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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삼간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와 전쟁 중이다. 경자역난(庚子疫亂 2020년 경자년의 역병)이라 일컫는 이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어떤 이는 코로나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임진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난리) 7년 전쟁(1592-1598)과 비교하면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김한민 감독의 천만 영화 ‘명량’에 이어 ‘한산’이 최근 촬영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을 징비(懲毖)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류성룡(1542∼1607)은 ‘징비록’을 썼다. 징비의 어원(語源)은 ‘서경(書經)’ ‘소비(小毖 일을 삼감)편’에 나오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삼간다. (予其懲 而毖後患)’이다.   왜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에 힘없이 무너졌나?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는데 조선은 왜 대비하지 못했나?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의 리더십이었다.   # 안일(安逸) 1592년은 조선 건국 200년이 되는 해였다. 건국 이후 200년간 조선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안보는 뒷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임진왜란은 최대의 국가적 위기였다. 왜 이렇게 되었나? 안일(安逸)해서였다. 1591년 2월 일본에서 귀국한 조선통신사가 선조를 알현했다. 정사 황윤길(서인) :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부사 김성일(동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선조 :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황윤길: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김성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국가 안보가 당리당략에 움직였으니 황당하다. 선조는 집권당 김성일의 말을 믿고 ‘전쟁은 없다.’고 단언했다. 안일하게 오판한 것이다.  # 도망 왜군은 파죽지세였다. 4월13일 부산포에 들어온 지 15일만인 4월28일에 왜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을 조총으로 전멸시켰다.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한 선조는 4월30일 새벽 칠흙 같은 비를 맞으며 한양을 떠났다. 호종 신하는 100여 명뿐이었다. 난민(亂民)들은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에 불을 질렀고 장예원과 형조의  공사(公私)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동파역에 이르니 밤이 깊었다. 파주목사와 장단 부사가 수라를 준비하여 올리려는데, 호위하던 나졸들이 난입하여 임금에게 올릴 음식을 모두 먹어 버렸다. 이러자 장단부사가 도망쳤다.   #. 백성들의 분노 개성에 이르자 아전들이 모여들어 선조의 실정을 비난하고 돌을 던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5월7일에 선조는 평양에 들어갔다. 선조는 전쟁 상황을 점검했다.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에서 이겼다는 소식이 들어왔지만, 육전에선  연전연패였다. 6월1일에 왜군은 개성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오고 있었다. 2일에 선조는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피난 가자는 의견과 평양 사수론이 대립했다. 이 소식에 백성들이 도성을 떠나자 선조는 백성들에게 사수(死守) 의지를 밝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지킬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6월8일에 왜군이 대동강에 진을 치자 선조는 피난 준비를 했다. 6월10일에 중전(中殿)이 평양성을 나가자, 평양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몽둥이로 궁비(宮婢)를 쳐서 말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호조 판서 홍여순은 길에서 난병(亂兵)에게 맞아 등을 다쳐 부축을 받고 돌아왔다.  # 요동으로 망명6월11일에 도망치듯 평양을 빠져나간 선조는 6월14일에 국정 권한을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요동으로 가겠다는 외교문서를 명나라에 보냈다. 6월22일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6월23일에 신하들에게 요동행을 독촉했다. 이러자 류성룡과 윤근수가 극력 말렸다. 6월24일에도 선조는 요동행을 재촉했다.   6월27일에 명나라에 다녀온 이덕형이 명나라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전하자 선조의 요동 망명 소동은 잠잠해졌다. 의주에서 선조는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도다조정 신하들은 이 날 이후에도서인이니 동인이니 나뉘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선조는 당쟁 탓, 신하 탓이다. 참 한심한 국정 최고 책임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임진왜란 초기의 전투를 자세히 살펴보자.                              1587년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조선에 가도입명(假道入明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내주라)을 요구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고, 동아시아 7년 전쟁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거부하자 히데요시는 규슈의 나고야에 침략기지를 만들고 육군 28만 명과 수군 1만 명을 편성했다. 1592년 4월 13일 오전 9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 1만8700명을 태운 왜선 700여 척이 대마도를 출발했다. 여기엔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도 있었다. 고니시의 사위 소 요시토시는  일본 사신으로 조선을 여러 번 다닌 화친파(和親派)였다.         왜군은 오후 5시경 부산포에 상륙했다. 왜선을 맨 먼저 발견한 곳은  가덕도의 응봉 봉수대였다. 봉수대는 즉시 보고했다. “13일 오후 5시경, 대략 90여 척의 왜선이 가덕도 남쪽에서 부산포를 향하여 항해 중인데 그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 보고는 곧바로 경상도 군영에 알려졌다. 그런데 부산 앞바다에서 왜선을 막아야 할 경상좌수군은 아예 출동하지 않았다. 조선군의 저지가 전혀 없자 왜군은 의아했다. 하룻밤을 잘 자고 난 왜군은 14일 새벽에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 부산 첨사 정발, 순국하다. 부산 첨사 정발은 13일 오후에 왜선이 바다를 덮어올 때 절영도(부산시 영도구)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朝貢)하러 오는 배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다. 박동량이 지은 『기재잡기』에는 “정발이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조공선(船)이라 여기고 염려하지 않았다가 왜선이 가까이 오면서 총을 연달아 쏘니 당황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급히 성에 들어온 정발은 방어할 대세를 갖추고, 장님을 시켜 퉁소를 불게 해서 군민(軍民)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였다.   14일에 왜군은 삽시간에 성을 에워싸고 성 밖 높은 곳에 올라가 조총(鳥銃)을 비 오듯 쏘아댔다. 정발은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싸웠지만 조총 앞엔 무력했다. 1543년에 포르투갈 상인이 준 귀신 같은 무기 조총은 위력이 막강했는데, 조선 장수는 조총을 과소평가했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보자. “1592년 4월 초하루에 내가 신립에게 조총의 위력을 걱정하자, 신립은 조총이라고 쏠 때마다 다 맞힌답니까라고 말했다.”  성은 한나절 만에 함락되었고, 정발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18세의 첩 애향도 정발 곁에서 자결하였다. 정발은 무과 급제하여 거제현령을 하였고 1592년에 부산첨사가 되었다. # 허둥지둥 달아난 경상좌 · 우수사  이러자 경상 좌수사 박홍은 아예 성을 버리고 언양으로 달아났다. 이어서 왜군은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와 다대포(부산시 사하구)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바닷가 군현(郡縣)의 군사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쳤다.  부임한 지 2개월 된 경상우수사 원균도 왜적이 거제도로 온다는 풍문만으로 전함을 모두 침몰시키고 남해에서 육지로 올라가려 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 1591년에 원균은 전라좌수사로 제수되었으나 사간원이 이전에 수령을 할 때 근무성적이 최하위였음을 이유로 반대하여 선조가 임명을 취소했다. (선조실록 1591년 2월 4일) 한편 충신 정발과 윤흥신은 부산 충렬사에 모셔져 있다. 
