경회가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김천일은 의병을, 최경회는 관군을 통솔하고, 황진이 순성장(巡城將)이 되었다.이때 명나라 장수 유정이 비장(裨將)을 보내와 수비 상태를 살펴보고 나서 밖에서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김천일은 이를 철석같이 믿었다. 6월 19일에 전라병사 선거이와 홍계남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태를 살펴보고 김천일에게 성을 비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러자 김천일이 크게 화를 냈다.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는 김성일의 말을 무시하다니. 그래서 1차 진주성 싸움 때 전라 좌·우의병이 지원한 것 아닌가. 하지만 선거이는 어이없게도 전라도 운봉으로 물러나 버렸다.  6월21일부터 진주성 싸움이 시작되었다. 조선군 6000명은 고립무원 속에서 왜군 10만 명과 싸웠다. /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기획.연재
    2020-09-08
  • 천둥 울리듯 바람치듯 장사들이 몰려오다
    # 의병장 고경명, 마상격문을 쓰다.1592년 6월22일에 고경명 의병은 전주에서 북쪽으로 전진했다. 6월 24일에 고경명은 말을 타고 가면서 격문을 썼다. 소위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옷소매를 떨치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격문은 선비들의 심금을 울렸다.6월 27일에 의병은 충청도 은진까지 진군했다. 이때 황간·영동의 왜적들이 금산으로 넘어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막하의 장수들이 되돌아가서 전라도부터 구하자고 청하자 고경명은 군사를 돌려 진산으로 들어갔다. # 고경명,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7월 9일에 기병 800명과 보병 6000명의 고경명 의병은 방어사 곽영의 관군 1000명과 함께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치고 작전을 개시했다.고경명은 정예기병 수백 명을 내보내어 적을 공격했는데, 군관 김정욱이 말에서 떨어져 달아나자 우리 군사가 일시 후퇴했다.석양 무렵에 왜군이 성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은 재인(才人) 30여명을 시켜 성문을 부수게 하는 한편 진천뢰를 쏘아 성안의 창고를 불태웠다.날이 저물자, 양쪽은 각기 군사를 거두었고, 의병과 관군은 내일 같이 싸우기로 약속했다. 이때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했으니 이 승리한 형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보전해 돌아갔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왜군과 진지를 마주 대하여 들판에서 잔다면 밤중에 습격을 당할 우려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고경명은 “네가 부자간의 정으로 내가 죽을까 걱정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번 죽을 따름이다”라고 말하므로, 고종후는 다시 말하지 못했다.7월 10일 동틀 녘에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그런데 왜장 고바야카와는 관군이 약한 것을 미리 알고 관군을 총공격했다.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도망치자 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고경명은 의병만이라도 적과 대항코자 하였으나 몇 사람이 ‘방어사의 군사가 무너졌다’고 부르짖자 의병도 동요해 도망가 버렸다.이때 고경명은 말이 달아나서 말에서 떨어졌고, 종사관 안영이 그의 말을 주어 다시 타게 하고 안영은 걸어서 호위하며 후퇴했다. 유팽로는 먼저 탈출했는데 종에게 ‘대장은 모면하였는가?’라고 물으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급히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들어갔다.고경명이 돌아보며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고 했지만 유팽로는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안영과 함께 고경명의 몸을 감싼 채 전사했다.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도 싸우다가 죽었다.(선조수정 실록 1592년 7월 1일)광주광역시 포충사에는 고경명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 옆에는 장남 고종후와 차남 고인후 그리고 유팽로와 안영의 신위가 있다.고경명 순절 이후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화순에서 최경회의 전라우의병, 보성에서 박광전·임계영의 전라좌의병, 장성에서 김경수의 장성남문 의병, 영광 심우신, 남원 변사정, 태인 민여운 등이 일어났고, 고종후는 복수의병장이 됐다. # 조헌, 청주성을 수복하다. 1591년에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겐소 등 일본 사신과 함께 돌아오자, 조헌은 도끼를 들고 대궐 뜰에 엎드려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직언했다. 하지만 선조는 냉담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 1600명을 모았다. 8월1일에 그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의승(義僧) 영규(靈圭)의 1000 명, 방어사 이옥의 관군 500명과 함께 청주성을 공격했다. 그런데 공격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천지가 캄캄해졌다. 의병들이 추워서 떨었다. 조헌은 ‘옛말에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라고 탄식하면서 진(陣)을 퇴각시켰다. 그런데 폭우로 왜군도 조총이 무력해졌다. 이날 밤 왜군은 슬그머니 달아났다. 다음날 조헌이 성에 들어가니 창고에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방어사 이옥은 ‘왜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양곡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너무 어이없다. # 조헌과 영규 대사,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 조헌은 왜적이 전라도를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명만 남게 되었다. 그는 전라감사 권율에게 8월18일에 금산성을 협공하자고 알린 후, 의승 영규 가 이끄는 의승 600명과 합세하였다.  8월17일 저녁에 조헌은 왜적이 점거하고 있는 금산성 동쪽 10리 밖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전라도 관군은 오지 않았다. 권율이 공격을 연기하자고 편지를 보냈으나, 조헌은 미처 받지 못했다. 이때 조헌의 부하들은 왜적과 대결하는 것은 승산이 없으니 관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고, 영규 대사도 단독으로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고 반대하였다. 조헌은 ‘임금이 변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당연하니 나는 한번 죽는다는 것밖엔 생각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러자 이들은 단독으로라도 싸우기로 결의했다.   8월18일 새벽,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적은 3대로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공격해 왔다. 조헌은 들판에서 왜군의 세 번 공격을 세 번 다 무찔렀다. 의병들은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일어나 화살이 다하면 칼과 창을 잡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로 치는 처참한 육박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해 질 무렵에 의병은 왜적의 총공격에 무너졌다. 부하들이 조헌에게 탈출을 권유하였으나,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요.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싸우다가 죽었다. 나이 48세였다. 1883년(고종 20)에 조헌은 문묘에 배향되었다.    영규 대사도 ‘생사(生死)의 명(命)은 재천(在天)이다. 다만 의를 좇아 죽을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  의병과 승병 1300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가 모두 순절하였다. 참봉 이광륜, 한응성, 길안수, 김형진, 조헌의 아들 조완기도 전사했다. 왜적은 조헌 등의 군사를 패배시키기는 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군사가  많았고 관군이 잇따라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밤에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호남이 다시 온전하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15번째 기사)   충남 금산군에는 조헌이 거느린 의병 700명을 기리는 칠백의총이 있다. 이곳 종용사 사당에는 조헌과 영규대사, 고경명과 유팽로·안영, 고종후와 고인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칠백의총’이란 명칭엔 영규 대사가 이끈 의승(義僧) 600명의 애국 충혼은 빠진 것 같아 조금 씁쓸하다.
