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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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의 중심 서구, 중단없는 발전 자신 있다!”
    - 재선 도전 소감은? 서구는 광주의 중심이다. 위치뿐 아니라 행정·정치·금융·상업·교통·의료 등 모든 면에서 광주의 미래를 좌우할 중심구다. 따라서 서구청장은 행정은 물론 정치 역량이 풍부해야 한다.구청장이 능력도 경험도 없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구민에게 미치고 결국 광주 전체로 퍼질 것이다.이런 상황을 막고, 중단 없는 서구 발전을 위해 재선에 도전했다. 특히 일부 정치꾼들이 농단하는 공천장이 아니라, 우리 서구민들의 직접 선택에 의해 지난 4년의 성과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평가받고 싶다- 공천 등 민주당의 문제는 무엇인가?위원장이 독단(獨斷)으로 자기 사람을 공천한 데서 대참사가 벌어졌다. 광주 특히 송갑석 시당위원장 지역구가 있는 서구 공천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가히 폭발적이다. 언론, 시민사회단체, 지역 정치 관계자들의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특히 대선 패배라는 큰 상처를 입은 민주당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 대책도 없다는 것이 이번의 자기 사람 심기 등 불법·막장 공천으로 드러났다.내 경우, 중앙당의 부적격자 7대 기준을 완전히 무시한 채, 치욕적인 불명예를 뒤집어 씌우며 경선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오직 가장 유력한 후보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말부터 ‘서대석은 무조건 공천 배제되니 불출마한다더라, 시당위원장과 가까운 사람이 공천받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지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설마 했는데 이런 파렴치한 짓을 자행한 것이다.그뿐 아니다. 나와 함께 평생 민주당원으로서 정치해온 시·구의원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반면에 지역 연고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느닷없이 서구에서 공천을 받기도 했다.이것이 민주국가의 정당인가? 지역민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는 더불어민주당 맞는가? 대선 패배로 민주당이 최대 위기 상황에 처했는데도 모른 체하며, 지역에서 ‘골목대장’ 행세나 하려는 작태가 한심하다. 헛웃음만 나온다.- 재임 기간 중 치적과 아쉬운 점은?자랑할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시민과 함께, 사람 중심의 서구’를 만들고 가꿔왔다는 것이다. 민선 7기 구정 목표를 ‘사람 중심 서구’로 정한 이유가 있었다. 취임 당시 서구는 엄청난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 집행부와 노조의 갈등이 직원들 간의 대립이 되더니 지역사회로 퍼졌다. 마침내 주민과 주민, 주민과 공무원의 반목으로 확산돼 서구 상황이 극도로 어려웠다. 나는 취임하자마자 노조와의 대화를 통해 갈등을 완전하게 해소시켰다. 그것을 시작으로 해 서구 공직자와 서구민 모두가 서구 발전을 위해 화합하고 소통하는 모범 자치구로 변모했다.그 결과 서구는 주민자치와 복지 분야에서 다른 지자체들이 부러워할 만큼 크게 발전한 상태다.실적으로도 증명된다. 자치 분야에서 「전국 주민자치박람회」 6년 연속 최다 우수지자체로 뽑혔고, 복지 분야에서 AI통합복지 모델로 「좋은 정책대회」 대상을 수상했다. 나 개인이 아니라 서구의 영광이다. 바로 ‘사람 중심 서구’의 자랑스러운 서구민이라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표 공약은?크게 두 갈래로 이야기하겠다. 하나는 추구하는 가치·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 목표다.우선 가치적 방향을 말씀드리겠다.첫째, 주민의 자율과 참여로 운영되는 동 정부에 인력·예산·업무를 대폭 이양해 주민 스스로 자기 마을 사업을 시행하는 완전한 주민자치 실현이다. 둘째, 그동안 서구가 추진해 ‘복지 선도 지자체’로 위상을 굳힌 통합 돌봄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K복지모델’ 완성이다.셋째, 코로나 19 상황에 건강이 최대 화두가 된 것을 계기로 서구 건강공동체 정착, 넷째 전 세계적 관심사인 기후위기 대응 관리를 통한 탄소중립도시 서구확립이다.구체적 실현 목표도 제시하겠다.가장 중요한 것이 마륵동 탄약고 이전이다. 마륵동 탄약고 이전은 서구는 물론 광주의 미래를 바꿔 줄 초대형 사업이다. 탄약고 부지는 국제문화교육지구와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배후지원단지로 육성하게 돼 있다. 탄약고 부지 인근에 대형 복합쇼핑몰을 유치하고, 김대중컨벤션센터 제2전시장, 특급호텔 신축 건립 등과 연계하면 상무지구 일원에 호남권을 대표하는 MICE사업을 육성할 수 있다.이밖에 광주시공공의료원 설립, 도심융합특구 조성 사업, 광주 대표 도서관 설립, 상무소각장 활용 문화재생사업, 중앙공원 민간특례사업, 광천동 재개발 사업 등을 공약했다. 원활하게 추진해 큰 성과를 낼 것을 약속한다. - 당선 후 민주당에 복당하나? 아직 거론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내 지지자 모두가 민주당 복당을 바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당 밖에서 민주당을 바로 세워주면 좋겠다고 조언하는 분들도 많다. 먼저 구정에 전념해 서구의 행정과 정치가 제대로 운영되면, 더불어민주당이 올곧게 바로 설 수 있는 근거도 될 것이다.- 좌우명이 있다면? 수처작주(隨處作主)를 마음에 두고 있다. 어떤 곳에 있더라도 주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 정치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내 삶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사람을 섬기며 사는 것’이다. 너무 피상적일지 모르지만 내가 살아온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여러 공·사직을 겪었고 현재 선출직 공무원까지 됐지만 그 지향점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무래도 정치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을 텐데 나는 이번(8회 지방선거)에 당선되면 다시 출마하지 않는다. 4년 후에는 현실 정치를 끝낸다는 것이다. 이번에 재선에 나선 것도 결코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속했던 집단의 뒤틀린 점을 바로 잡고, 내가 대표했던 지역을 튼실한 발전 궤도에 올려놓으려는 마음 뿐이다. 서대석 후보는 선출직 공직자의 어려움으로 ‘자기 시간이 없고 모든 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꼽았다. 서구청장이 되면서 주말은 사라졌고, 국토를 종단할 정도로 즐겼던 산악자전거(MTB)를 타본 기억도 까마득하다.건강법은 그냥 ‘일’이다. 쉴 틈도 없이 움직여도 괜찮을 만큼 건강을 타고났다. 서대석 후보는 더불어민주당이 대선에 패배한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지방 분권에 실패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국세·지방세 비율을 조정해 재정 분권을 이루고 지금도 지방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각종 복지사업 등 업무를 지방에 이양했다면 결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서대석 후보는 지난 4년 동안 주민자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제 정치와 행정은 주민들이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그것을 원활하게 시행하도록 돕는 역할에 치중해야 한다고 절감했다. 서대석 후보는 그러므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치인’이라고 자부한다. 모두들 목표를 갖고 그곳에 이르는 길은 또 헤아릴 수 없게 많겠지만, 결코 ‘사람’을 벗어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에서나 주인 되려는 것(隨處作主)은 결국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치열한 각오 아니겠는가!부인과 슬하에 1남 1녀. 부인은 지난 4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서구 관내 18개 동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냥 가서 사진 짝고 돌아오는 식이 아니라 모든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참석자들과 함께 했다. 서대석 후보가 동네를 다니다보면 “(서대석 후보) 부인 봐서라도 찍을게!”라고 격려해주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서영석 국회의원(경기 부천시정, 더불어민주당)이 친동생. 종교는 천주교.      
    • 기획.연재
    2022-05-26
  • “물레방아 도는 힘, 한반도 이끈다!”