    • 기획.연재
    2020-05-26
  • 정약용, 탕론(湯論)을 짓다(3)/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17회)
    정약용의 탕론(湯論)을 정독한다.      “탕왕이 걸왕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옳은 일인가? 이것은 옛 도(道)를 답습한 것이요 탕 임금이 처음으로 열어놓은 일은 아니다.” 다산은 탕왕이 걸왕을 추방한 것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옛 도를 답습한 것이고 처음으로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고 논한다.     “신농씨(神農氏) 후손들의 덕(德)이 쇠진하여 제후(諸侯)들이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자 헌원씨(軒轅氏)가 무력을 동원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귀의하여 왔다. 그리하여 헌원씨는 염제(炎帝 신농씨의 별칭임)와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전쟁을 벌였고 세 번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써 신농씨를 대신하여 황제(皇帝)로 군림하였다. 이상은『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 보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하로서 임금을 친 것은 황제(黃帝 헌원씨의 별칭)가 창시한 일이다. 따라서 신하로서 임금을 친 것을 죄주려면  헌원씨가 가장 나쁜 악이 되니, 탕왕에게 따질 필요가 없다.” 다산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은 황제(헌원씨)가 염제(신농씨)를 친 것이 최초이며 그 근거로 사마천(BC 145~86)이 쓴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를 든다. 황제(黃帝)는 성은 공손(公孫)이요,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수레와 수레 끌채라는 뜻으로 그가 수레를 발명했다는 신화와 관련 있다. 염제(炎帝)는 불을 관장하는 농업과 의술의 신(神)으로 삼황(三皇) 중 한 사람이다. 염제는 인간에게 이로움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성지(聖地) 판천(阪泉)의 수호자가 되었는데 그 후손이 신농(神農)씨이다.  그런데 황제가 살던 시대는 각 부락이 서로 얽혀 혼전을 벌이고 있었고 신농씨는 이미 쇠퇴해 있었다. 이에 황제는 병사를 훈련시켜 조공을 바치지 않는 씨족들을 정벌하고 안으로는 덕을 베풀었다. 또한 생산력을 높이고 백성들을 어루만져주었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황제 헌원씨는 판천(阪泉,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 동쪽)에서 염제 신농씨와 세 차례 큰 전쟁을 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므로 다산은 중국에서 최초로 혁명을 한 사람은 탕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논한다. 글은 이어진다. “대저 천자(天子)의 지위는 어떻게 해서 소유한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져 천자가 된 것인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나 천자가 된 것인가. 생겨진 근원을 더듬어보면 이러하다. 5가(家)가 1린(隣)이고 5가에서 장(長)으로 추대한 사람이 인장(隣長)이 된다. 5린(隣)이 1리(里)이고 5린에서 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이장(里長)이 된다. 5비(鄙)가 1현(縣)이고 5비에서 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현장(縣長)이 된다. 또 여러 현장들이 다 같이 추대한 사람이 제후(諸侯)가 되는 것이요, 제후들이 다 같이 추대한 사람이 천자가 되는 것이고 보면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다산은 아래로부터 추대를 받아 제후도 되고 천자가 되었다고 논한다. 요즘 같으면 ‘풀뿌리 민주주의’이다. 이어서 읽어보자.   “대저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은 또한 여러 사람이 추대하지 않으면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5가가 화협(和協 화합과 협조)하지 못하게 되면 5가가 의논하여 인장을 바꿀 수 있고, 5린이 화협하지 못하면 25가가 의논하여 이장을 바꿀 수 있고, 구후(九侯)와 팔백(八伯)이 화협하지 못하면 구후와 팔백이 의논하여 천자를 바꿀 수 있다. 구후와 팔백이 천자를 바꾸는 것은 5가가 인장을 바꾸고  25가가 이장을 바꾸는 같은 것인데, 누가 신하가 임금을 쳤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바꾸는 데 있어서도 천자 노릇만 못하게 할 뿐이지 강등(降等)하여 제후로 복귀하는 것은 허락하였다. 때문에 주(朱)를 당후(唐侯)라 했고 상균(商均)을 우후(虞侯)라 했고 기자(杞子)를 하후(夏侯)라 했고 송공(宋公)을 은후(殷侯)라 했다.” 주는 요(堯)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이고, 상균(商均)은 순(舜)임금의 아들이다. 두 사람은 천자는 안되었으나 제후로 대접받았다. 기자(杞子)는 우(禹) 임금의 후예인 동루공(東樓公)이고 송공(宋公)은 은나라 주왕의 서형(庶兄)인 미자계(微子啓)이다. “그런데 완전히 끊어버리고 후(侯)로도 봉(封)하여 주지 않은 것은 진(秦)나라가 주(周)나라를 멸망시킨 뒤이다. 이리하여 진나라의 후손도 후(侯)에 봉해지지 못한 채 끊겨버렸고, 한(漢)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제후로 봉해지지 않은 채 끊겨버리는 것을 보고는 모두 들 “천자를 치는 자는 불인(不仁)한 자다.”하는데, 이것이 어찌 실정(實情)이겠는가.” 이윽고 글은 뜰에서 춤추는 자들의 지휘자로 옮겨간다.    “뜰에서 춤추는 사람은 64인인데, 이 가운데서 1인을 선발하여 우보(새의 깃으로 장식한 의식용(儀式用) 아름다운 양산(日傘))를 잡고 맨 앞에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지휘하게 한다. 우보를 잡고 지휘하는 자의 지휘가 절주(節奏)에 잘 맞으면 모두 들 존대하여 ‘우리 무사(舞師)님’하지만, 지휘가 절주에 잘 맞지 않으면 모두들 그를 끌어내려 이전의 반열(班列)로 복귀시키고 유능한 지휘자를 다시 뽑아 올려놓고 ‘우리 무사님’하고 존대한다. 끌어내린 것도 대중(大衆)이고 올려놓고 존대한 것도 대중이다. 대저 올려놓고 존대하다가 다른 사람을 교체시켰다고, 교체시킨 사람(즉 대중)을 탓한다면 어찌 도리에 맞는 일이겠는가.” 지휘자가 실력이 없어 대중이 그를 교체했는데도 대중을 탓하면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한(漢) 나라 이후로는 천자가 제후를 세웠고 제후가 현장을 세웠고 현장이 이장을 세웠고 이장이 인장을 세웠기 때문에 감히 공손하지 않은 짓을 하면 ‘역(逆)’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른바 역(逆)이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하였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한 것은 순(順)이고, 지금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임명했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이 된 것은 역이다. 그러므로 왕망ㆍ조조ㆍ사마의(司馬懿)ㆍ유유(劉裕)ㆍ소연(蕭衍) 등은 역(逆)이고, 무왕ㆍ탕왕ㆍ황제(黃帝) 등은 현명한 왕이요 성스러운 황제(皇帝)이다. 중국 역사에서 ‘찬탈자’로 알려진 왕망은 고모가 한나라의 왕비가 되면서 권력을 잡고 신나라(9~25)를 세운 황제이다. 조조(155∼220)는 후한(後漢, 25~220) 헌제의 후견인으로 위나라를 세운 ‘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고, 사마의 (179∼251)는 사마중달로 더 알려진 조조의 지략가인데, 그의 손자 사마염이 위·오·촉 삼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웠다. 남조시대 송나라를 건국한 유유(363~422년)도 왕위를 찬탈한 자이고, 소연(464~549)은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제(齊)나라 황제 자리를 물려받아 양나라를 건국했다. 다산은 이들을 모두 역(逆)으로 본다.      “이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걸핏하면 탕왕과 무왕을 깎아내려 요순보다 못하게 만들려 한다면, 어찌 이른바 고금(古今)의 개변(改變)된 내용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장자(莊子)는 이런 말을 하였다.“여름 한 철만 살고 가는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다산의 탕론은 BC 4세기 전국시대를 산 자유로운 영혼 장자의 말로 마무리한다. 전체를 모르고 일부에 편벽한 어리석음을 일깨운다.