    • 기획.연재
    2020-08-25
  • 고경명 “주저하다가 스스로 그르치지 말라”
    # 호남 의병은 근왕(勤王) 의병 호남 의병은 향토방위의 영남 의병과는 달리 근왕의병이었다.    한양을 다시 찾고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창의였다. 이는 선조가 개성으로 파천하는 도중에 어쩔 줄 모르고 절망하자, 호종한 류성룡이 “호남의 충의지사들이 머지않아 봉기할 것”이라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 1번째 기사) # 나주의 김천일, 먼저 창의하다.  5월 초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8000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올라갔다가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에 전주로 돌아와 버렸다. 이에 격분한 전 수원부사 김천일(1537∼1593)은 전 동래부사 고경명을 만나 이광의 처사를 비판하면서 조속히 창의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고경명은 신중론을 취했다. 이러자 김천일은 독자적으로 거병에 나섰다. 5월16일에 김천일은 송제민, 양산룡·양산숙 형제, 임환, 서정후, 이광익·이광주 등과 함께 나주에서 창의하였고, 6월3일에 의병 300명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6월23일에 수원에 이르자 의병은 2000명으로 늘어났다.   김천일의 활동은 1592년 6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호남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부터 경기도가 완전히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붙좇아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김천일이 의병 수천명을 규합하니, 선조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김천일의 군사가 수원에 이르러 독산성에 웅거하여 적에게 붙좇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도의 선비와 백성들이 많았다.” # 고경명, 담양에서 창의하다.5월23일에 옥과 출신 성균관 학유 유팽로는 이종사촌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1533∼1592)을 만나서 창의를 권유했다. 5월29일에 광주, 담양, 옥과, 남원, 순창 등 21개 고을 선비들이 담양 추성관에서 모였다. 이날 고경명이 맹주에 추대되었다. 고경명은 각 지역에 창의격문을 보냈다. “나, 고경명은 문장이나 아는 졸렬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이지만, 맹주로 추대되니 여러 동지들에게 수치가 될까 두렵다.(중략)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우리 전라도 사람들이여! 아버지는 그 아들을 깨우치고 형은 그 아우를 격려하여 의병대열에 모두 함께 나서자! 속히 결정하여 옳은 길을 따르라. 주저하다가 스스로 그르치지 말라.” 이리하여 6월11일에 고경명은 6000명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유팽로가 좌부장, 양대박이 우부장, 안영이 종사관이었다.  6월14일에 전주에 도착한 고경명은 관군이 임진강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자 양대박은 추가 모병을 위해 향리 남원으로 떠나고, 본진은 전주에서 군사훈련을 한다. # 양대박, 운암전투에서 승리하다. 양대박(1543∼1592)은 남원·임실·순창 등에서 1000명의 의병을 모았다. 남원부사 윤안성도 지원해 주었다. 6월 25일 새벽에 양대박 의병은 임실에서 전주로 향했다. 그런데 척후병으로부터 왜군 수천명이 운암 계곡에 진을 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왜군은 전주로 향하는 6군 고바야까와 부대였다. 양대박은 운암 계곡에서 아침 식사 준비 중인 왜군을 급습했다. 왜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고경명 의병 최초의 승리였다. 안타깝게도 양대박은 7월 초에 병사(病死)했다.   # 왜군의 전라도 점령 시도 당시에 전라도는 8도 중 유일하게 왜군이 점령 못 한 지역이었다. 1592년 7월 초에 고바야카와의 제6군 1만6000명은 호남 점령을 시도한다.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군은 진안의 웅치(熊峙)를 넘고, 북군은 금산(지금은 충청남도 금산군)의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키로 하였다.한편 조선군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웅치를 지키고,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치를 버티고 있었다. # 권율과 황진, 이치 전투 승리 7월8일에 이치와 웅치에서 전투가 동시에 일어났다. 권율과 황진이 지휘하는 1500명의 군대는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수천 명의 왜군을 이치 전투에서 물리쳤다. 6월 6일에 전라·경상·충청 3도 연합군 5만명이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2000명도 안 되는 왜군에게 어이없이 패배했다. 중위장으로 참전했다가 광주로 돌아온 권율은 의병 모집 격문을 발표하고 군사를 모았다. 당시 관군은 군사도 몇 명 안된 허울뿐이었다. 이러자 1500명의 의병이 모였다. 광주공원에는 도원수충장권공 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가 있다.  이후 권율은 전라도 절제사를 겸했고 이치에서 동복 현감 황진의 부대와 합세했다. 권율의 전투 대비는 철저했다. 복병은 물론이고 길 가운데와 길가 요소요소에 목책을 쌓고 함정을 파 놓았다. 산 정상에는 5색 깃발을 세워 기세를 높였고 검은 연기를 피워서 적이 우리의 병력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7월 8일 새벽에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 수천 명이 공격을 개시했다. 왜적은 조총을 쏘아대고 칼과 창을 번쩍이며 산 정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아군은 적을 철저히 막았다. 특히 선봉장 황진의 활 솜씨는 백발백중이었다. 왜적은 패하여 물러났다. 그런데 황진이 물러나는 왜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이러자 왜적이 다시 정상으로 기어올랐다. 총사령관 권율은 군사들을 직접 독려하여 싸웠다. 전투는 치열하였다. 밀고 밀리는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왜적은 조선군의 사기를 꺾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왜적은 금산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왜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시체는 이치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조선군의 승리였다. 