    “민주당, 대선 아쉬움 버려야!” 지방선거 행태 지적  2014년 청와대 하명수사로 정치적 좌절 “결국 내탓”“호남 위상 확립해 한반도 평화·통일 이끌 것” 다짐5·18이 42년째다. 헌법에 넣어야 할 가치라는 찬사부터 모리배들이 짬짜미로 잇속 챙기는 야바위판이라는 비판까지, 더께는 쌓이고 또 커진다. 비좁은 땅덩어리가 갈라진 것도 안타까운데, 그나마 온갖 구실과 핑계로 나뉘고 쪼개져 성한 곳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해마다 5월이 되면, 거리에 사람이 많아지고, 시끄러워지고, 길이 막히고, 곳곳이 난장(亂場)이 된다. 어떤 여지도 용납하지 않고 무류(無謬)를 지향하며, 독선(獨善)의 탑을 쌓는다. 그 위를 박제(剝製)된 이념과 그 희생물이 슬픔을 강요하며 유령처럼 떠돈다.그 성소(聖所)가 바로 광주다. 무덤을 만들고, 넓히고, 꾸민다. 늘 조종(弔鐘)이 울리고, 비가(悲歌)가 흐르고, 비싼 값의 곡비(哭婢)들이 흐느낀다. 비석들이 임립(林立)한 그늘에 무저갱(無底坑)을 차려놓고 아귀(餓鬼)들처럼 끝도 없이 먹어댄다.그러나 신계륜 이사장(윤이상평화재단·신정치문화원)은 〈5·18광주〉를 찾는다. 살아남은 죄(罪)를 빌고, 죽음으로도 다하지 못할 벌(罰)을 청한다. 시공(時空)의 구별을 한탄하며, 일체(一體)의 간절한 지향을 삭힌다. 날로 새로워지는 깃발을 추스르며 사라진 옛 동지를 그려 국립5·18묘지를 찾은 신계륜 이사장과 함께 광주5·18 42주년 주변을 살폈다.-근황을 알려달라.나는 내 국회의원 선거(총선)를 6회, 대통령 선거를 3회 치렀다. 큰 선거를 핵심에서 경험한 것이다. 지금도 어떤 상황을 무슨 관점에서 보더라도 (내가) 정치를 떠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최근에는 제도권 정치를 포함해서 사회(특히 환경과 평화), 시민 관련 문제 등 다양한 영역으로 관심 분야가 넓어졌다.  2009년에 6·15선언과 10·4선언을 지지하며 창립한 사단법인 신정치문화원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 그 중점 사업이 남북간의 협력과 평화를 추구하는 「걸어서평화만들기」인데, 갈수록 참여자가 늘어나는 등 더 활발해지고 있다. 세계적 작곡가인 윤이상 선생을 기념하는 「재단법인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으로서 봉사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 5·18 42주년을 맞은 소감은? 5·18을 맞아 광주를 찾아 참배하는 것은 끝나지 않을 나의 참회다. 혼자이거나 여럿일 때나, 일반 시민이거나 국회의원일 때나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은 죄에 대해 스스로 정한 벌(罰) 가운데 하나다. 올해는 특히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이 1981년에 완성한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Gwangju)”가 마음에 맺힌다. 이 곡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묘사한 세계 최초의 대 서사시이다. 그런데 광주에서 자행된 학살과 그것을 극복한 광주의 항쟁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이 명작이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곡이 5·18공식기념식이 열리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매년 공연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중앙정부 및 광주광역시와 협의해 가능성을 키워갈 것이다.-대선 이후 민주당을 자평(自評)한다면?대선 당사자인 이재명 후보, 당을 이끌었던 송영길 대표 그리고 지도부까지 아무 반성도 없이 그대로 지방선거에 임하고 있다. 득표율 0.73% 차이에 집착하는 민주당 당사자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다음 총선(22대, 2024년 실시)을 생각하는 출마예상자들의 조바심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대선 패배에 대한 분노도, 아쉬운 비상대책위원회 구성과 운영도, 실망스러운 지방선거 공천 파행도 돌이킬 수는 없다. 그 모든 것에 대해 국민들이 가차(假借) 없이 평가할 것이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는데?회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궁지에 몰린 당시 청와대는 무려 민주당 국회의원 24명을 이른바 입법로비혐의(서울종합예술직업전문학교·치과의사협회·대한물리치료사협회·한전 KDN 등)로 수사에 착수해서 일대 공안 정국을 만들었음이 당시 민정수석 김영환의 비망록으로 나중에 밝혀졌다.촛불 혁명이 없었다면 이 사실도 묻혔을 것이다, 나는 그 중 첫 번째 타겟이었다(2020년 10월 KBS 시사직격 참조). 나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시작으로 온갖 고난을 겪으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92년 총선에서 고향 함평 출마를 고사하고 서울 성북구을에 출마해 최연소 국회의원(당시 37세)의 영광을 누렸다.그러나 이 성과를 잘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지켜내지도 못했다. 어느 새 내 소매에 묻고 살쩍에 엉긴 세월의 때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통상적인 연말 선물까지 뇌물로 엮어 문제 삼아도, 청와대 하명·표적수사고 정치적 음해라고 해도,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해도, 결국 모두 내 책임인 것이다.-정치는 어떤 것인가?시대마다 핵심 정치 과제가 변한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시기, 산업화 시기, 민주주의 정착 시기 그리고 민주주의 심화·발전 시기(사회 구성원 간 대립·갈등 시기)에 정치의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민주주의 심화·발전 시기에 우리 정치의 가장 크고 중요한 과제는 남북의 대립과 갈등이라고 하겠다. 이 사실에 눈감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현재 우리 정치는 김대중 대통령 시기보다 퇴보한 모습만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대선 과정에 확인됐지만, 여야 모두 한반도 문제에 대해 초보적인 견해 외에 아무 가능성도 내놓지 못했다. 성숙된 우리 민주주의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그 바탕에서 전망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비참할 만큼 유치한 논쟁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나는 대선 후 어지러운 마음을 추스르면서 독일 통일을 떠올렸다. 성숙한 서독 민주주의가 결국 독일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을 절감했다.한계나 성역 없는 민주주의의 성숙만이 우리 정치를 선진화할 것이고, 한반도 통일과 자주 국가 건설도 가능해질 것이다.-득의의 순간과 실의의 순간을 꼽는다면?득의의 순간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다. 민주주의를 위해 젊은 시절 모든 것을 바친 내 노력이 현실 정치에서 결실한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들 김대중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주했는데, 나는 흥분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는 데만 거의 반년이 걸렸다. 순진한 탓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순간이었다.실의의 순간도 정치적이다. 내 삶에서 1980년 5월 광주만큼 결정적인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당시 ‘서울의 봄’ 상황에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5월 18일 지명수배됐다. 검거를 피해서 간 곳이 광주였고,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한 다음 날 다시 지명수배를 피해 광주를 떠났다. 이때의 절망감 즉 실의가 이후 내 인생 대부분을 지배했다.-앞으로 목표는?앞에서도 거론됐지만, 2014년 민주당 대표 출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청와대의 기획·하명수사로 나의 제도권 정치 경력은 멈췄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한 중단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신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호남이 없으면 민주당은 존재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없다는, 절실한 경험에서 우러나는 강력한 확신이다.또 하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능하게 하려면 민주주의가 온전히 정착돼야 한다는 신념이다. 나는 현 상황에 선출직 출마 등 제도권 정치인으로서의 역할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호남의 길고도 고난에 찬 여정이 제대로 평가될 때까지 정치적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과제 해결에 여생을 바칠 생각이다. 그 과정에 민주당원으로서, 선출 공직 경험자로서, 무엇보다도 호남인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떤 역할이건 주어진다면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본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물레방아(溪輪)! -원칙이 있다면?공사(公私)의 구분이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운동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온 나라가 ‘전장(戰場)’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투지에 불태우면서 특히 호남지역 ‘수성(守城)’에 공을 들이고 있다.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다. 대선 승리를 바탕으로 제2당의 기세가 거세고 거의 예외가 없다시피 한 경선 파행으로 ‘집토끼 사정’도 전 같지 않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바탈길을 굴러내려가는 바윗돌 꼴이다.무소속 연대 등 반(反) 민주당 바람이 거세지면서 ‘호남정치’ 복원에 대한 담론이 피어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주당에 볼모로 잡힌 꼴인 호남의 정치적 상황이 갈수록 소외되고 입지가 축소되기 때문이다. 공사 중인 구조물이 무너지고, 강고하기만 할 것 같던 권력조차 뺏기는 상황을 불러 온 것은 결국 독점의 폐해 때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정권에서 결정적 음해를 당하고, 그러면서도 첫 뜻을 꺾지 않고, 밀려나 있으면서도 동지들에게 칼을 꽂지 않은 신계륜 이사장에 주목하는 지역민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물레방아는 물이 흐르지 않으면 멈춰, 쉰다. 어느 것인들 그러지 않겠는가. 다만 물이 흘러 뭔가, 어딘가를 추구해 갈 때 그 동력(動力)을 사람들이 이롭게 쓰도록 돕는 것이 바로 물레방아다.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의 중핵(中核)이라는 한반도가 움직이고 있다. 그 거대한 물결을 가늠하고 이끌 ‘물레방아’로 신계륜 이사장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신계륜 이사장은 부인(김유미, 미술강사)과 어머니(93세)를 모시고 있다. 하루 평균 5~7km를 걷고 가끔 배드민턴 치기로 건강을 관리한다.(前 대한배드민턴협회회장, 현 고문) 취미는 바다낚시(前 프로낚시연맹 총재) 종교는 기독교(성북구 종암중앙교회)저서로 신계륜일기(2007, 나남) 걸어서평화만들기(2010, 하이미디어) 내 안의 전쟁과 평화(2011, 나남)가 있다.