    • 기획.연재
    2020-05-07
  • 정약용, 탕론(湯論)을 짓다(2)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맹자의 대화를 살펴보자. 제나라 선왕 : “은나라 탕(湯)왕이 하나라 걸(桀)왕을 내쫓고, 주나라 무(武)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정벌한 일이 있습니까.” 맹자 : “책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선왕 :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였는데, 선생은 그 일이 옳다고 여기십니까?”맹자 :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고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또한 적(賊)과 잔(殘)을 일삼아 저지르는 자를 필부(匹夫)라고 합니다. 나는  일개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군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맹자』「양혜왕 하」 제 선왕은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한 것이 옳은 것인지를 맹자에게 묻는다. 왜 유가(儒家)에서는 군주를 시해한 탕왕과 무왕을 성왕(聖王)으로 추앙하느냐는 문제제기였다.       사실 그랬다. 탕왕이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남소(南巢)라는 곳으로 쫓아낸 후에도 세상 사람들의 비난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탕왕 또한 임금을 몰아냈다는 오명(汚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지, 새로 세운 나라의 도읍지인 박 땅에 돌아와 모든 제후와 신하들을 모아놓고 ‘혁명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천하에 알렸다. 『서경』에 나온다. “세상 백성들이여,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는 백성들에게 올바른 마음을 내려주시어 항상 올바른 성품을 지닌 사람을 따르게 하셨다. 따라서 하늘이 정하신 올바른 길을 따르는 사람만이 임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라 걸왕은 덕(德)을 망치고 폭위로  백성들에게 포학한 정치만을 펼쳤다. 백성들은 흉악한 박해를 당했고, 그 고통을 참다못해 마침내 자신들이 죄 없음을 천지신명에 고하였다. 하늘의 법도(法度)는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는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이에 하나라에 재앙을 내려 그 죄를 밝히셨다. 그러므로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천명(天命)을 받들고 위엄을 밝혀, 감히 하(夏)나라를 정벌하고자 한 것이다. 감히 천신(天神)에게 검은 황소를 제물로 바쳐 하나라 임금의 죄를 아뢰었소. 마침내 하늘은 진실로 백성을 보살펴 죄인을 물리치고 굴복시키셨소. 하늘의 명령이 어긋나지 않음은 아름답기가 풀과 나무에 핀 꽃과 같아서, 만백성이 참으로 번성하게 된 것이요. 하늘은 나에게 나라를 화합하게 하시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셨소. 이에 나는 하늘과 백성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깊은 연못에 떨어진 듯하오. 각자 자신들의 법도(法度)를 지켜 하늘의 명(命)을 받들 것을 부탁하오. 그대들에게 죄가 있으면 내가 혼자 책임을 질 것이고, 내가 죄(罪)가 있다면 그대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도록 하겠오.”-『서경(書經)』「상서(商書)-탕고(湯誥)」 하지만 탕왕이 즉위하자마자 은나라엔 가뭄이 들었다. 그것도 7년간 계속되었다. 이는 하나라 시절보다 더 심했다. 백성들은 하늘의 재앙이라고 수군댔고 민심이 흉흉했다.    이러자 어떤 무당이 ‘사람을 제물(祭物)’로 하여 기우제를 지내야만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탕왕은 “백성 중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죽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제물이 되겠다고 나섰다. 탕왕은 거친 베옷을 입고 기우제 장소인 상림(桑林)으로 향했다. 상림에 도착하자 탕왕은 머리카락과 손톱을 깎고 목욕재계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라갔다. 그는 여섯 가지 일을 반성하면서 하늘에 빌었다.     “정치에 절제(節制)가 없어 문란해졌기 때문입니까?,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경제가 어려움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까?, 궁전이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때문입니까?, 여자의 청탁이 심하고 정치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뇌물이 성행하여 정도(正道)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로 인하여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기 때문입니까? 하늘이시여, 모든 벌은 전부 저에게 내리시고 불쌍한 백성들을 고통에서 구해 주소서.” 이러자 하늘도 감동하여 은나라 땅에 비가 내렸다.  탕왕과 마찬가지로 무왕의 군사행동도 비난을 받았다. 그 사례가 백이와 숙제가 무왕에게 한 간언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백이·숙제 열전」에 나온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제후는 숙제에게 자신의 뒤를 잇도록 했다. 그러나 고죽국의 제후가 사망한 후, 숙제는 제후의 자리를 형 백이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도망쳐버렸고, 숙제 역시 제후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나라 밖으로 떠나버렸다. 고죽국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중간의 아들(백이의 동생이며 숙제의 형)을 제후로 세웠다. 그 후,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西伯昌 :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이 노인들을 잘 모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주(周)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창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 아들인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시호를 문왕(文王)이라고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문왕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군사를 동쪽으로 진격시켜 은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했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벌이는 것을 어찌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신하의 몸으로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죽이는 것을 어찌 인(仁)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때 무왕을 보좌하는 좌우의 신하들이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태공망 여상(呂尙)이 “이들은 의(義)로운 사람들이다”라고 두둔하였고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냈다. 태공망 여상은 강태공이다. 강태공은 가난하여 집안을 돌보지 못해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하루는 위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나중에 문왕이 됨)을 만났다. 서백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이후 그는 무왕을 도와 주왕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졌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를 평정하고, 천하 제후들이 주(周)나라를 종주국(宗主國)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주나라의 곡식과 녹봉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살았다. 백이와 숙제는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아래와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저 서산(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면서 그 잘못을 모르는 무왕(武王).신농(神農)·순(舜)임금·우왕(禹王)의 태평성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아 이제는 죽음뿐이미 다한 내 운명이여.” 백이와 숙제는 결국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이 노래로 미루어 본다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끝까지 충절을 지킨 충신으로 널리 알려졌다. 불사이군(不事二君). 문득 고려 충신 정몽주가 생각난다. 역성혁명으로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도 생각난다.   아무튼 유가(儒家)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의 일곱분을 성왕(聖王)으로 추앙한다.  