일본은 이치 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 중 첫째로 쳤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   한편 17세의 정충신(1575∼1636)은 자원하여 승전보를 의주 행재소에 알렸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은 선조에게 낭보를 전했고 권율은 나주 목사로, 황진은 익산군수로 승진했다. 이항복 밑에서 일한 정충신은 곧바로 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광주광역시의 금남로는 정충신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 김제군수 정담, 웅치 전투에서 순절하다.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의 관군과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혼성군 1000명이 웅치에서 안코쿠지 에케이의 왜군 수천 명과 싸웠다. 그런데 이복남과 황박의 군사가 패하여 도주하고, 정담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7월9일에 안코쿠지는 전주 안덕원까지 진출했으나 퇴각한 이복남이 포진하고 있었고, 전주성에는 전 전적(前 典籍) 이정란이 낮에는 깃발을 잔뜩 세우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 더구나 합류키로 한 고바야카와 부대가 나타나지 않아 왜군은 철수하고 말았다. 왜군은 물러나면서 웅치에서 죽은 조선군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큰 무덤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국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자들에게 조의를 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쓴 팻말을 부쳤다. 적군이지만 치열하게 싸운 정신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류성룡 ‘징비록’)  
    • 기획.연재
    2020-08-10
  • 이순신 “태산같이 조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
    # 이순신과 의병, 조선을 구하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을 구한 것은 이순신과 의병이었다. 왜군의 작전은 수륙병진책이었다. 육군은 부대를 세 갈래 방향으로 나누어 북상하고, 수군은 서해로 진입하여 조선을 협공한다는 전략이었다.  수군이 서해안 뱃길을 따라 강화도 부근에 도착하면, 한강과 임진강을 통해서 한양과 경기도 일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대동강과 압록강 기슭에 이르면 평양과 의주 방어는 속수무책이었다.   실제로 1592년 6월15일에 평양 입성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서한을 보내 “이제 일본 수군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진입해 오기만 하면, 의주 총공격을 개시할 것인데 대왕의 수레는 어디로 갈 것이냐?”고 협박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은 대동강은커녕 서해도 진출하지 못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  전라좌수사 이순신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혹시 모를 전란에 착실히 대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는 거북선에서 화포를 쏘는 훈련을 하였다. 5월 초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까지 나가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격론 끝에, 이순신은 5월 4일 여수를 떠나 거제도로 향했다. 5월 7일에 이순신은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만났다. 그는 전투에 앞서 이렇게 명령했다. “함부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조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물령망동 정중여산 勿令妄動  靜重如山)” 그리하여 화포와 당파전술로 왜선 26척을 분멸시켰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자신감을 얻었다. 이어서 5월29일에는 거북선이 출전한 가운에 사천·당포·당항포 전투에서 연승했다. 7월8일에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에서 학익진으로 왜군을 크게 이겼다. 이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 이순신과 싸우지 말도록 명령했다. 9월1일에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본영인 부산을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다.  이렇게 4차에 걸친 10번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육지에서는 각 도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 충청ㆍ전라ㆍ경상)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들은 모두 백성의 인심을 잃고 있었다. 관아는 병정과 군량 징발을 독촉하여 백성들이 밉게 보았으며, 게다가 관군은 왜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그러자 도내(道內)의 명문거족과 유생 등이 창의(倡義)하여 일어났고, 원근(遠近)에서 의병에 지원하였다. 비록 의병들은 크게 이긴 것은 없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호남의 전 동래부사 고경명과 전 수원부사 김천일, 영남의 유생 곽재우와 전 장령 정인홍과 전 좌랑 김면, 호서(湖西)의 전 제독관(提督官) 조헌이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런데 관군과 의병은 서로 갈등을 일으켰고 대부분의 수령과 병사들은 의병장과 화합하지 못했다.  다만 초유사 김성일은 요령 있게 잘 조화시켰기 때문에 영남의 의병이 그 덕분에 정중하게 대우를 받았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및 ‘연려실기술’)   선비들은 충군애국(忠君愛國)으로 붓 대신 칼을 잡았다. 민초들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선 것이다. # 영남 의병들왜군이 경상도를 초토화하자 영남의 선비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가 의령에서, 정인홍이 합천, 김면은 고령, 권응수가 영천에서 창의하였다.  - 홍의장군 곽재우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이는 곽재우이다. 그는 4월22일에 거병했다.(6월 1일 ‘의병의 날’은 4월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곽재우는 황해도 관찰사 곽월의 아들로, 외가인 의령에서 태어나서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하였다. 그는 제법 부자였는데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장사 심대승 등 50여 명을 모았다. 이러자 전쟁 초기 흩어졌던 패잔병들도 합세해 무려 천여 명에 이르렀다. 