    • 기획.연재
    2022-05-25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옥과 유팽로 이팝나무
      ‘함평천지 늙은 몸이’로 시작하는 호남가를 듣다 보면 ‘나무나무 임~실이요’에서 임과 실 사이의 박자가 9임을 알 수 있다. 제일 길게 부르는 대목인 것이다. 다음 대목은 ‘가지 가지 옥과로다’이다. 그렇다. 그렇게 길게 공들여 맺은 과일이니 구슬 같은 옥과가 아니겠는가? 향기로운 과일이며 아름다운 보석이다. 하지만 옥과(玉果)가 무엇이겠는가? 나무라면 당연히 열매이지만, 사람이라면 자식 아니겠는가? 향기롭고 아름다운 자식을 원하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건 어리석음이다, 우리 인간의 한평생 가장 큰 보람은 자식을 얻어서, 더불어 살아가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키우고 가르치는 일이다.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는 임진왜란 의병장 유팽로가 태어난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옥과천이 들녘을 적시고, 마을 뒤 옥출산을 휘감아 오는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 1564-1592)는 충주판관과 순창군수를 지낸 아버지 유경안과 어머니 남원 윤씨의 장남이다. 6세 때 부모님에 대한 효행시를 지었고 선조 12년인 1578년에 사마시, 15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가 되었다. 부모상에 시묘살이 중 곧 선조의 부름에 1592년에 28세로 홍문관 박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오던 중이다. 전북 순창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도의병 진동장군 유모(全羅道義兵 鎭東將軍 柳某)의 대청기(大靑旗)를 높이 들고 기병하였다. 진동은 처음 일으킴이며 청색은 동쪽이니, 곧 동쪽의 왜적을 섬멸하겠다는 뜻이다. 왜란 발발 7일만인 4월 20일이니 조선 최초의 의병이 바로 그들이고 유팽로는 최초의 의병장이다. 5월 11일 이들 유팽로 의병은 임실군 갈담역 전투에서 임란 최초의 첫 승리를 하는 등, 각처의 의병들에게 구국의 열정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그 뒤 담양 추성관에서 고경명 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말의 피를 마시고, 속내의에 이름을 기록하여 죽음으로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6월 11일 의병 6000명을 이끌고 담양을 출발, 6월 24일 전주, 마침내 7월 8일 금산성 전투를 치르다 이틀 뒤, 순절하였으니 나이 28세였다. 이때 유팽로가 타고 다니던 말은 오리마(烏悧馬)로 처음에는 다리가 다섯이었던 검은 말이었다. 이 오리마가 왜군이 가져가려고 하는 장군의 머리를 빼앗아 물고 합강리로 왔다, 부인 원주 김 씨가 후원에 단을 쌓고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 때였다. 집에 돌아온 오리마는 9일이나 여물을 먹지 않고 울다 죽었다. 남편과 의마의 장례를 치른 원주 김 씨도 슬픔을 못 이겨 남편 뒤를 따랐다. 합강리 마을 앞 들녘의 의마총이 바로 그 오리마의 무덤이다. 비록 유팽로의 의병 활동은 81일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어려운 시기에 역사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업적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크게 주목하지 못했음이 참으로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도록 기강이 문란했던 나라, 속수무책으로 국방이 허술했던 게 논의의 초점이다. 누가 먼저 기병하고 무슨 업적을 쌓았느냐는 나중 일이라고 에둘러 생각하지만, 글을 읽은 선비로서 분연히 칼을 들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유팽로의 용기와 정신은 만고의 귀감임에 틀림없다. 이곳 유팽로의 오리마 무덤으로 가는 길에 네 그루의 커다란 이팝나무가 있다. 넷이 어울려 산더미처럼 쌀꽃으로 젯밥을 해마다 올리니, 그나마 장군과 원주 김 씨, 오리마에게 죄송함을 던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5-19
  • “나라는 망해도 황실만 온전하면 된다”
    고종, 황실의 안녕만 챙겨 일진회 “외교권 日에 위임”중무장 일본군 회의장 포위5월 14일 토요일에 을사늑약의 현장인 덕수궁 중명전(서울시 중구 정동)을 찾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면 을사늑약의 전말을 살펴보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반도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11월 2일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 특파대사로 임명했다.11월 5일 송병준이 주도한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것이 독립을 유지하고 영원히 복을 누리는 길”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을사오적보다 더 나쁜 매국노들이었다. 11월 10일에 이토는 고종에게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다시 알현하길 청했다. 그런데 일본은 11월 11일에 이토 대사 접대비 명목으로 무기명 예금 증서 2만원(시가 25억 원)을 경리원경 심상훈을 거쳐서 황실에 납입시켰다. 이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 보호조약 1-3’에 나온다.11월 15일에 고종과 이토는 4시간 동안 단독 회담을 했다. 이토는 조약안을 고종에게 내밀었다. 고종은 이토에게 외교 형식이라도 보존해 달라고 매달렸지만, 이토는 변통의 여지 없는 확정안이라고 거절했다.고종은 전·현직 정부 신료와 상의해야 하고 인민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토는 전제 군주가 인민의 뜻을 살피겠다는 것은 인민을 선동하려는 저의라고 항의했다.마침내 고종은 외부대신끼리 협의 사항을 정부가 검토한 후에 짐이 재가하겠다고 이토에게 말했다.11월 16일 오후에 이토는 정부 대신들을 숙소인 손탁호텔로 불러 조약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참정대신 (총리) 한규설이 외교의 형식만이라도 남겨 달라고 간청했으나, 이토는 ‘절대 불가’라고 못 박았다.11월 17일 오전 11시에 한규설 등 대신 8명은 일본 공사관에 모였다. 일본 공사 하야시는 조약안을 본격적으로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정부 대신들은 선뜻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비로소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말문을 열었다.“지금 당장 토의해 의결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중추원에서 여론을 수렴해야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하야시는 언성을 높이며 반박했다.“귀국은 전제국가인데 어찌하여 입헌정치 흉내를 내어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려 합니까? 황제가 응당 한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인데 의견 수렴 운운으로 모면하려고 합니까?”오후 3시쯤에 하야시는 대신들을 이끌고 대궐로 향했다.이윽고 어전회의가 열렸다. 고종은 몹시 괴로워하면서 대책을 여러 번 물었다. 대신들은 조약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러자 고종은 일단 결정을 미루자고 했다.이때 이완용이 아뢰었다.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조약의 내용 중에 첨삭하거나 개정할만한 중대한 사항을 상의하자는 것입니다.”이완용의 말은 조약 체결 거절은 불가능하니 현실적인 대안을 찾자는 것이었다. 할복이라도 하면서 거절해야지, 조약안 첨삭·수정을 미리 대비하자니 이게 매국의 징조였다.그런데 고종이 타당하다고 말하자 조약안의 첨삭·수정 회의가 진행됐다.권중현이 아뢰었다. “신이 외부(外部)에서 얻어 본 일본 천황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조약 조문에는 없습니다. 응당한 조목을 만들어야 합니다.”고종은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며 대만족을 표시했다. 황실의 안녕만 챙기는 고종의 모습이 돋보인다.회의가 끝날 무렵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뢰었다.“이상 아뢴 것은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들은 한 마디로 조약 체결을 거부하겠습니다.”오후 4시경 시작된 어전회의는 7시 넘어서 끝났다. 잠시 후 하야시 공사가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어전회의 결과를 물었다.