    • 기획.연재
    2020-04-20
  • 정약용, 탕론(湯論)을 짓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 영국의 ‘액튼 경’ 정약용의 탕론(湯論)을 읽었다. <다산시문집 제11권>에 수록되어 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옳은 일인가? (湯放桀可乎? 臣伐君而可乎?)”   제후 탕왕이 천자 걸왕을 방벌(放伐)한 것이 옳은 일인가? 소위 쿠데타가 정당한가?  사마천(기원전 145-87)은 《사기(史記)》에서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력이 이미 쇠약하여 많은 제후(諸侯)가 떨어져 나갔다. 걸왕은 부도덕하였고,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과 이윤(伊尹)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백성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상(商)나라 탕왕(湯王)을 하대(夏臺)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을 자행하였다. 이런 실덕(失德)으로 결국 탕왕(湯王)의 공격을 받아 남방으로 달아났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임금이 세운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재위: BC 1818∼1766)은 폭군(暴君)으로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제후들과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걸왕은 총애하는 말희(末喜)에게 빠져서 정사를 전혀 안 돌보았다. 하루는 걸이 각지에서 잡아 온 여자와 춤판을 벌인 후 술을 한 잔씩 하사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매우 많아 술을 따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에 말희는 일일이 술을 따르지 말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연못 둘레에 고기 숲을 만들어 즐기자고 제안했다.  공사가 끝난 후 걸은 말희와 함께 술로 만든 연못에 배를 띄운 후, 나무에 고기가 매달려있는 모습을 보며 무희들의 춤을 구경하였다.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이었다.) 이러자 충신 관용봉이 간언했으나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노비 출신으로 벼슬한 이윤(伊尹) 역시 걸에게 간언하다가 겨우 죽임을 면했다.   제후의 우두머리 격인 방백(方伯)이었던 탕(湯)도 걸왕에게 여러 차례  진언했지만, 오히려 죽임당할 뻔했다가 진상품을 바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여러 제후들이 걸을 쫓아낼 것을 탕에게 말하자, 탕은 책사 이윤과 함께 군사를 모아 명조(鳴條 산서성 안읍현) 땅에서 걸왕을 쳤다. 탕은 싸움을 하기 전에 박 땅에서 군사를 모아 놓고 훈시를 하였다. 『서경(書經)』의  ‘탕서(湯誓)’가 그것이다. “여러분에게 고하노니 잘 들으시오. 나 같은 하찮은 인물(小子)이 감히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요. 하나라 임금 걸이 죄가 많아 천명(天命)에 따라 그를 치는 것이요. 이곳에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왕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우리들의 농사일을 다 팽개치고 하나라를 치려 간다’고 말할 것이요. 나는 여러분의 말을 잘 듣고 있소. 하지만 하나라 임금은 죄가 있소. 나는 하늘의 상제를 두려워하니 감히 그를 응징하지 않을 수 없소. (중략) 여러분은 나를 도와 천벌을 하나라에 쏟아 주기 바라오. 내 너희에게 크게 상을 줄 것이오. 나는 식언하지 않소. 만약 여러분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곧 여러분을 처자식과 함께 죽일 것이며 용서하지 않겠소” (김학주 역저, 서경, 명문당, 2002, p 159-162) 그리하여 탕왕은 걸왕을 몰아내고 상(商)나라를 세웠고, BC  1766년부터 13년간 재위했다.   그런데 탕왕이 훈시하면서 ‘우리 왕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우리들의 농사일을 다 팽개치고 하나라를 치려 간다’는 말을 스스로 하는 것을 보면, 백성들은 탕이 걸을 치는 것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중국에선 신하가 임금을 갈아 치우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국시대에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BC 372∼289)에게 한 질문이다. 『맹자』 「양혜왕 하」 편에 나온다.  제나라 선왕 : 은나라 탕(湯)왕이 하나라 걸(桀)왕을 내쫓고, 주나라 무(武)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정벌한 일이 있습니까? 맹자 : 책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선왕 :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였는데, 선생은 그 일이 옳다고 여기십니까?맹자 :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고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또한 적(賊)과 잔(殘)을 일삼아 저지르는 자를 필부(匹夫)라고 합니다. 나는 일개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군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나라 선왕의 질문(탕왕이 걸왕을 내쫓고,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일)에 맹자는 책에 적혀 있다고 답한다. 맹자가 말한 책은 『서경(書經)』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紂)왕을 내친 이야기를 해보자. BC 1046년에 주나라 제후 무왕은 목야(牧野)에서 폭군 주왕(紂王)과의 결전을 앞두고 군사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 『서경』‘주서(周書) 목서(牧誓)’에  나온다.    “옛사람의 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하였다. 지금 주왕은 오직 한 여인(달기)의 말만을 듣고 있소.”   당시에 은나라는 주왕의 애첩 달기가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은나라 주왕은 원래 자질이 뛰어 났다. 말솜씨가 뛰어나고 행동도 민첩했다. 체력도 좋아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총명하여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주왕이 유소(有蘇)를 정벌했을 때 유소는 주왕에게 달기를 바쳤다. 주왕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인 달기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이후 주왕은 정사(政事)를 아예 돌보지 않고 달기와 쾌락에 빠졌다. 달기는 주왕을 사로잡기 위해 복숭아꽃 꽃잎을 짜서 만든 ‘연지(燕脂)’를 뺨에 발랐고, 그녀 방에는 음란한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주왕은 녹대(鹿臺)라는 누각을 만들어 재물을 가득 쌓았다. 별궁 정원 앞 연못에는 술을 가득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즐비하게 늘어세운 뒤,  그 사이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젊은 남녀를 뛰놀게 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향락하였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졌다. 달기는 정부 인사에도 관여하였다. 주왕은 달기의 마음에 드는 신하만 중용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간신들로 가득 찼다. 미자(微子) · 기자(箕子) · 비간(比干) 같은 충신들의 직언을 싫어하여 그들을 내쳤다. 그리하여 미자는 나라를 떠났고, 기자는 노비가 되었으며, 비간은 죽임을 당했다. 주왕의 숙부인 비간은 사흘 동안이나 주왕에게 간언하였는데 주왕은 “옛 성현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네 심장에는 과연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며 비간을 해부하여 그 심장을 꺼내보았다. 특히 참혹한 것은 주왕은 임신한 비간의 아내의 배를 갈라 태를 보는 악행도 서슴지 않은 점이다.   무왕의 훈시는 이어진다. “임금 주는 백성들에게 포학한 짓을 하며 간사하고 악독한 짓을 일삼고 있소. 나 발(發)은 오직 하늘의 벌 주심을 삼가 행하려는 것이요.” 마침내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 폭군 주왕을 징벌했다. 두 나라는 목야에서 전투를 벌였다. 주나라 군사는 4만5000명, 은나라는 70만 명이었다. 은나라는 수(數)적으론 우세했지만 군사들이 주로 노예와 가난한 자유민이어서 적개심이 있을 리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은나라 군사들은 무기를 거꾸로 들고 앞다투어 투항했다. 폭군 주왕은 보물을 감춰둔 녹대의 ‘선실(宣室)’에 불을 놓아 스스로 불타 죽었고, 요녀(妖女) 달기는 목을 매어 자결했다. (계속)/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20-04-08