곽재우는 홍의장군이라 일컫고 앞장서서 적진을 드나들었는데, 의령 거름강(岐江) 등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을 주로 펼쳤다. 왜군과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역부족인 점을 보강한 전술이었다.     곽재우의 가장 빛나는 승전은 정암진(鼎岩津)전투였다. 안코쿠지가 이끄는 6군 고바야카와 휘하의 별동부대 2000명이 삼가, 남원을 거쳐 전주로 들어가기 위해 의령에 도착했다.안코쿠지는 정찰대를 보내 정암진 도하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두었다. 이러자 곽재우는 밤중에 나무 푯말을 늪지대로 옮겨 놓고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도하를 시작한 왜군 선봉대는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서 허둥댔고, 매복한 의병이 기습공격을 하자 왜군 주력군도 패하고 말았다. 이후 곽재우는 왜군을 현풍과 창녕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왜적이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 합천의 정인홍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전 장령 정인홍이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선봉장인 전 첨사 손인갑은 무용(武勇)이 절륜했다. 손인갑은 무계(茂溪)에 주둔한 왜적을 공격하고 돌아왔다. 이후 그는 초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왜적이 상류(上流)에서 재물을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으로 내려가 배 10여 척을 빼앗고 왜적을 많이 죽였다. 그런데 적선 한 척이 도망치자 손인갑은 강으로 달려 들어가 추격하다가 타고 있던 말이 모래 구덩이에 빠져 죽었다. 그는 싸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다가 죽은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 고령의 김면고령의 전 좌랑 김면도 집안 하인 700명을 거느리고 창의하였다. 이러자 곽준ㆍ문위ㆍ윤경남ㆍ박성 등이 합세하여 4, 5일 동안에 2000여명이 모였다. 김면은 지례에서 거창에 침범한 왜군을 격퇴시켰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 이후 김면은 거창에 머무르면서 지례ㆍ금산의 길을 막고, 성주에 주둔한 정인홍은 고령ㆍ합천의 길에 버티고, 곽재우는 의령에 진을 치고 함안ㆍ창녕의 강을 건너오는 적병을 막아 경상우도가 편안할 수 있었다.- 권응수, 영천성을 탈환하다. 경상좌도에서는 별장 권응수가 의병을 일으켰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막하에 있던 그는 고향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 활동을 하다가 경상좌병사 박진 휘하에 들어갔다. 7월 하순에 권응수는 연합의병장이 되어 정대임·정세아·조성·신해가 이끄는 의병 4000명과 함께 영천성에 이르렀다. 1000명이 주둔한 왜군은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는 영천성을 공격하여 성문을 깨뜨리고 화공(火攻)으로 왜적을 죽이니 수백 명이 죽고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었다. 이러자 경상좌도의 여러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 기획.연재
    2020-07-20
  • “장수가 군사를 쓸줄 모르면 나라를 내준다”
    # 신립의 독선 4월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은 8000명의 군사를 얻었다.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과 함께 조령(鳥嶺 문경 새재) 시찰에 나섰다. 신립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김여물 : 아군의 수가 열세이고 적이 기세가 날래어 맞싸우기가 어려우니 조령을 지키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종장 : 벌판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 불리할 듯합니다. 이곳의 험한 산세에 의지해 많은 깃발을 꽂고 연기를 피워 적을 산란하게 만들어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신립의 생각은 달랐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벌판에서 기병으로 짓밟으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또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되었으니 배수진을 쳐야 한다.”  충주 단월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신립은 상주 전투에서 패한 이일을 만났다. 신립이 이일에게 왜적에 대해 묻자 이일이 말했다. “이번의 왜적은 1555년 을묘왜변과 견줄 게 아닙니다.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한양을 지키십시오.”  이러자 신립이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패장이니 목 베어야 마땅하나 이번에 공을 세워 속죄하라.”  신립, 지나치게 독선적이다. 종사관 김여물·충주목사 이종장과 패장 이일의 의견을 아예 무시했다.  # 천혜의 요새, 조령을 포기한 신립    고니시의 왜군 1만8000명은 4월25일 상주에서 이일의 군대를 괴멸시키고 26일 문경에 들어왔다. 조령 입구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山勢)를 보고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여러 차례 정찰하였는데 군사가 한 명도 없이 조용하므로 과감히 군대를 진출시켰다. 신립은 조령을 안 지킨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나중에 명나라 도독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다가 탄식하기를 “이런 형세가 있는데도 조령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申摠兵 신립)은 지모가 없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   #  순찰 군관을 목 베다니 4월27일 밤에 순찰을 나간 군관 한 사람이 적병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했다. 이러자 신립이 홀연히 성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러자 군중(軍中)이 소란스러웠는데 신립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 신립은 몰래 객사(客舍)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신립은 순찰 군관이 망언하여 여러 사람을 현혹시켰다며 목을 베어 군사들에게 조리돌렸다.    이윽고 신립은 적병이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는 왜적이 10리 가까이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신경은 조령을 안 지킨 신립에 대하여 이런 시를 남겼다. 