한규설은 ‘폐하께서는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지시하셨으나, 우리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거듭 말했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중대한 협상을 앞두고 협상전략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노출한 것이다.이러자 하야시가 질책하고 나섰다.“폐하가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조약을 순조롭게 진행해야지, 대신들이 모두 폐하의 명을 어기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런 대신들은 조정에 두어서는 안 되며 특히 참정대신과 외부대신은 그만두게 해야 하겠습니다.”한규설은 몸을 일으키며 ‘공사가 이렇게 말하니 나는 참석할 수 없다’고 대꾸했다. 이윽고 대신들이 만류하자 한규설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당황한 하야시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긴급 연락했다.오후 8시쯤에 이토가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일본군 헌병 사령관 등을 거느리고 황급히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으로 들어왔다. 수옥헌 안팎은 중무장한 일본군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포위해 공포 분위기였다.하야시 공사로부터 사태를 파악한 이토는 고종의 알현을 여러번 요청했다. 하지만 궁내부 대신 이재극은 “짐이 이미 대신들에게 협상해 잘 처리하라 했고,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대신들이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달했다.그런데 “대신들이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고종의 어명은 결국 독약이 되고 말았다.고종의 어명을 접한 이토는 곧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토의하자고 요청했고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이토는 먼저 참정대신에게 말했다.“참정대신은 어전에서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한규설은 ‘반대’였다고 말했다.다음에 이토는 외부 대신에게 물었다.박제순이 대답했다.“외부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이 넘어가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이토는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이 아니겠습니까? 외부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다음엔 민영기에게 묻자 민영기는 ‘절대 반대’라고 답했다. 이어서 법무대신 이하영에게 물었다.이하영: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가 있는데 또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이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이토: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이 또한 찬성입니다.이어서 이토는 이완용에게 물었다.이완용은 말했다.“이번 일본의 요구는 대세 상 부득이한 것이다. 종전에 우리 외교의 변화가 심했던 탓으로 일본은 두 차례나 큰 전쟁을 치렀다. 일본은 더 이상 동양 평화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 이번 요구를 제기한 것이다. 일본은 이번에는 반드시 목적을 관철하려고 할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진대 원만히 타협해 일본의 제의를 수용하고 우리의 요구도 제기해 관철하는 것이 좋다. 자구(字句) 등은 다소 수정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이완용은 대신들의 결의를 한순간에 뒤집고, 적극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다.이러자 이토는 벌떡 일어나면서 “조약 중에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되니, 과연 당신은 완전 찬성이요”라고 크게 만족했다. 이토의 마음에 든 것이다.이어서 권중현, 이근택, 이지용이 모두 찬성했다. 대세가 확 바뀐 것이다.1905년 11월 17일 늦은 밤,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과의 찬반 문답이 끝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불러 말했다.“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를 받아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찬성은 6인, 반대는 2인으로 가결이 됐으니 주무 대신에게 지시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하도록 주청해 달라.”이토가 가결을 선언하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이토는 제지하며 “어찌 울려고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이후 한규설과 박제순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민영기,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 이하영은 조약 문안을 수정하는 문제로 설왕설래하는 바람에 회의장은 다소 어수선해졌다.이때 한규설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예식관 고희경을 시켜 고종의 알현을 요청하고, 대청 뒤 작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이재극에게 알현을 청했다. 이 때 고희경이 일본 공사관 통역 시오가와가 참정대신을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한규설이 앞뜰로 나가니 시오가와와 일본 헌병들이 한규설을 작은 방에 감금해 버렸다.한참 있다가 한규설이 회의실로 다시 들어왔다. 한규설은 갑자기 통곡하자 회의는 잠시 중단됐다. 이때 이토는 “너무 떼를 쓰는 모양을 하면 죽이겠다”며 모두 들으라는 듯이 엄포를 놓았다.대신들은 겁에 질렸고 이후 조약 수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문안 수정이 끝나자 이토는 “참정대신이 반대해도 다른 대신들은 수정안에 모두 찬성했으니 안건은 결정됐다”고 말했다.이어서 이토는 일본 공사관 통역 마에마 교사쿠와 외부 보좌원 누마노 등과 일본군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외부(外部)로 달려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탈취하게 해, 박제순과 하야시가 나란히 조약에 날인했다.(그런데 11월 18일의 ‘윤치호 일기’에는 외부(外部)의 직인은 일본이 탈취한 것이 아니라 외부대신 박제순의 명령에 의해 직원이 수옥헌(중명전)에 가져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이처럼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2시경에 을사 5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의 조약안은 당초에 4개 조항이었는데 조선의 요구에 의거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나라는 망해도 황실만 온전하면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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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 광주남구청 ‘헌혈 퀸’ 고영미 동장, ‘은장’ 포장
    광주 남구청 ‘헌혈 퀸’ 고영미 사무관이 숭고한 생명나눔 공로로 대한적십자사 은장 포장증을 받았다.  남구에 따르면 고영미 봉선1동장은 지난 13일 구청에서 열린 2분기 사랑의 헌혈 나눔 캠페인에 참여해 30번째 생명나눔에 나섰다.  지난 2014년부터 1년에 4차례씩 자신의 혈액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로 30번째를 맞이한 것이다.  대한적십자사는 숭고한 인류애 정신을 발휘한 고영미 봉선1동장에게 존경과 축하의 마음을 담아 30번째 혈액 나눔에 동참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은장 포장증을 이날 수여했다.  그가 꾸준히 헌혈 나눔에 동참한 이유는 자신의 건강을 체크하면서 평소 생활신조로 삼아온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고영미 봉선1동장은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고, 헌혈 나눔을 할 수 있도록 나의 건강을 꾸준히 관리해 건강하다는 사실에 또 한번 행복함을 누리게 된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꾸준히 헌혈 나눔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공직자로 남고 싶다”고 밝혔다. 
    • 기획.연재
    2022-05-16
  • “빛고을에서도 가장 빛나는 동구 만들 것!”