  • 정약용, 원목(原牧)과 원정(原政)을 짓다
    다산 정약용은 원목(原牧)과 원정(原政) 글을 지었다. 원목은 ‘목(牧)이란 무엇인가?’를 캐묻는 글이다. “목민자(牧民者)가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자를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쌀과 옷감을 생산하여 목민자를 섬기고, 또 수레와 말과 하인을 내어 목민자를 전송·환영도 하며, 또는 고혈(膏血)을 짜내어 목민자를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과연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다산은 ‘목민자는 백성을 위하여 있다’고 결론부터 낸다.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 무슨 목민자가 있었던가? 백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한 사람이 이웃과 다투다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을, 공정한 어른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가서 해결을 보고 감복한 나머지 그를 추대하여 이정(里正)이라 하였고, 또 여러 마을 백성들이 자기 마을에서 해결 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식견이 많은 어른을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그를 추대하여 당정(黨正)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고을 백성들이 자기 고을에서 해결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어진 이를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그를 추대하여 주장(州長)이라 하였고, 또 여러 주(州)의 장(長)들이 한 사람을 어른으로 모시고는 국군(國君)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나라의 군(君)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방백(方伯)이라 하였고, 또 사방(四方)의 백(伯)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그를 황왕(皇王)이라 하였다. 따지자면 황왕의 근본은 이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목민자는 백성을 위하여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해결사로 추대된 자가 지금 같으면 반장, 이장, 통장, 읍·면·동장, 시 ·군수·구청장, 도지사. 대통령이다. 글은 이어진다.  ”그때는 이정이 민망(民望 백성들의 요망)에 따라 법을 제정한 다음 당정에게 올렸고, 당정도 민망에 따라 주장에게 올렸고, 주장은 국군에게, 국군은 황왕에게 올렸었다. 그러므로 그 법들이 다 백성의 편익을 위하여 만들어졌었는데, 후세에 와서는 한 사람이 스스로 황제가 된 다음 자기 아들ㆍ동생 그리고 가신들까지 모두 제후(諸侯)로 봉하는가 하면, 그 제후들은 자기 측근을 주장(州長)으로 세우고, 주장은 또 자기 측근을 당정ㆍ이정으로 세우고 있다. 따라서 황제가 자기 욕심대로 법을 만들어서 제후에게 주면, 제후는 자기 욕심대로 법을 만들어서 주장에게 주고, 주장은 당정에게, 당정은 이정에게 법을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그 법이라는 것이 임금은 높고 백성은 낮으며, 아랫사람 것을 긁어다가 윗사람에게 붙여주는 격이 되어, 얼핏 보기에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꼴이 되고 있다. 지금의 수령은 옛날로 치면 제후들인데 그들의 궁실(宮室)과 수레와 말ㆍ의복과 음식 그리고 좌우의 최측근과 시종들이 거의 국군(國君)과 맞먹는 상태인데다, 그들의 권능이 사람을 경사롭게 만들 수도 있고 그들의 형벌의 위세는 사람을 겁주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거만하게 스스로 높은 체하고 태연히 혼자 좋아서 자신이 목민자임을 잊어버리고 있다. 한 사람이 다투다가 해결을 위하여 가게 되면 곧 불쾌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왜 그리 시끄럽게 구느냐 하고, 한 사람이 굶어 죽기라도 하면 ‘제가 스스로 잘못해서 죽었다.’하며, 곡식이나 옷감을 바쳐서 섬기지 않으면 매질이나 몽둥이질 하여 피를 보고야 말 뿐 아니라, 날마다 돈 꾸러미나 세고 글을 첨삭 수정을 일기 삼아 기록하여 돈과 베를 거두어들여서 논밭과 저택이나 장만하고, 권문귀족ㆍ재상에게 뇌물을 쓰는 것을 일삼아 후일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란 말이 나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디 이치에 맞기나 하는가.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목민자가 백성 위에 군림하다니 이치에 맞기나 하나? 지금은 어떤가?  다음은  원정(原政)이다. ‘정치란 무엇인가?’를 캐묻는 글이다.  “정(政)의 뜻은 바로잡는다[正]는 말이다. 첫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가장 질 좋은 토지를 소유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좋은 토지를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이 때문에 토지를 개량하고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 그것을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둘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풍요로운 땅이 많아서 남는 곡식을 버릴 정도이고, 누구는 척박한 땅도 없어서 모자라는 곡식을 걱정만 해야 할 것인가. 이 때문에 배와 수레를 만들고 저울과 되의 규격을 정립하여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셋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제멋대로 삼켜서 커지고, 누구는 연약한 위치에서 자꾸 빼앗기다가 멸망해 갈 것인가. 이 때문에 죄 있는 자를 성토하여 세대가 끊긴 자는 이어가게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넷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상대를 업신여기고 불량하고 악독하면서도 육신이 멀쩡하게 지내고, 누구는 온순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착하면서도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가. 이 때문에 형벌로 징계하고 상으로 권장하여 죄와 공을 가려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다섯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멍청하면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악(惡)을 전파하고 있고, 누구는 어질면서도 아랫자리에 눌려 있어 그 덕(德)이 빛을 못 보게 할 것인가. 때문에 붕당(朋黨)을 없애고 ‘공공의 도덕(公道)’을 넓혀 어진 이를 기용하고 불초한 자를 몰아내어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다산은 위 5가지의 불공정과 불합리를 바로 잡는 것이 정(政)이라고 논한다. 글은 이어진다.   “하나, 밭도랑을 준설하고 수리(水利) 시설을 함으로써 장마와 가뭄에 대비하고, 둘, 소나무ㆍ감나무ㆍ밤나무 등속을 심어서 궁실(宮室)도 짓고, 관곽(棺槨)도 만들고, 또 곡식 대신 먹기도 하고, 셋, 소ㆍ염소ㆍ닭ㆍ돼지ㆍ개 등을 길러 군대와 농민을 먹이기도 하고, 노인들 봉양도 한다. 넷, 우인(虞人 산림을 맡은 벼슬)은 시기를 정하여 산림에 들어가서 짐승과 새들을 사냥함으로써 해독을 멀리하기도 하고, 또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도 하며, 다섯, 공인(工人)도 계절따라 산림에 들어가서 금ㆍ은ㆍ철과 보옥(寶玉)을 캐다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하고, 또 모든 쓰임에 공급도 하며, 여섯, 의사는 병리(病理)를 연구하고 약성(藥性)을 감별하여 전염병과 요절을 미연에 방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왕정(王政)인 것이다.  그런데 왕정(王政)이 없어지면 백성들이 곤궁하기 마련이고, 백성이 곤궁하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나라가 가난해지면 조세 거두는 것이 번거롭고, 조세 거둠이 번거로우면 인심(人心)이 이산(離散)되고, 인심이 이산되면 천명(天命)도 가버린다. 그러므로 급히 서둘러야 할 것이 정(政)이다.” 백성이 곤궁하면 민심(民心)이 이산되고, 민심이 떠나면 천명(天命)도 가버린다. 문득  <맹자>의 글이 생각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가 가장 하찮다.”  - <맹자> ‘진심 하’ ※원목과 원정의 저술연도는 알 수가 없다. 박석무는 ‘다산이 벼슬하는 동안의 저술’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다산학의 인문학적 가치와 미래 2019.11.15. 기조연설)   