구름 위의 험한 산길, 날카로운 칼문 같은데 낭떠러지에 매달린 나무, 가지 잡기도 두렵네.장군이 험한 곳 버려 좋은 계책 못 썼으니헛되어 사람들 전사시켜 귀신 되게 하였네.(신경, ‘재조번방지’) # 신립,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다.4월28일에 신립은 달천을 뒤에 두고 탄금대(彈琴臺 가야 출신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그곳은 좌우로 논이 많고 물풀이 뒤섞여 있었고 며칠 전에 비가 내려서 말이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이를 본 광흥주부(廣興主簿) 이운룡이 “이것은 죽을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말렸다. 그러나 신립은 “망녕된 말로 일을 그르친다”며 곤장 30대를 쳤다. 이운룡은 흐르는 피를 씻은 뒤 전투대열에 합류했다. 종사관 김여물도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아들 김류에게 편지를 썼다.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이르는 사람이 없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그는 또 집안에도 편지를 썼다. “나는 여기서 죽을 터이니 가족들은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계시는 곳)로 달려가고 다른 곳으로는 피난하지 말도록 하라.”  김여물은 편지를 종에게 주어 집안에 전하게 했는데 이미 왜적이 사방에 이르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4월28일에 고니시의 왜군은 단월역에 도착했다. 고니시는 달천 벌판에 조선군이 배수진을 쳤다는 첩보를 접하고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고니시가 7000명으로 중앙군을 맡고, 소 요시토시가 5000명으로 좌군, 시게노부는 3000명으로 우군을 맡았다. 후방은 하리노부가 맡았다.      # 기병과 보병의 싸움고니시의 왜군은 충주 땅에 들어오면서 마을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정오경에 그들은 탄금대로 내달아 삼면을 완전히 포위했다. 조선군과 왜군은 달천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신립의 군대는 8000명, 고니시는 1만 5000명이었는데, 두 지휘관의 전술은 달랐다. 여진족을 정벌한 조선 최고의 명장인 신립은 기병이 주특기였고 고니시는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주력이었다. # 왜군의 전술에 당한 신립  먼저 신립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충주목사 이종장이 지휘하는 조선군 기병 1000명이 돌격했다. 왜군은 조선군의 활에 맞고, 말에 짓밟혀 죽었다. 고니시의 중앙군이 밀린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신립은 2차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2000명의 기마대가 돌격해 나갔다. 왜군은 둘로 갈라져 단월역 쪽으로 잠시 후퇴하다가 곧이어 달천강을 따라 아래에서 쳐들어온 좌군(左軍)과 산을 돌아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넌 우군(右軍)이 합류했다.  소 요시토시의 좌군 조총부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3열 연속으로 총을 쏘며 전진했고, 우군도 가세했다. 게다가 조선군의 말이 습지에 빠져 허덕이자 조총의 표적이 환히 드러났고, 말과 병사가 한꺼번에 거꾸러졌다. 왜적의 총소리는 땅을 뒤흔들었고, 조선군의 쌓인 송장이 산과 같았다. 신립은 어쩔 줄 모르다가 혼자서 말을 타고 두 번이나 적진으로 쳐들어갔으나 전진할 수 없었다. 신립이 도로 강가로 달려오는데 마침 김여물이 여울 앞에 있었다. 신립은 김여울을 부르면서 “그대는 살기를 원하는가?”하였다. 그러자 김여물이 웃으며 “내가 어찌 목숨을 아낄 사람이요?” 하고 도로 탄금대 밑으로 달려가 신립과 더불어 왜적 수십 명을 죽였다. 이때 왜적들이 바짝 추격해오니 두 사람은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신립은 46세, 김여물은 44세였다. (신경, ‘재조번방지’) 한편 이일은 동쪽 골짜기를 따라 산으로 도망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서울 도성에 가서 치계(馳啓)하였다.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망연자실이었다. 탄금대 전투는 기병대 보병, 말과 조총의 대결이었는데 왜군의 일방적  승리였다. 왜군 종군 승려 덴케이는 『서정(西征)일기』에 “왜군은 3000개의 수급을 취했고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고 기록했다.  한편 조선군 대군이 온 것을 믿고 피난하지 않은 충주의 백성들과 관속(官屬)들은 다른 고을보다 심하게 죽음을 당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이로써 조선의 방어선은 무너졌고 4월30일에 선조는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 갔다.      # 신립의 패인(敗因)은 오만과 무지신립의 패인은 오만과 무지이다. 부하의 의견들을 아예 무시했고, 조총으로 무장한 훈련된 왜군을 하찮게 보았다.  나중에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신립은 날쌔고 예리하기로 당대에 이름이 나 있었지만, 계책과 계략에는 서툴렀다. 옛사람이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만 훗날을 위해 경계(警戒)로 삼아야 할 일이기에 여기에 덧붙여 써 둘 따름이다”
    • 기획.연재
    2020-07-07
  • 민선 7기 신우철 완도군수 취임 2년- ‘미래 100년 대계’ 위해 해양치유산업 역점 추진
      완도군은 미래 100년 대계를 위한 미래 산업으로 해양치유산업을 역점 추진하고 있다. 해양치유란 청정한 환경 속에서 해양기후와 해풍, 바닷물, 갯벌, 해조류 등과 같이 해양자원을 이용해서 만성질환을 치료하고 심신을 치유하는 건강 증진을 말한다. 2017년 완도군은 해양치유산업 선도 지자체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해양치유산업 전담 부서를 신설하고 사업 추진 전략과 인프라 구축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지난해를 해양치유산업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기반 마련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해양치유센터 건립비 320억 원과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지역발전투자협약 시범 사업에 ‘해양치유 블루존 조성’ 사업이 선정되어 182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오는 10월 해양치유센터가 착공되며, 국내 최초 해양·산림 치유 공간인 ‘약산 치유의 숲’과 우리나라 최초 슬로시티인 청산도에 해양치유공원을 조성하는 등 각종 사업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양치유단지 조성에 따른 투자 유치를 위해 미국 LA에서 투자 설명회를 개최하여 1000만 불의 투자 유치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앞으로 군은 민자 투자 유치 기본 계획을 수립하여 숙박 시설 외에도 민간 해양치유전문병원, 골프테마파크 등의 시설을 갖춰나갈 계획이다. 