    임택 후보 광주 동구청장 재선 도전민선7기 문화관광·골목상권 중심 동구 발전 가시화시켜앞으로 4년간 호남 넘어 전국 최고 행복 동구 이룬다구·시의원부터 구청장까지 ‘토박이 동구 일꾼’ 자부심정권이 바뀌고 지방선거가 2주 남짓 남았다. 권력 굳히기에 힘쓰는 쪽이나 어떻게든 흔들어보려는 편이나 이번 정치 행사의 의미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최소 4~5년 겪어야 하는 ‘꼴’을 다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호남지역은 기존 구도에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배타적 심리는 더 심해지고 단결은 더 강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대권의 향방이 갈리는 과정에 드러난 변화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구르기 돌처럼 시작된 추세(趨勢)를 멈추기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한국 정치에서 호남의 역할은 상징적이다. 그 중심이 광주이고, 광주의 핵심이 바로 동구였다. 광주 동구는 한국 정치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한 때 호남의 주요기관이 모두 모여 있다고 할 만큼 번성했던 광주 동구는, 이제 인구 10만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붕괴하는 상권과 쇠락한 주택가 그리고 노령화되는 구성원들이 저무는 햇빛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형국이다. 임택 광주광역시 동구청장 후보는, 이런 광주 동구를 ‘빛고을에서도 가장 빛나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의지와 희망만이 아니라, 동구를 되살릴 수 있는 구체적 복안을 갖고 청장 재선에 나섰다는 임택 후보를 만났다.-재선 도전 소감은? 우리 동구는 민선 7기에 통계청 조사 결과 ‘행복지수 호남권 1위’로 꼽혔다. 인구 10만 명을 회복했고, 교육·보육·정주 여건 등이 개선되면서 ‘광주 동구는 살 만한 곳’이라는 공감대가 광범하게 형성된 결과라고 본다. 도시재생·인문도시 사업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그러나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더 많다. 내가 구상하고 실현 가능성을 확보한 사업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지난 4년의 성과를 통해 내 의지와 역량은 충분히 검증됐다고 생각한다. 기필코 동구 발전을 이루겠다는 각오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재선에 도전했다.-재임 기간의 치적과 아쉬운 점이 있다면? 먼저 동구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고 그런 특징으로 알려진 것을 들 수 있겠다. 낙후된 구도심이라는 선입견을 벗고, 활기찬 주거지로 탈바꿈한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또 13개 동이 각각 주민자치를 통해 마을의 발전을 모색하는 공동체 문화가 활성화됐다는 점도 내세우고 싶다. 전국 최초로 인문도시정책과를 설치해 ‘인문도시 동구’라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 것도 호평을 받았다. 각종 수치가 단적으로 증명한다. 2020년도 전국기초단체 평가 1위, 광주광역시 유일의 3년 연속 청렴도 최고 등급, 단체장 공약수행 최우수 평가를 받았으며, 국비와 시비를 역대 가장 많이 확보했다. 학동 유흥가 철거, 구립도서관 건립, 산수굴다리-구 재활용창고 도로 개설 등도 동구의 숙원을 해결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다만 시간의 한계로 인해 완수하지 못한 여러 사업이 아쉽다. 앞으로 4년 동안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구민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시리라 믿는다. -핵심 공약은?동구는 소매·도매업 위주의 골목 경제다. 골목상권이 살아나야 동구 전체가 활력을 찾고 유지된다. 즉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동구를 도심 관광 거점으로 육성해 관광객 등을 최대한 유치하겠다. 자영업 중심인 골목·민생경제가 살아나고 일자리도 만들어질 것이다. 문화전당 야간경관 기반조성, 미디어 테마 콘텐츠 체험관광 플랫폼 조성, 빛의 길 도심 야간관광 활성화, 충장 상권 르네상스 등 구체적 방안을 통해 문화관광도시 동구를 만들겠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예산 확보, 사업 유치 등 방안은?과거에 비해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지난 4년 동안 예산을 역대 최대로 확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차질 없게 추진할 자신이 있다. 광주시를 비롯해 지역 국회의원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 광주 동구의 경쟁력을 증명하고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될 것이다.각 분야의 전문성을 높여 중앙·광주시의 공모사업 유치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 동구 발전을 위한 시책을 발굴하는 한편 지역경제, 도시재생, 문화예술 등 동구 역점 사업을 적극 추진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한다.-본인의 경쟁력, 약점은?나는 지난 25년 동안 동구에서만 기초·광역의원부터 구청장까지 역임했다. 풀뿌리 정치인으로서 동구의 실태와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해결책과 전망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특히 기초·광역의회의 견제 기능을 알뿐 아니라 4년 구청장으로서 집행 경험을 가져, 동구 발전에 필수적인 역량을 두루 갖추고 있는 점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사교성이 약하다는 평판도 있는데, 극복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요즘에는 ‘사람이 듬직하다’로 바뀐 듯하다. (웃음)-지방자치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가?주민 중심의 풀뿌리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기초다. 주민이 행정에 참여하는 등의 방식으로 집행부와 적절히 소통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구축하며, 결과적으로 지역 발전이 가능해진다. 나는 그동안 주민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관련 법제를 정비하고 행정체제를 개선해왔다. 다양한 의사소통이 상호 신뢰를 높일 수 있는 사회적 자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음 임기에도, 주민끼리 그리고 주민과 행정이 소통하는 체제를 적극 운용할 것이다.-평소에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 있다면?‘배려하는 삶을 살자‘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는데, 자기 생각만 고집하기 때문에 다툼과 갈등이 생긴다. 상대를 배려하니 더 큰 기쁨으로 돌아오더라. ’남에 대한 배려가 곧 나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며, 적극 실천하고 있다.-목표가 있다면?현재는 (당선돼) 민선 8기를 충실하게 이끌고 잘 마무리하겠다는 생각 뿐이다. 보다 길게는 ‘주민들 가슴 속에 기억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 소명의식을 갖고, 주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주민들이 기억해주는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일부 정치 전문가들이 더불어민주당의 호남 독점을 지적하는데?득표율이나 당선자 수를 두고 균형과 조화를 거론하는 경우를 봤다. 그러나 호남에서 어떤 정치집단이 민주당과 견줄 만한 정책과 인물을 내놓고 경쟁했는지 의문이다. 호남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로 나눠 가져야 하는가? 호남 유권자를 전부 모아놓고 ‘너는 이 당 찍어. 나는 저 당 찍을게!’ 이런 식으로 할 수 있겠는가?호남 유권자들은,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와 법적 제도적 범위 안에서, 특정 시기와 상황에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호남을 한 틀로 묶어놓고 ‘외골수’니 ‘독선적’이니 단정하고 비난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 꼭 다양한 정치세력의 견해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면, 정치체제부터 바꿔야 한다. 중대선거구제를 비롯한 여러 대책이 가능할 것이다. 호남과 (더불어)민주당은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 정치사에서도 특이한 면모와 관계를 보인다. 독재와 핍박, 소외와 차별을 극복하는 과정에 생긴 흔적이다. 그 상처 위에 더께가 끼고 두터워져 이제 제 살처럼 됐다. 그 영향일까. 호남을 독점하고 있는 민주당은 권력을 부담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권력이란 맞서 싸울 대상이라는 관념의 영향일 것이다. 뭔가 잘못한 것 같고, 너무 많이 가진 것 같고, 훨씬 더 완벽해야 할 것 같은 강박(强迫)과 초조(焦燥)에 휘둘린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임택 광주광역시 동구청장 후보가 돋보인다. 임택 후보는, 호남은 민주정치의 절지(絶地)가 아니며 호남인이 그저 우민(愚民)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동안 호남은 좋은 정책 훌륭한 후보를 ‘제 몸처럼’ 아끼고 지지해왔던 것 뿐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한다. 임택 후보는 ‘자치행정전문가’를 자임하면서, 자치공동체가 ‘이웃이 있는 마을’이 되기를 꿈꾼다. 또 동구가 ‘낙후된 구도심’이라는 굴레를 벗고 ‘빛고을에서도 가장 빛나는 지역’이 되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임택 후보는 타인의 성장을 돕는 데서 큰 보람을 느끼며, 넉넉한 품으로 주민을 보듬고 상대까지 껴안으려고 한다. 꼭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치열한 결의를 하나씩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임택 후보는 부인과 슬하에 아들, 딸이 한 명씩 있다. 취미는 걷기, 클래식 감상, 명상(瞑想)이다. 종교는 천주교.