    • 기획.연재
    2020-03-24
  • 정약용, 형 정약전에 편지 “나라가 썩은 지 오래
    다산의 3리(三吏) 시 중 마지막 시는 ‘해남리(海南吏)’이다.  다산은 해남에서 도망 나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도 세금 독촉을 하는 혹독한 아전이 세금을 걷어가고 있었다.   해남리도    두보의 ‘동관리(潼關吏)’ 시를 차운하였다. ‘동관리’ 시는 동관의 성을 쌓는 병사들의 고초를 적은 시이다. 759년 9월 곽자의를 비롯한 9명의 절도사들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상주에 있는 안사의 난의 주모자 안경서를 포위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될 무렵 상주성은 양식이 바닥나서 큰 위기가 왔다. 그러나 안사의 난의 또 다른 주동자 사사명의 원군이 오고, 포위군 측은 지휘계통이 안 서고 군기가 해이해져서 3월의 싸움은 관군의 패전으로 끝났다.   곽자의는 장안에 이르는 요충인 동관에 성을 쌓아 적의 진격을 방어하려 했다. 마침 이곳을 지난 두보는 동관의 병사들의 고충을 시로 적었다. 그러면 ‘동관리’를 읽어보자. 병사들은 이 무슨 고생인가?   동관 길목에 성을 쌓고있네.      큰 성은 철옹성 보더 견고해 보이고  작은 성은 만여 장 더 되는 높이!   동관 관리에게 물어보니           관문 만들어 오랑캐 침입에 대비한다고               나를 굳이 말에서 내리게 하여  산의  산모퉁이 가리키는데   늘어선 방책 구름에 닿아 정녕 나는 새도 넘지 못할 듯     ”오랑캐가 와도 지키면 될 뿐 어찌 장안 걱정 할 일  있으랴 저기 저 요새를 보시오 수레 하나 겨우 지날 좁은 길   전쟁 나면 긴 창 휘둘러 만고에 한 사람이면 지키지요.”  슬프도다, 도림에서의 전투여 백만 대군 물고기 밥이 되었으니     이 관문 지키는 장수여, 부디가서한의 흉내는 내지 마시라 그러면  해남리(해남의 아전)시를 읽어보자. 나그네 한 사람 해남에서 달려와      무서운 것 피해 오는 길이라면서      한참 되어도 가쁜 숨 가라앉지 않고   아직도 겁에 질린 기색이네           이 사람 승냥이나 이리를 만난 것이 아니면  오랑캐 족속을 만난 게 분명하네.           “세금 독촉 아전들이 마을에 나타나     이리저리 다니면서 마구 짓밟고             신관 사또 명령은 더욱 엄해서               정해진 기한을 넘길 수가 없다고 하네     주교사의  만곡선이                        정월에 서울 떠나                         주교사(舟橋司)란 전국의 조운(漕運)을 관장하고 부교를 놓는 관청이고,  만곡선(萬斛船)은 지방에서 거둔 세미(稅米)를 조창(漕倉)에서 서울로 운반하는 배이다.   더 이상 지체하면 모가지가 날아감은     종전부터 있어 왔던 예이기에             여기 저기 통곡소리 시끄럽지만         그것으로는  뱃사공 끄떡도 안하네.       나는 지금 맹호를 피해왔으나             바짝 마른 물고기를 그 누가 구해주리.”  두 줄기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며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네.              재해가 심하여도 세금만 걷어가는 조정, 그리고 지방 수령과 아전이 너무 원망스럽다. 이게 나라인가?                                                          한편 정약용은 1810년경에 흑산도에 유배 중인 둘째 형 정약전(1758∼1816)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는 썩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편지에는 요순시대의 정치가 가장 모범인 것은 고적제 즉 인사고과제도에 있음을 토로했다. 그러면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최근 몇 년 사이에 저는 요순시대의 나라 다스리던 법을 깨달았습니다. 후세와 비교해 보면 훨씬 엄혹(嚴酷)하고 빈틈없이 짜여져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요순의 정치는 순박하고 태평하여 천하가 저절로 조화된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치로서 매우 어리석은 견해라 하겠습니다. (중략) 공자(孔子)께서 항상 말씀하시길, ‘요순시대는 희희호호(熙熙??)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순박하고 태평스럽다 뜻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희희(熙熙)는 ‘밝다’는 뜻이고 호호(??)는 ‘희다’는 뜻이니, ‘희희 호호’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일이 다 사리(事理)에 의해 잘 다스려져 밝고 환하여 티끌 하나 터럭 하나라도 악(惡)을 숨기고 더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세속에서 말하는 ‘밤이 낮 같은 세상'이란 것이 바로 요순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순시대가 그렇게 되어진 까닭을 살펴보건대, 그것은 오직 고적(考績 인사고과)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고적제도는  요즘 세상의 여덟 글자로 된 제목(題目)만 있는 고적 제도처럼 소루(疏漏)하거나 조략(粗略:엉성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본인으로 하여금 직접 임금 앞에 와서 얼굴을 맞대고 자기 입으로 말을 하게 하였으니 잘못한 것을 거짓으로 꾸밀래야 꾸밀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 이어서 편지는 순임금에게 신하들인 우(禹), 고요(皐陶), 익(益)직(稷)이 자기의 치적을 거짓 없이 아뢰는 모습을 편지에 적는다.  “무릇 전(典)이란 나라를 통치하는 법이요, 모(謨)란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입니다. 그 법과 정책은 고적제도 보다 더 나은 게 없으니, 이것이 바로 요순(堯舜)의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순임금께서는 그냥 옷소매를 드리우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진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점잖이 앉아 있었는데도 천하가 자연히 태평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는 썩어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요즈음 관리를 포폄(褒貶 포상과 징계)하는 제목(題目)에 적혀 있길 ‘이욕의 생각이 없고 편안하고 단아하게 정치를 하여 다스림으로 온 경내가 평온하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사람을 순 임금의 어전에 올라가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한다면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아뢸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렇게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요순시대 통치와 정책의 근간은 고적을 떠나서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직접 진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고적법이요, 차선책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공적 사항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더러운 세상에서는 만약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하는 법을 시행케 한다면, 고을의 수령(守令) 된 자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기의 책임을 다한 것처럼 꾸미려고, 하지도 않는 일들을 만들어 자기의 공적 사항을 뚜렷하게 꾸미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지는 것이 어찌 이 정도로까지 심하기야 하겠습니까. 오호, 슬프기만 합니다. 그 누가 있어 백성을 위해 이 막된 세상의 참모습을 아뢴단 말입니까?” *다산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는 <다산시문집(한국고전종합D/B)에 17통이 실려있고, 박석무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도 13통이 번역되어 있다. 
    • 기획.연재
    2020-03-09
  • 정약용, 아전을 고발하는 시 3편을 쓰다