신 군수는 “이와 같은 사업들을 착실하게 추진하여 국민 건강 증진은 물론 많은 일자리와 소득 창출로 지역 경제가 활기를 띄고, 해양치유산업을 의료와 관광, 바이오헬스 산업과 연계함으로써 완도를 해양치유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울러 민선 7기 2년 동안 국고 예산을 총 8553억을 확보하였으며, 해양치유 블루존 조성과 더불어 어촌뉴딜 300사업, 일반 농산어촌 개발 등 88건의 공모 사업 선정, 대한민국 지방자치 경영대전에서 대통령상 수상, 한국공공자치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지방자치 경영대상에서 종합대상 등 42건의 수상과 각종 평가에서 월등한 성적을 거두며 일 잘하는 지자체로 꼽혔다. 안전하고 우수한 완도 수산물 수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미국, 중국, 베트남 등 3개국에서 전복, 광어, 해조류 및 전복 가공품을 현지 바이어들에게 소개하고 수출 가능성을 타진하는 수출상담회를 개최하여 1450만 불의 수출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약 930억 원(지난해 말 기준)의 수출 실적을 거두었다. 날이 갈수록 환경오염이 심각해지고 수산물의 안전성이 중요시되고 있는 가운데 깨끗한 바다에서 키운 완도 전복이 친환경 수산물 국제 인증인 ASC를 아시아 최초로 획득함으로써 완도 수산물에 대해 차별화를 둘 수 있게 됐다.올해는 친환경 수산물 국제인증인 ASC, ASC-MSC를 확대하고, 코로나19로 대면 활동이 어려워짐에 따라 화상 회의 등을 개최하여 수출 상담을 진행할 계획이다. 수산물뿐만 아니라 완도의 농산물도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청정한 완도의 자연에서 키운 완도자연그대로미(米)가 지난해 말레이시아와 미국에 이어 올해는 러시아 수출 길에도 올랐다. 앞으로 해양치유산업에 쓰이는 식재료를 완도에서 생산되는 것만을 제공하여 완도의 농·수·축산업이 동반 성장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3회 연속 국제 행사 승인을 받아 내년 4월 23일부터 5월 16일까지 2021완도국제해조류박람회가 개최된다. 지난 1월 박람회조직위원회 사무국 출범 후 관람객 100만 명을 목표로 박람회를 준비하고 있다. 2014년과 2017년 두 번의 박람회는 해조류의 가치를 알리고 해조류 산업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2021박람회는 해조류를 소재로 한 해양 바이오와 의약, 뷰티, 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과 4차 산업을 융·복합시키고, 특히 해양치유산업과 박람회를 연계하여 추진할 계획이다. 신 군수는 “완도산 해조류가 해외 시장을 선점하고, 해조류 산업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도록 내실 있게 준비하여 반드시 성공적인 박람회로 이끌도록 하겠다”고 피력했다. 완도수목원은 전국 난대림 면적의 35%를 차지하고 있고, 붉가시나무와 구실잣밤나무, 동백, 황칠, 후박, 감탕나무 등과 770여 종의 희귀 난대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지난해 10월에는 완도수목원이 국립난대수목원 대상지 평가에서 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후 후속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관계 전문가들과 전략회의를 개최하는 등 최종 선정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국립난대수목원 조성 시 앞으로 연간 방문객은 85만 명, 고용 유발은 1만 7000여 명, 경제적 효과는 1조 2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군은 군민 삶의 질 향상과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막대한 만큼 완도수목원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목원으로 조성하여 국민이 그 가치를 향유하고, 해양치유와 산림치유가 어우러지는 치유산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한다는 방침이다. 지난 6월 4일에는 국립난대수목원과 연계한 리조트, 호텔 분야에 2개 기업에서 2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완도는 대한민국 청정바다 수도로 청정한 해변을 10군데나 넘게 보유하고 있는데 그중 신지명사십리해수욕장이 친환경적이고 안전한 해수욕장에만 부여하는 블루플래그 인증을 우리나라 최초로 받은데 올해 재 인증을 받아 국내 최고 휴양지의 명성을 증명했다. 이외에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완도사무소가 신설되어 3월에 업무를 개시하였고, 전지훈련팀 유치 등 크고 작은 성과들이 참 많았다.12개 읍면을 순회하며 군민과의 대화를 통해 지역 현안 사항 및 군정 발전을 함께 모색하는 ‘군민 행복 정책 토크’를 실시하는 등 소통 행정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군은 섬 주민들의 교통편의 증진과 해상 물류비 절감, 해양 관광 활성화를 위해 연도·연륙교 사업을 추진 중이다. 완도 약산, 금일, 금당, 고흥 거금을 잇는 연륙교 사업의 1단계 구간인 완도 금일 일정항에서 약산 당목항 간 연륙교 건설을 위해 국도 27호선 기점을 고흥 금산에서 완도 고금으로 변경하여 지방도 830호선이 국도로 승격될 수 있도록 전남도와 협의하여 중앙정부에 지속적으로 건의할 계획이다.구도~소안 간 연도교 사업은 예비 타당성 조사를 통과하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고, 예산 확보를 위해 국회와 중앙부처 등을 지속적으로 방문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군민 안전과 청정 완도를 사수하기 위해 67일 동안 열 감지 카메라 운영 및 발열 체크를 실시하였으며, 코로나19 예방 수칙 중 손 씻기가 중요함에 따라 개학 전 유치원 및 초·중학교 등 18개소에 세면대를 설치했다. 봄철 관광객이 급증함에 따라 주요 관광지가 있는 섬 입도 통제 행정명령을 내렸으며, 해외입국자의 경우 군에서 별도로 시설을 마련하여 2주간 격리를 의무화하도록 하였다. 코로나19 예방 및 확산 방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현재까지 완도군에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다.신우철 완도군수는 “지난 2년 동안 이와 같은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시고 군정에 협조해주신 우리 5만여 군민과 향우 분들의 덕분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앞으로 지역 현안사업과 더불어 해양치유산업을 착실하게 추진하여 완도가 해양치유산업의 중심지, 대한민국의 해양관광 거점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신우철 군수는 끝으로 “현재까지 우리 군에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마음을 놓을 수 없으므로 코로나19 사태가 종식할 때까지 군민의 안전과 청정완도를 사수하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대응해나가겠다”고 말했다.       