    • 기획.연재
    2022-05-1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물염적벽 김삿갓 벚나무
      화순군 이서면 동복천에 물염, 창랑, 장항, 보산 등 4 적벽이 있다. 이중 물염은 봄, 창랑은 여름, 장항은 가을, 보산은 겨울적벽이다. 이 적벽은 조선 전기 때까지는 그냥 석벽이었다. 적벽이란 이름은 1519년 기묘사화에 동복으로 유배 온 최산두(1483~1537)가 붙였다, 중국에 4 적벽이 있다. 후베의 적벽은 삼국시대 주유와 조조가 대전을 벌인 양쯔강에 있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읊은 적벽은 황주에 있다. 또 무창과 한양까지 모두 네 곳이다. 우리나라도 금산군 부리면의 금강을 적벽강이라 하니, 이곳 깎아지른 단애 이름이 적벽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금강의 적벽보다 화순 이서 동복천의 4 적벽이 그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더 빼어난다. 어디 풍광뿐일까? 지금은 물염정, 망미정, 송석정만 있지만, 조선시대에 이곳 동복천에는 수많은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그중 동복천 8경으로 고소대, 봉황대, 동복현청의 협선루, 포월정, 만경대, 망미정, 물염정과 동복의 주산인 옹성산을 꼽는다. 망미정과 송석정이 남아있는 보산적벽은 겨울적벽이다. 여기 망미정에서 바라보는 옹성산의 설화는 봄, 여름 갈겨울의 풍광을 모두 합쳐놓았다. 이곳 보산적벽 아래는 금모래밭이었다. 임란의 용장 황진 장군이 동복 현감 시절 말을 몰아 군사조련을 했던 곳이다. 또 이곳 정자에서 사람들은 풍영을 누렸다. 가을에 베어 말린 풀단에 불을 붙여 건너편 옹성산 절벽 위에서 던지는 봄철 낙화놀이는 그 중 백미였다. 김삿갓이 이 낙화놀이에 왔고, ‘무등산이 높아도 소나무까지 아래이고, 적벽강이 깊어도 모래 위로 흐른다’는 시도 그날 읊었으리라 짐작한다. 옹성산의 단애인 장항적벽은 노루목 적벽이라고도 하는 높이 100여m의 가을적벽이다. 이곳 가파른 절벽 틈새에 한산암이 있었다. 한여름이 지나간 물결에 서늘한 바람이 실리는 날 하늘에서 내려오는 종소리는 절로 손을 모으게 했다. 한산암에 오르기 전 물결에 비추인 내 모습을 보나니, 가을 동복천은 저승길 들머리의 바로 그 명경이었다. 이어 창랑적벽은 여름적벽이다. 병풍처럼 둘러친 맑은 물에 붉은 배롱꽃 그림자와 두둥실 하얀 구름송이가 흘러가는 모습은 가슴으로만 보는 그림이다. 더위가 무엔가? 창랑적벽 맑은 물에 노 저어 나룻배를 띄우면 누구나 운무를 부르는 신선이었다. 물염적벽은 벚나무가 봄을 여는 봄적벽이다. 여기 물염정의 물염(勿染)은 세상사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 물염의 아름드리 벚나무가 아들 손자 벚을 거느리고 봄을 맞는다. 지리산의 운해를 신비로 걸친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고 동구를 지키는 느티와 은행도 오백 년은 거뜬이다. 하지만 수명으로 어찌 나무의 우열을 평가하랴? 또 그러지도 않는다. 벚나무는 봄의 나무이다. 이른 봄날 온갖 초목의 새잎이 나올 무렵, 꽃이 먼저 피어 온 세상을 화사하게 수놓는다. 꽃구름인 듯 두둥실, 꽃비인 듯 우수수, 꽃눈으로 하늘하늘 흩날려 부풀고, 적시니 그 마음 둘 데 없다. 이 벚나무의 왕인 왕벚나무는 제주도가 원산지이다. 또 늘어진 삼단 같은 가지를 실바람에 흔드는 능수벚나무는 숨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이 벚나무는 오래 살아야 백 년이다. 이른 봄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그 결실 또한 풍성하니 어찌 오래 살길 바랄쏘냐? 더욱 잎자루마다 꿀샘으로 뭍 곤충을 살리니, 온몸으로 사는 그 열정을 오래 살지 못함으로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백 년 이쪽저쪽의 여기 물염정의 벚나무는 이제 할아버지다. 앞으로 언제까지 자리를 지킬까 싶지만,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갈 것이니 무엇이 걱정이랴? 더욱이 물염정에서….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5-12
  • “광주 재활이 내 운명!”
    1당 독재 계속되면 광주는 죽는다, 내가 살리겠다 윤 당선인 광주 사랑 각별, 지역 발전에 큰 행운돼‘공항 이전, 실리콘밸리 조성 등 꼭 해낸다’다짐도대담=주성식 선임기자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고, 선거판은 차츰 달아오르고 있다. 호남 지역은 그동안 특정 정당 경선이 곧 본선(결과)이 됐던 ‘관행’에 큰 변화는 없으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만큼 변화가 있으리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7회 지방선거에서 시장 후보도 내지 못했던 정당은 집권당이 되면서 분위기 역전을 기대하고 있다. 주기환 국민의힘 광주시장 후보는 아직 정당 지지도부터 개인적 지명도까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정치 초보라는 약점을 신선하다는 장점으로 바꾸고, 소속 정당의 오랜 열세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각오가 돋보인다. ‘작은 불씨가 온 들판을 태운다’는 확신으로, 반드시 목적지에 이르고 말겠다며 결의를 다지고 있는 주기환 후보를 만나 그의 포부와 ‘광주시 재활’ 계획을 들었다. -출마 계기는?나는 광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평소 꾸준히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행태와 최근 광주의 상황을 보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해졌다.공직을 떠나면서 운신이 자유로워졌고, 이번 대선 과정에 광주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2.7%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큰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상징이다. 나는 광주가 일당 독재의 비상식적인 상황을 벗어나, 대한민국의 건전한 일부가 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열망과 그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출마를 결심했다. 광주에 대한 윤석열 당선인의 애정과 관심이 실현되도록 최선의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도 갖고 있다. -윤석열 당선인과의 인연이 화제다.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부인할 일도 아니다. 나와 윤 당선인은 20년 넘게 윤 당선인과 ‘운명적 동지’로 지내면서 서로를 존중해왔다. 특히 당선인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수평적인 리더십으로 대한다. 광주시장에 당선되면, 그런 리더십으로 광주시 공무원들과 협력해 광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 -현 광주시의 문제점은?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뿌리인 ‘권력 독점’이 가장 크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그것은 오랜 소외와 차별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광주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광주에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공존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그저 일방적으로 전체를 가져야 만족한다. 지난날 혹독한 독재의 피해를 당했다고 떠들면서 더 악화된 형태로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 다른 문제는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내가 출마를 결심한 큰 이유 중 하나인데, 우리 지역에서 연이어 발생한 아파트 붕괴사고에 대해 살펴보자. 거대 건설회사부터 하청업체 그리고 주택조합 관계자까지 마치 부패와 불법·비리의 상징처럼 매도하고 있지만, 과연 그들(만)의 책임일까?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 사고(들)의 특징은 명백하다. 바로 ‘광주에서만’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 건설사나 하청업체는 광주에서만 공사하고 있는가? 주택조합은 다른 지역에는 없거나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가? 광주시부터 해당 구청까지, 관리 감독 책임은 없는가?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작업 지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중요 원인 중 하나 아닌가? 말단부터 최고 의사결정권자까지 한 통속이 돼, 뻔한 하자(瑕疵)에 눈 감고 뒷거래한 것 때문에 발생한 참변 아닌가 말이다.그런데 현수막 몇 장 걸어놓고, 슬퍼하는 척한 것 말고 도대체 뭘 했는가? 집행부부터 의회까지 한 정당이 독점하고 있으면서, 무슨 책임을 졌는가? 최소한의 상식 아니 양심이라도 있다면, 이번 선거에 시장부터 구청장까지 후보를 내지 않아야 맞는 것 아닌가?시민들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다 알고 있다. 얼마나 썩고 망가졌는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 증거가 아파트 붕괴고, 이번 대선 결과다. 그리고 이 추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내가 반드시, 뒤틀린 것을 곧게 펴고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것을 위해 출마한 것이다.  -광주시의 최대 현안, 과제는?광주시의 어떤 문제도 무슨 해결책도, 앞에서 지적한 ‘권력 독점’을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그동안 예산·법령부터 민심까지 온갖 것 들먹이며 약속을 무시하고 방치하지 않았는가. 한 패거리들끼리 예산 몇 푼 따다가 짬짜미로 단물 빨아먹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전혀 공약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윤석열 당선인은 늘 “호남이 잘 살아야 대한민국이 발전하다”고 강조해왔다. 나는 그 점에 적극 공감하면서 ‘꼭 실천할’ 8대 공약, 70개 이상 과제를 조만간 공약 발표 기자회견을 통해 제시할 예정이다. 그 공약들은 대부분 인수위의 국정 과제에 포함됐다. 