    1809년과 1810년 두 해에 걸쳐 전라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넘 쳤다. 전염병마저 창궐하여 시신(屍身)들이 언덕을 메웠다.     이러함에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수탈만 일삼았다. 다산은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탐학만 일삼는 아전을 고발하는 <용산리(龍山吏)> · <파지리(波池吏)> · <해남리(海南吏)>, 소위 3리(三吏) 시를 지었다.  <용산리>는 당나 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석호리(石壕吏)>, <파지리>는 <신안리(新安吏)>, <해남리>는 <동관리(潼關吏)> 시를 차운하였 다.    그러면  3리(三吏) 시를 살펴보자. 먼저 <용산리>이다. 1810년 6월에 지은 이 시는 용산촌에 들이닥친 아전의 횡포를 고발한 시 이다. 강진군 도암면 용흥리 용산마을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용산촌인 것 같다. 다산은 두보의 <석호리> 시의 운을 차운하여 <용산리>시를 지었다.  두보는 안녹산의 난이 한창인 759년에 낙양에서 돌아오면서 석호촌(石壕吏)에 하룻밤 묵었는데, 하양의 역사(役事)를 위하여 징발에 끌려가는 할머니를 목격하고 시를 지었다. 그러면 <석 호리> 시부터 감상하자. 시는 5언 4구, 6수이다.     석호 마을에서 해질녘 석호촌에 투숙했는데    한 밤중에 사람 잡는 관리들    영감은 담장 넘어 도망치고     할멈 있어 대문 열고 내다보는데 관리는  어째서 화내는고?      할멈은 또 얼마나 섦게 우는가          할멈이 앞에 나가 사정하는 말 들으니. “세 아들이 업성에서 수자리 사는데    한 아들이 편지 부쳐왔네          두 아들이 새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산 사람이야  모진 삶 살겠지만      죽은 자는 다시 못 돌아오네.        집안엔 사나이는 하나도 없고         오직 젖먹이 손주만 있어            손주의 어미는 아직 남아있지만       멀쩡한 나들이 옷 조차 없습죠.       이 늙은이 기력은 떨어졌지만      이 밤에 나으리를 따라가             급히 하양의 부역에 응하면           아침밥은 지을 수 있을 것이외다”                                          밤이 깊자 말소리가 끊어졌는데       흐느껴 우는 소리 잠결에 들은 듯.    날이 밝아 내가 길 떠날 때에는      늙은 영감 혼자와만 작별하네.       그러면 다산의 <용산리>시를 읽어보자. 용산리(龍山吏) 두보(杜甫) 운에 차운함. 경오년(1810) 6월  아전들이 용산촌에 들이닥쳐서      소 뒤져 관리에게 넘겨주는데     그 소 몰고 멀리멀리 사라지는 걸   집집마다 문에 기대어 보고만 있네. 사또님 노여움만 막으려 하니   그 누가 백성 고통 알아줄 건가. 유월에 쌀 찾아 바치라 하니                    모질고 고달프기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일)보다 더하네. 좋은 소식은 끝내 오지 않고          만 목숨 서로 포개고 죽을 판이네     제일 불쌍한 건 가난한 백성이라     죽는 자가 오히려 팔자 편하네        남편 없는 과부와                  손자 없는 늙은이들                  빼앗긴 소 바라보며 엉엉 우는데     눈물 떨어져 베적삼을 다 적시네     촌마을 모양새가 이렇게 피폐한데    아전 놈 왜 가지 않고 앉아있을까    쌀독은 바닥난 지 이미 오랜데     무슨 수로 저녁밥 짓는단 말인가   죽치고 앉아 남 못살게 구니      온 동네 사람들 목메어우네.         소 잡아 포를 떠서 세도가에 바치면 재주꾼 솜씨가 이로써 드러나네.     흉년에 먹을 것도 없는 마을에 들이닥쳐 세금 안 낸다고 소마저 끌고 가는 아전. 죽치고 앉아 밥 얻어먹고 가려는 아전. 이런 승냥이의 횡포에 분노가 치민다.                    이어서 <파지리(波池吏 파지촌의 아전)> 시를 살펴보자. 이 시는 아전들이 파지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에 농부라고는 없는데 애꿎 은 고아와 과부를 결박하여 성 앞에 세워놓았다.  또한 도망 못 간 선비 한 사람을 잡아서 나뭇가지에다 거꾸로 매달고 마을 사 람들에게 세금 독촉을 하고 있다.   <파지리>는 두보의 신안리(新安吏 신안 마을) 시의 운을 차운하여 지었다. 두보는 759년 안사의 난 때 관군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한 후에 사공참군으로서 낙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안마을(하남성 신안현)을 직접 목격한 것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는 반란군에게 대패한 관군이 신안 마을에서 보충병을 뽑아 출정시키는 장면을 적은 시이다. 먼저 두보가 지은 <신안리>의 주요 구절을 읽어보자 우연히 신안 마을을 지나가는 길 떠들썩한 병사의 점호를 보다.그 고장 관리에게 연유 물으니 “ 저들 나이 어리고 체구 작거니그 어찌 낙양성을 지켜 낼꼬? 관군이 상주를 수복한다기 얼마나 기다렸나. 평정할 그 날 그러나 반군의 세력이 커서패하여 도망쳐 돌아올 줄이야!  (후략) 그러면 다산의 <파지리> 시를 읽어보자.      파지리(波池吏 파지촌의 아전) 아전들이 파지촌에  들이닥쳐        시끄럽고 소란하기 군대 점호같구나. 역병에 죽은 시체에 굶어 죽은 시신 뒤섞여    마을에 농부라고는 한 명도 없어           애꿎게 고아, 과부 결박하여         등에다 채찍질, 앞으로 끌고가니      개처럼 욕먹고  닭처럼 몰리어       사람들 행렬이 성(城)까지 이었구나. 그 중에 가난한 선비 한 사람       가장 수척하고 외로워 보이는데     하늘을 우러러 죄 없음을 호소하는  구슬픈 원망소리 끝없이 이어지네.   하고 싶은 말일랑 감히 못하고     눈물만 비오듯 쏟아지는데         아전 놈 화내며 멍청하다고        욕보여 다른 사람 겁을 주려고      높은 나뭇가지 끝에 거꾸로 매달아    상투를 나무뿌리에 닿게 하고는       “소견없는 놈아 무서운 줄 모르고    네가 감히 상부의 명령을 거역해     글을 읽었으면 의리를 알 터이니       왕세는 서울에다 바쳐야 할 것 아닌가.  너에게 유월까지 말미 준 것만 해도    너를 적잖게 은혜 베푼 일인데         포구에 묵고 있는 큰 배가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     아전 위세 부리는 건 바로 이때라   이리저리 지휘하는 아전들이란.    전라도 아전이 오죽이나 탐학했으면,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조선 3대 폐단 중 하나라고 적었을까. “조선에는 세 가지 커다란 폐단이 있으니 ‘충청도 사대부, 평안도 기생과 전라도 아전이 그것이다’.(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2006, p 60)   
    • 기획.연재
    2020-02-24
  • 다산 정약용 ‘파리를 조문하는 글’을 짓다
    1809년과 1810년(순조 10) 두 해에 걸쳐 전라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 거리에 넘쳤다. 전염병마저 창궐하여 시신(屍身)들이 언덕을 메웠다.     1810년 여름에 정약용은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 조승문)’글을 지었다. 이 때에 파리가 극성하여 온 집안에 득실거리고 점 점 번식하여 산과 골짜기까지 가득하였다. 파리들은 일찍이 동사(凍死)하지 않더니 술집과 떡 가게에 구름처럼 몰려들고 윙윙거 리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라 하고, 소년들은 소탕전을 폈다. 그리하여 혹은 대나무 통발통을 설치하여 거기에 걸려 죽게 하고, 혹은 독약을 쳐서 약 기운에 마취되어 전멸하게 하였다.  이에 다산이 말하였다. “아! 이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굶주려 죽은 자의 변신이다. 아! 기구하게 사는 생명이다. 애처롭게도 지난해 큰 기 근을 겪고 또 겨울의 혹한을 겪었다. 그로 인해서 염병이 돌게 되었고 게다가 또 다시 가혹한 징수까지 당하여 수많은 시체가 길 에 즐비하였고, 그 시체를 버린 들것은 언덕을 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는 시체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그 피부가 썩어 문드러져 옛 추깃물과 새 추깃물이 고여 엉겨서 그것이 변해 구더기가 되어 항하(恒河)의 모래보다도 만 배나 많았는데, 아! 이 구더기가 날개를 가진 파리로 변해 민가로 날아 드는 것이다.  아! 파리가 어찌 우리의 유(類)가 아니랴.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만들어 널리 청해와 모이게 하자. 서로 기별해 모여서 함께 먹도록 하자.” 이어서 다산은 ‘파리를 조문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 “파리야, 날아와서 이 음식 소반에 모여라. 소북이 담은 흰 쌀밥에 국도 간 맞춰 끓여 놓았고, 무르익은 술과 단술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도 겸하였으니, 그대의 마른 목구멍과 그대의 타는 창자를 축이라. 파리야, 날아와 훌쩍훌쩍 울지만 말고 너의 부모와 처자를 모두 거느리고 와서 여한 없이 실컷 먹어라. 그대의 옛집을 보니, 쑥 대가 가득하고 뜰은 무너지고 벽과 문짝도 그러졌는데, 밤에는 박쥐가 날고 낮에는 여우가 운다. 또 그대의 옛 밭을 보니 가라지 만 길게 자랐다. 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가 되었다. 파리야, 날아와 이 기름진 고깃덩이에 앉아라. 살진 소 다리와 초장에 파도 쪄놓고, 농어 생선회도 갖추어 놓았으니, 그대의 굶 주린 창자를 채우고 얼굴을 활짝 펴라. 