    • 기획.연재
    2020-06-25
  • 아마추어와 프로의 싸움 ‘상주 전투’
    # 선조는 안보 불감증 왜적이 부산을 침탈한 지 5일째 되는 4월 17일 이른 아침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한양 조정에 도착했다.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보고였다. 긴급 상황을 알리는 봉수(烽燧 횃불과 연기)는 아예 작동 안 했다.대신들은 비변사 당상들과 함께 빈청(賓廳 대신들이 정무를 의논하는 곳)에 모여 선조를 직접 뵙기를 청했다. 그런데 선조는 무슨 영문인지 대신들과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대신들은 문서로 보고를 했다. 이러자 선조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부지역에,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동부지역에, 조경을 우방어사로 서부지역으로 내려보내고,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을, 변기를 조방장으로 조령(鳥嶺  ‘문경 새재’로 더 친숙함,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 사이의 재)을 지키게 하고, 겁 많은 경주부윤 윤인함을 친상(親喪) 중에 있는 전 강계 부사 변응성을 복귀시켜 교체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 군사 3백 명도 선발 못 한 나라18일엔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도착했고, 여러 고을이 점령되었다는 보고가 연달았다. 이러자 한양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이일은 300명의 정예병도 못 구해 3일이 지나도록 한양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은 이일 혼자서 먼저 떠나도록 하고, 별장 유옥이 군사를 모집하여 뒤따라가도록 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7일)당초에 이일은 병조의 ‘군사 선발 장부’를 입수하여 살펴보니 시정잡배와 서리(胥吏)ㆍ유생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임시 점검했더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詩卷 과거시험 답안지 종이)을 들고 있고, 아전들은 평정건(平頂巾 관청 서리가 쓰는 두건)을 쓰고 와서 징병을 면제해 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참, 한심한 일이었다. (류성룡, 징비록) # 삼도순변사 신립, 남쪽으로 향하다. 18일에 선조는 병조판서 홍여순을 김응남으로 경질했다. 홍여순은 맡은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군졸들의 원망이 많았다. 이어서 선조는 류성룡을 장수들의 감독과 격려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로, 김응남을 부사로 삼았다.   20일에 선조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제수하고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하면서 말했다. “이일 이하 누구든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참(斬)하라.” 이윽고 선조는 1591년에 서인 정철 일당(一黨)으로 몰려 의금부에 갇힌 전(前) 의주목사 김여물을 석방하여 신립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신립과 군사 수백 명이 출정하자 도성 사람들은 시장 문을 닫고 지켜보았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7일)                         # 대구 사수가 무산되다.                                            경상감사 김수는 적변(賊變)을 듣고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 : 작전 지역에 군사들이 모이면 중앙에서 온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군사작전을 편다)에 의거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각자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모이라고 하였다. 이에 조령 밑의 수령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대구로 가서 노숙하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순변사를 사흘이나 기다렸다. 하지만 순변사 이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적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벌판에 모인 농민들이 동요하였다. 게다가 큰비가 내리고 군량도 떨어지니 이들은 밤중에 흩어져 버렸다. 이를 본 수령들도 말을 타고 줄행랑을 쳤다.   대구 사수가 무산(霧散)된 것은 순변사 이일이 군사 300명도 못 뽑아 서울에서 3일을 허비하고 20일에야 출발한 탓이었다. #  군사는 겨우  8-9백명4월21일에 이일은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고을은 텅 비어 있었다. 이일은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 60명에게 먹이고 23일에 상주에 이르렀다. 그런데 상주목사 김해는 순변사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역참에 나갔다가 그 길로 산속으로 달아나 버렸고, 판관 권길만 혼자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군사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권길을 책망하고 뜰에서 목을 베려 했다. 이러자 권길은 군사를 불러 모으겠다고 애원하고는 밤새도록 촌락을 돌아다니며 농민 수백 명을 끌어모아 24일 아침에야  돌아왔다.   이윽고 이일은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모았다. 곡식을 받으려고 산골에서부터 하나둘씩 백성들이 모여드니 수백 명이 되었다. 이리저리 모인 군사는 모두 8-900 명이었는데 이들은 오합지졸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6000 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과장일 것이다. # 척후(斥候)도 안 세우다니  이때 고니시 왜군은 이미 선산(구미시 선산읍)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김천시 개령면) 사람이 와서 왜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렸다. 이일은 그가 유언비어로 군사들을 현혹시킨다고 노하면서 그를 목 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리게 하였다. 적을 정탐(偵探)하는 일은 병법(兵法)의 기본 중 기본인데 척후(斥候)도 안 세운 이일. 게다가 왜적의 낌새를 알린 백성마저 참(斬)했으니 정말 한심하다.  4월 24일 밤에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상주 남쪽 20리 되는 장천(長川) 냇가에 진을 쳤다. 그런데 순변사 이일은 척후(斥候)를 아예 안 세워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이일, 도망치다. 25일에 이일은 상주에서 모은 농민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군사 8-900 명으로 북천(北川)에서 진법을 훈련했다.얼마 뒤에 여러 명이 두셋씩 짝을 지어 숲속을 나와 배회하며 이일의 진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왜군의 척후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밤에 개령 사람이 참수된 지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고을의 성안 몇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때야 이일은  군관 박정호 등을 시켜 정탐하게 하였다. 그런데 왜군이 숲 사이에 잠복하여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죽이고는 군관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다. 군관의 머리가 사라진 것을 본 우리 군사들은 기가 꺾일 대로 꺾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의 대부대가 집결하여 조총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즉사했다. 이일이 급히 군사를 재촉해 활을 쏘게 했지만, 아군이 쏜 화살은 겨우 수십 보쯤 가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이일의 군사들은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러자 이일은 말을 달려 달아났다. 하지만 왜군이 추격해 오자 말을 버리고 갑옷도 벗어 던졌고, 왜군이 계속 쫓아오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가까스로 문경에 이른 그는 패전 상황을 선조께 알리고 죄를 기다리다가 신립이 있는 충주로 달려갔다. (류성룡, ‘징비록’) # 상주 전투의 패인(敗因)  상주 전투의 패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일(1538∼1601)은 왜적에 무지(無知)했다. 왜군의 병력, 기량이나 동태를 너무 몰랐다.  반면에 왜군은 조선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벌판에서 훈련받고 있는 조선군을 기습했다. 전투는 하나 마나였다. 조선군은 900명인데 왜군은 1만 명으로 11배나 많았고, 조선군은 전투 한 번 안 해 본 농민인데, 왜군은 100년 가까운 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며 전투 경험이 풍부했고 신무기 조총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상주 전투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싸움이었다. 오죽했으면 ‘무데뽀(無鐵砲 아무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덤비는 것)’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실려 있을까?   그런데 이런 일은 3일 뒤인 4월 28일의 신립과 고니시의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도 반복되었다.  