즉 차기 정부가 책임지고 추진한다는 것이다. ▲군 공항 이전 ▲실리콘밸리 조성 ▲인공지능(AI) 모빌리티 융복합산업벨트 조성 ▲복합쇼핑몰 유치 등은 반드시 이룰 것이다. 또 임기 중 시민·공무원·각 부문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광주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해낼 것이다. 내가 내세운 ‘광주, 미래를 현재로!’에 모든 것을 담았다. -지금 검찰 수사권 관련 입법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이 문제의 본질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어느 기관에 있는지와는 전혀 상관없다. 학계, 집권당 성향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검찰을 포함한 법조계와 심지어는 법안 추진세력이 큰 혜택을 볼 것처럼 선전하는 경찰까지 반대하지 않았는가. 이 법으로 인해 심각한 인권 공백 등 법 질서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하다. 국가 법 체계를 붕괴시키고, 그로 인해 이익을 보려는 악랄한 의도가 개재돼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자신의 경쟁력, 지지기반, 약점은?모든 면에서 장점과 약점이 겹친다고 생각한다. 먼저 검찰 공무원 경력은, 우리 지역이 법치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발전하게 하는 데 장점이 될 수 있는 반면 ‘법이면 다냐?’라며 거부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당선인과의 관계도, 나는 광주 발전을 위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확신하는데, 일부는 검찰 경력이나 개인적 친분을 매개로 한 유착관계인 것처럼 왜곡된 관점으로 보기도 해서 놀랐다. 나는 내가 살아온 것 그대로 내놓을 수밖에 없다. 정치 경험이나 엄청난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오직 ‘가능한 한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나섰다. 시민들은 (나를)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할 것이다. 물론 좋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웃음)  -정치 특히 지방자치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들었다. 둘만 모여도 언행(言行)의 이해(利害)를 따지고 득실(得失)을 가늠하지 않는가. 우리가 무인도에서 혼자 꿈꾸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도록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구성원들이 합의한 규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원론(原論)이나 분식(粉飾)이 아니라, 명확한 실체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지방자치는 중앙정치의 부속물이나 하부 단위가 아니라 전체의 일부이며 바로 전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일부 없는 전부가 어디 있겠는가.-호남 소외, 차별의 원인과 해법은 무엇인가?모든 문제는 복합적이다.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호남’이라는 일반화부터 문제라고 본다. 혹시 우리는 호남이라는 틀로 묶고 문제를 지적하는 행태를 아무 의식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아닐까?모든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우치면 좋겠다. 한비자(韓非子)는 ‘모든 것은 내부 요인 때문에 무너진다’고 설파했다. 결국 쇠(鐵)가 자기에게서 생긴 녹(綠) 때문에 썩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에게 문제점은 없는지 살피고 자부심을 바탕으로 자강(自强)에 힘써야 한다. 호남이 대한민국의 당당한 일부로서 기능하고 발전의 한 축이 되는 유력한 방안일 것이다.-평생 지켜온 원칙이 있다면?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사회적으로는 공정과 상식에 충실하려고 한다. 신념을 갖되 그것이 타인에게 폐가 되지는 않아야 한다고 믿으며, 안팎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다.특히 어머님이 늘 “베풀어라!”라고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평생 실천해왔다.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출범할 당시 “깜짝 등용”된 주기환 후보는, 업무 역량과 인품 등 모든 면에서 당선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든든한 힘이면서도 큰 짐이다. 주 후보는 “윤 당선인 덕만 보고, 출마 경력으로 무슨 자리나 노리고, 청탁이나 처리하려고 나온 것 아니다. 내 삶의 마지막 열정을 광주 살리기에 쏟아붓겠다는 뜨거운 마음 하나로 출마했다. 반드시 결과를 내겠다”라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주기환 후보 모친은 길손이며 걸인까지 집에 오는 사람 누구나 밥을 먹이고 재워 보냈다고 한다. 한 번도 한 명도 예외가 없었다. 주 후보는 지금도 모친의 ‘베품’ 덕에 자신의 현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기환 후보는 확신한다. 광주 시민들이 서로 기대고, 함께 어우러지고, 모든 것을 나눔으로써 마침내 광주가 침체를 벗고 나라와 겨레의 빛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말이다.   주기환 후보는 아내와 슬하에 아들 둘을 뒀다. 기독교 신자(집사, 부인 권사)이며 등산이 취미 겸 유일한 건강관리법이다.
    • 기획.연재
    2022-05-08
  • 부패가 즐거움이고 음모가 인생인 황제
    # 역술가 정환덕에 빠진 고종1901년 11월 27일에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함녕전에서 정환덕이라는 역술가를 만났다. 그는 경상도 영양 사람으로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어려서부터 공부했던 역술로 출세하고자 서울로 올라왔다. 정환덕이 역술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널리 알려지자 경운궁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이 고종에게 그를 추천하였다. 고종은 첫 질문으로 ‘어쩌다가 40세에 벌써 백발이 됐는지’를 물었다. 이 질문은 인사차 던진 것이었고, 정말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있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500년으로 한정했고 종묘의 정문 이름을 창엽(蒼葉)이라 썼다. 창(蒼)이라는 글자는 이십팔군(二十八君)이 되고 엽(葉)이라는 글자는 이십세(二十世)를 형상한 듯하다. 국가의 운수가 과연 이와 같은가?”조선 후기에 조선왕조의 수명이 500년이라는 예언들이 횡행했다. 그 근거가 종묘 정문 이름인 ‘창엽’이었다. ‘창엽’에는 조선이 태조 이후 20세대가 되거나 28대째 되는 임금 때에 망한다는 예언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1901년은 조선왕조 509년이 되는 때였고, 고종은 26대 임금이었지만 세대로 치면 철종이 20세대였다. ‘창엽’대로라면 조선왕조는 철종 대에 망했거나 아니면 고종의 손자 대에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정환덕은 “폐하의 운수로는 정유년(1897)부터 11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운수는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정환덕은 1907년까지는 고종이 황제 자리를 유지할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과연 정환덕의 예언대로 고종은 헤이그 특사로 인해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된다.그러자 고종은 “그렇다면 혹 기도한다면 꽉 막힌 운수를 피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왕조를 연장하고 싶었다. 이러자 정환덕은 “인재를 얻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원론적인 답변이었다. 이틀 후인 11월 29일에 고종은 다시 정환덕을 불렀다. 이날 고종과 정환덕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환덕은 “12월 그믐쯤에 화재의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물러났다.이날 이후 고종은 정환덕을 잊었다. 그런데 1901년 12월 그믐에 정말로 화재가 발생했다. 이러자 고종은 1902년 1월 7일에 함녕전 침실로 정환덕을 불렀다.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정환덕을 침실에서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고종이 물었다.“네가 화재를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확정적인 운수가 있어서인가? 아니면 우연히 맞은 것인가? (중략) 장래 종묘사직의 존망을 나도 잘 알지 못하겠다. 그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고종은 나라가 보존될지 아니면 망할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내우외환을 자력으로 극복할 생각보다는, 내우외환이 운명이라면 운명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어떤 신통력에 매달리고 싶었다. 정환덕은 참으로 난감했다. 자신이 국가의 존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엄청 큰 부담이었으리라.정환덕의 답변은 그의 저술 <남가몽(南柯夢)>에 나온다. “신의 계산으로 본다면 다가오는 광무 9년(1905년) 을사 11월 갑자일에 일계(日計)가 건괘(乾卦)의 초구(初九)로 옮겨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옛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로 나가는 시기입니다. 초구는 하루종일 씩씩하고 저녁까지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시국을 당해 국가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위태하고 어렵습니다. 충신과 열사가 서로 죽기를 다투며 조정과 재야가 함께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밖에도 허다한 변란을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중의 법을 엄숙히 하시고 용단을 확고히 하시어 어진 신하를 친근히 하시고 소인을 멀리하소서. 그렇게 하면 화란(禍亂)에서 벗어나 복록(福祿)이 되며 꽉 막힌 운수는 가버리고 태평의 운수를 맞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정환덕의 말대로라면 대한제국의 미래는 1905년이 결정적인 전환기였다.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고종은 정환덕 말처럼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해야 했다. 그런데 이완용, 박제순  같은 이가 고종 주변에 있었고, 고종은 나약하고 무능했다.   이후 정환덕은 시종원에서 5년 정도 근무하면서 고종을 모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종의 자문관이 역술가였다는 점이다. 역술가의 현실 판단과 미래 비전은 말 그대로 현실보다는 역술에 기초했다. 그런 면에서 고종의 광무개혁은 적어도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 미신에 빠진 고종       1904년 11월 18일에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미국 국무부에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  “고종은 병적으로 미신에 빠져 있으며, 1895년 갑오개혁 기간 중 궁중에서 쫓겨났던 무당들이 궁중의 모든 일에 영향력을 미치고 국고로 들어가야 할 세금까지 가로챘습니다. 고종은 전투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1904년 11월에도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당들의 말을 듣고 안심했습니다.”(구대열, 다모클레스의 칼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6, p 28) 1882년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는 환궁하면서 여자 무당을 데리고 왔는데, 고종은 그녀에게 진령군이란 군호를 주었다. 측근이 된 진령군은 국정 농단을 하였다. 1893년 8월 21일에 전(前) 정언 안효제가 상소를 올려 무당 진령군을 처벌하라고 탄핵했지만, 탄핵한 안효제가 오히려 귀양을 갔다. 그런데 고종은 1895년에 민황후가 시해된 지 10년이 다 된 1904년에도  여전히 미신에 빠져 있었다.   윤치호 일기와 고종실록이 알렌의 보고서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1904년 5월 27일의 ‘윤치호 일기’이다. 이 사료는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 5월 27일 간밤에 비.4.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고종 황제는 궁궐을 짓느라 분주하다. (1904년 4월 14일에 경운궁이 모두 불탔다- 필자 주)무당과 점쟁이들이 있는 방 두 칸에서 시간을 보내는 황제, 난방을 한 곁방 밖으로 나와 한낮의 햇빛을 보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시간도 없는 황제, 권력이 일상이고 부패가 즐거움이고 음모가 인생인 황제.  이 황제는 이 저주받은 나라의 저주받은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몇백만 원의 돈을 궁궐을 짓는 데 낭비하고 있다.”1905년 4월 17일에 의정부 참정대신 민영환이 아뢰었다.(고종실록 1905년 4월 17일)  “ ‘무당이나 점쟁이 등의 잡술은 나라에서 철저히 금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요즘 법과 기강이 해이되어 그러한 무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면서 요사스러운 말과 술수로 백성들을 선동하며 심지어는 패거리를 지어 정사(政事)를 문란하게 만듭니다. 실로 한탄스러우니, 속히 법부(法部)와 경무청으로 하여금 모두 붙잡아 법에 의거 죄를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그런데 1주일 뒤인 4월 25일에 무당과 점쟁이 등을 철저히 단속하지 않은 경무사 신태휴가 견책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의 미신 현혹 실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경운궁의 문을 수비하였다. 이때 요술(妖術)을 가지고 고종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혹 구름을 타고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만리 길을 가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진영(陳營)을 굽어본다고도 하고, 혹은 비와 돌을 마음대로 떨어뜨리게 하여, 만일 적들이 국경을 침범할 때는 비와 돌로 그들을 섬멸할 것이라고도 하였다.그들은 요망스럽고 허황된 것이 모두 이따위 것들이었다. 민영환이 참정이 되어서 누차 그들을 엄히 묻기를 간청하였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금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끝내 금하게 할 수는 없었다.” 1905년 11월 5일에 전(前) 참찬 곽종석도 미신타파를 상소했다.   “화려한 옷과 사치스런 노리개, 기이한 물건을 모두 물리치고 비용을 허비하는 여러 토목 공사나 건축 공사를 없애며, 신령과 부처, 무당과 점쟁이를 섬기는 괴상하고 허무맹랑한 짓을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
    • 기획.연재
    2022-05-02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낙안읍성 이순신 푸조나무
      순천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를 두 팔처럼 벌려 남해의 뭍 섬들을 안고 품는 아름다운 고을이다. 그 남해의 여러 고을과 섬마을은 이른 봄이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고, 매화와 동백,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어우러진다. 하지만 왜의 침입, 그리고 재침입에 피난민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던 1597년 8월 9일이다. 순천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이순신은 이른 아침 길을 재촉하여 낙안에 이르렀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집을 나와 오릿길에 이르도록 장군을 맞이했다. 이윽고 낙안성으로 들어서니, 성의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반가워했다. 또 적에게 줄 수 없다며 불을 지른 탓에 관청과 창고가 다 타버렸다고 슬피 울었다. 군량미를 얻으러 온 이순신은 순간 온몸의 힘이 쑥 빠졌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시 한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낙안성은 동쪽 금전산, 북쪽 백이산, 서쪽 노강산과 부용산, 남쪽 제석산이 두르고 있는 천혜의 분지형 요새이다. 지형이 그러하니 대개의 성은 평지에서 산기슭으로 이어지나, 낙안성은 그냥 평평한 평야에 쌓은 평지성이자 석성이다. 그날 밤, 마을의 노인들이 술을 독채 들고 왔다. 함께 음식을 나누던 이순신은 바로 가까이 있는 당산나무에 술을 한 잔 부어주었다. 그 뒤 이 당산나무를 ‘장군목’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순신 나무’가 또 있다. 1591년 2월에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로 왔다. 이듬해 4월, 왜의 침입으로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이순신은 부족한 수군과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낙안성에 들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다.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군량미를 실은 마차 바퀴가 삐걱거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서둘러 마차 바퀴를 수리하여 성 밖으로 나갔다. 큰 다리께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버렸다고 했다. 만약에 마차 바퀴 고장이 낙안성의 은행나무 아래가 아니고 다리 위였다면 어찌 됐을까? 이 광경을 지켜본 백성들은 낙안성 은행나무를 ‘이순신 나무’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한 그루 이순신 나무가 있다. 바로 객사 뒤, 담 곁에 있는 ‘푸조나무’이다.  이 푸조나무는 소금기에 잘 견디기 때문에 주로 남해안에서 자라고 있다. 수백 년을 살며 덩치도 두세 아름 넘게 커져서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이순신이 이 푸조나무를 낙안성 객사 뒤뜰에 심은 것은 수군재건길을 걸었던 이듬해인 1598년이다. 그해, 10월 14일, 이순신은 순천의 왜교성을 공격하려고 고금도 진지를 나왔다. 낙안성과 가까운 여자만의 섬 장도에 이르렀다. 당시 노루섬이라고도 했던 벌교 앞바다 여자만 장도에는 왜의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 왜병은 이순신의 수군이 온다는 말에 창고를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이순신의 수군은 장도에 상륙하여 왜병의 군량미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이어지는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침하고, 11척을 빼앗았으며, 왜병 3,000명을 무찔렀다. 그 왜교성 전투를 앞두고 낙안성에 잠시 들렸던 이순신이 승전을 기원하며 심은 나무가 바로 객사 뒤쪽의 푸조나무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몸 한쪽을 잃었지만, 오늘도 이순신의 후예들을 맞아 그날의 역사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절로 머리가 숙어지는 이유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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