    • 기획.연재
    2020-06-22
  • 싸워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 경상 좌병사 이각은 도망치고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은 지역의 군민(軍民)과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모아 성을 지켰다. 양산군수 조영규(전남 장성군 출신)도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그런데 좌병영에서 달려온 경상좌병사 이각은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동래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치겠다”고 핑계대고 조방장과 함께 달아나 버렸다. 송상현이 동래성을 같이 지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줄행랑쳤다. 정말 비겁하다. # 일본인도 존경한 충신 송상현 4월14일에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기세를 몰아 곧바로 동래성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목판(木板) 하나를 성 밖에 세웠다.  “싸우려면 싸우고,                   戰則戰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  不戰則假道 ”    그러자 남문루에서 송상현도 목판을 왜적에게 던졌다. “싸워 죽기는 쉬어도           戰死易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假道難 ”  이러자 왜군은 날이 저물기도 전에 동래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15일 새벽에 왜적이 진격해 오니 성안 사람들은 놀라고 울부짖었다. 송상현은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일(半日)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왜군은 양산군수 조영규, 별장 홍윤관 등 모든 군민을 죽였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대마도 왜인 평성관(平成寬)은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송상현에게 대접을 후하게 받았다. 그는 송상현의 옷을 끌며 숨으라고 권유하였으나 송상현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왜적들이 송상현을 생포하려고 하자, 그는 항거하다가 죽었다.  송상현은 죽기 전에 손수 부채에다 ‘포위당한 외로운 성, 달은 희미한데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집안 종에게 주면서 그의 부친 송복흥에게 주라고 하였다. 한편 송상현이 죽자 1591년 1월에 조선통신사 황윤길 등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던 왜의 사신 평조신(平調信)이 탄식하며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을 세워주었다.     송상현의 함흥기생 출신 첩은 왜군이 더럽히려 하자 자결하였다. 왜군은 그녀를 송상현과 함께 묻었다.     또 양인(良人) 출신 첩 이씨도 잡혔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별실에 가두었다. 나중에 그녀는 일본에 끌려가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1605년에 사명대사가 데리고 온 포로 3000명과 함께 조선에 돌아왔다.(1607년 조선통신사 경섬의 ‘해사록’) 송상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군자감(군수품 저장과 출납 관청) 의정을 거쳤다. 1591년 3월에 서인 정철이 왕세자 책봉 건의와 관련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하자, 4월에 동래부사 고경명(나중에 전라도 의병장)도 정철의 당이라 하여 파직당했는데, 송상현은 고경명 후임으로  부임했다. 1594년에 병사 김응서가 울산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을 때 가토는 송상현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인 정읍으로 옮겨 장사(葬事)지내도록 허락하고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14일) 부산시 송상현 광장엔 충렬공 송상현 선생 상이 세워져 있고 충렬사엔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한 고향인 전북 정읍시 정충사엔 송상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밀양부사 박진의 용맹4월15일에 동래성에서 도망친 이각은 동래 소산역에서 밀양부사 박진(1560~1597)을 만났다. 박진은 급히 동래로 가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소산역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박진은 이각에게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이 위태하니 내가 앞을 막거든, 공은 그 뒤를 지키라”고 하면서 500명을 거느리고 왜군 앞에서 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각이 도망쳐 후방 지원이 없어지자 박진도 후퇴하여 밀양으로 돌아왔다. (박동량 ‘기재사초’) 16일에 고니시의 왜군은 길을 나누어 한패는 언양을 침범하고 다른 한패는 밀양을 침범했다. 이때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 500명과 함께 작원강(鵲院江)의 좁은 잔교(棧橋)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왜군이 감히 진격할 수 없었다. 작원강의 잔교는 경남 밀양시 삼량진읍 검세리 작원마을과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사이에 있는 험한 벼랑길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작원(鵲院)으로부터 남으로 5ㆍ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棧道)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으로 물빛이 짙은 푸른 빛이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얼마 뒤에 왜군이 양산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왔다. 이러자 잔교를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박진도 성으로 돌아와 무기고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하였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에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박진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 도망치기 바쁜 경상감사와 수령들 한편 소산역에서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은 다시 좌병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좌병영을 지킬 생각은 않고 밤에 첩을 내보내면서 창고에 간직해 둔 무명 1000 필을 함께 싣고가게 하고, 그 역시 새벽을 틈타 도망쳤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5월에 이각이 임진강 진중에 나타나자, 도원수 김명원이 그를 참수했다. 겁쟁이 이각은 적을 보기도 전에 수차례 도망갔고, 탐욕은 국가가 어수선할 때도 나타났으니, 그는 죄인 중 죄인이었다. 이각 후임으로 경상좌병사가 된 박진은 경주성 탈환의 공을 세웠다. 9월2일에 선조는 그에게 양피(羊皮) 옷 한 벌을 특별히 하사했다.   이윽고 4월18일에 구로다의 3번대 왜군 1만1000명이 김해를 공격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남문을, 초계 군수 이유검은 서문을 지켰다. 그런데 이유검은 야경(夜警)한다고 핑계 대고 달아났고, 서예원은 이유검을 쫓아간다며 도망가서 성이 함락되었다. 나중에 이유검은 참형 당했다. (선조실록 1592년 5월 10일) 이렇게 경상도 수령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경상좌수사 박홍, 방어사 성응길, 조방장 박종남·변응성, 안동 부사 정희적, 안동 판관 윤안성, 풍기 군수 윤극임, 예천 군수 변양우 등이 모두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 도망갔다.(조경남 ‘난중잡록’) 경상감사 김수도 변고를 듣고 진주에서 동래로 달려가다가 왜적에 놀라 다시 진주로 갔다가 합천으로 피신했다. 그는 우왕좌왕하다가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에게 피난하라고만 하였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의 재앙은 국가를 보위해야 할 감사와 수령의 무책임과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 기획.연재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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