그리고 또 도마에 남은 고기가 있으니 그대의 무리에게 먹이라. 그대의 시체를 보니 이리저리 언덕 위에 넘어져 있는데, 옷도 못 입고 모두 거적에 싸여 있다. 장맛비가 내리고 날씨가 더워지자 모두 이물(異物)로 변하여, 꿈틀꿈틀 어지러이 구물거리면서 옆구리에 차고 넘쳐 콧구멍까지 가득하다. 이에 허물을 벗고 변신하 여 구속에서 벗어나고, 송장만 길가에 있어 행인이 놀라곤 한다. 그래도 어린아이는 어미 가슴이라고 파고들어 그 젖통을 물고 있다. 마을에서 그 썩는 시체를 묻지 않아 산에는 무덤이 없고, 그저 움푹 파인 구렁 창을 채워 잡초가 무성하다. 이리가 와 뜯 어 먹으며 좋아 날뛰는데, 구멍이 뻐끔뻐끔한 해골만이 나뒹군다. 그대는 이미 나비 되어 날고 번데기만 남겨 놓았구나.” 썩은 시체는 묻지 않아 길가에 나둥그러져 있고 파리는 휘날린다.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다산의 조문은 계속된다. “파리야, 날아서 고을[縣]로 들어가지 마라. 굶주린 사람만 엄격히 가리는데 서리(胥吏)가 붓대 잡고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대 나무처럼 빽빽이 늘어선 사람 중에 다행히 간택된다 하여도 물 같이 멀건 죽 한 모금 얻어 마시면 그만이다. 그런데 묵은 곡식에 서 생긴 쌀벌레는 위아래로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돼지처럼 살찐 건 위세 부리는 아전들인데 서로 부동하여 공로를 아뢰면 가상히 여겨 견책하지 않는다. 보리만 익으면 진장(賑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 구호소)을 거두고 연회를 베푸는데, 북소리와 피리소리 요란하며, 아리따운 기생들 은 춤추며 빙빙 돌고 교태를 부리면서 비단부채로 가린다. 비록 풍성한 음식이 있어도 그대는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단다. 파리야, 날아서 관(館)으로 들어가지 마라. 깃대와 창대가 삼엄하게 나열하여 꽂혀 있다. 돼지고기, 쇠고기 국이 푹 물러 소담하 고 메추리구이와 붕어 지짐에 오리국, 그리고 꽃무늬 아름다운 약과를 실컷 먹고  즐기며 어루만지고 구경하지만 즐기지만, 큰 부채를 흔들어 날리므로 그대는 엿볼 수도 없단다. 호랑이 같은 문지기는 철통같이 막아서서 애처로운 호소를 물리치면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한다. 안에선 조용히 앉아 음식 먹 으며 즐기고 있고 아전 놈은 주막에 앉아 제멋대로 판결하면서 역마를 달려 백성들이 잘 있다고 보고하면서, 길에는 굶주린 사람 없고 태평하여 걱정이 없다고 한다. 파리야, 날아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지 말라. 지각없이 영원토록 흔흔한 그대를 축하한다. 죽어도 앙화(殃禍)는 남아 형제에게 미치게 되니, 6월에 벌써 조세를 독촉하는 아전이 문을 두드리는데, 그 호령은 사자의 울음 같아 산악(山岳)을 뒤흔든다. 가마와 솥도 빼앗아가고 송아지와 돼지도 끌어간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관가로 끌고가서 볼기를 치는데 그 매를 맞고 돌아오면 기진맥진 하여 염병에 걸려서 풀 쓰러지듯 죽어 가지만, 천지 사방 어느 곳에도 호소할 데가 없고 백성이 모두 사지에 놓여도 슬퍼할 수가 없다. 어진 이는 위축되어 있고 뭇 소인배가 날뛰니 봉황은 입을 다물고 까마귀가 짖어대는 격이다. 파리야, 날아가려거든 북쪽으로 날아가라, 북쪽 천리를 날아가 구중궁궐에 가서 그대의 충정(衷情)을 호소하고 그 깊은 슬픔을 진달하라. 천둥벼락같이 울려 하늘의 위엄을 감격시키면 곡식도 잘되어 풍년을 이룰 것이다. 파리야, 그 때에 남쪽으로 날아오라 .” 이렇듯 다산은 백성들의 참상에 마음 아파하면서 부패한 관료와 아전을 질타했다. 1818년 봄에 다산초당에서 다산은 『목민심서』를 완성했다. 그는  「이전(吏典)」 ‘아전을 다스림(束吏)’에서 이렇게 적었다.   “백성은 토지로 논밭을 삼지만,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을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징수하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어서 당연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 기획.연재
    2020-02-10
  • 승냥이와 이리 같은 수령과 아전을 비판하다
    1810년에 다산이 지은 「전간기사」 6수 중 제5수는 ‘승냥이와 이리(시랑(豺狼)’이다. 정약용은 원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시랑(豺狼)은 백성들의 이산(離散)을 슬퍼한 시다. 남쪽에 두 마을이 있는데 하나는 용촌(龍村)이고 또 하나는 봉촌(鳳村)인데, 용촌에는 갑이라는 자가, 봉촌에는 을이라는 자가 살고 있었는데 서로 장난삼아 때린 끝에 을이  병들어 죽었다. 두 마을 사람들은 관청의 검시(檢屍)가 두려워서 갑에게 자살 할 것을 권했더니 갑은 그것을 흔연히 자기 목숨을 끊어 마을을 평안하게 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에 아전들이 이를 알고 두 마을의 죄상을 캐면서 돈 3만 냥을 토색질 해 갔다. 두 마을은 그것을 마련하느라 베 한 치, 곡식 한 톨도  남은 것이 없어 그 지독함이 흉년보다 더했다. 그리하여 아전들이 돌아가는 날 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떠나고 오직 어느 부인이 혼자 남아 현령(縣令)에게 그 사정을 호소했더니, 현령이 하는 말이 “네가 나가서 찾아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승냥이여, 이리여!          우리 송아지 이미 채갔으니  우리 양일랑 물지 말라     장롱엔 속옷 없고        시렁엔 치마도 없다.      항아리엔 남은 소금도 없고   쌀독엔 남은 식량도 없단다.  큰 솥 작은 솥 다 앗아가고  숟가락 젓가락 다 가져간 놈  도둑놈도 아니면서           왜 그리 못된 짓만 하느냐 사람 죽인 자는 죽었는데  또 누굴 죽이려느냐.      도둑도 아닌데 누가 숟가락, 젓가락까지 다 가져갔는가? 이것을 가져 갈 사람은 관아 사람들이다. 이미 사람 죽인 자는 죽었는데 마을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관아에서 백성들의 모든 것을 가져갔으니 어이가 없다. 수령과 아전의 토색질이 여실히 드러난다. 수령이 이리라면 아전은 승냥이다. 시는 이어진다. 이리야, 승냥이야 !       삽살개 이미 잡아갔으니  닭일랑 잡아가지 말라    내 자식은  이미 팔았지만  내 아내야 누가 사가랴     내 살가죽을  네가 벗기고  내 뼈까지 부순 네놈       우리의 논밭을 바라 보아라.    그 얼마나 크나큰 슬픔이더냐. 가라지 풀도 나지 않는데     쑥인들 있겠느냐.            사람 죽인 자는 이미 죽었는데  또 누굴 해치려느냐.           백성들은 관아의 처사를 원망한다. 검시 안 한 것을 이유로 두 마을을 초토화시켰으니 이런 도둑들이 어디 있을까?     다산은 『목민심서』 <이전(吏典) 6조>에서 ‘아전 단속’을 강조했다. “백성은 토지로 논밭을 삼지만,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것을 경작(耕作)하는 일로 여기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이것이 버릇이 되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승냥이여 호랑이여!  말한 들 무엇 하리.   금수  같은 놈들이여 나무란들 무엇하리.   부모가 있다지만      역시 믿을 수가 없네.  달려가 호소도 해보았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네. 우리 전답을 바라보라 그 얼마나 참혹한가. 백성들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시궁창 구덩이를 가득 메우네. 아버지여,  어머니여!    고량진미 먹으면서       방에 기생까지 두고 있는데 그 얼굴 연꽃 봉오리 같네. 아전들은 백성을 트집잡아 유랑민으로 만들어 놓고 기생까지 끼고 고량진미를 먹고 있다. 분노가 치민다.  「전간기사」 6수 중 마지막 시는 ‘오누이’다. ‘오누이(有兒)’는 1809년부터 1810년까지 2년 내리 흉년이 들어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어머니는 자식을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지은 시이다. 일곱 살 난 계집아이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시를 읽어보자 오누리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네.      누이는 묶은 머리, 동생은 쌍상투     누이는 이제 겨우 말 배우고        묶은 머리 동생은 머리만 더벅더벅  어미 잃고 울면서               갈림길에서 헤매네.          애들을 붙들고 까닭을  물었더니 목이 메어 더듬는 말이           “ 아버지는 집 떠나고                 어머니는 짝 잃은 새가 되었는데  쌀독이 바닥나서                사흘을 굶었네요.              엄마하고 나하고 흐느껴 울어    눈물 콧물 구 빰에 얼룩졌네요.   동생은 젖 달라고 울지만        엄마 젖은 이미 말라붙었지요.    우리 엄마 내 손을 잡고       젖먹이 저 애와 함께           저기 저 산촌 마을 돌아다니며   구걸해서 우리를 먹었다오.     어촌 장에 이르러서는       엿도 사서 먹였는데          길 너머로 데려와서                 어미 사슴 새끼 품듯 껴안고 재워서  아이는 포근히 잠이 들고        나도 죽은 듯 잠들었는데        잠이 깨어 이리저리 살펴보니  어머닌 여기에 없었답니다.”  이렇게 말하다가  또 울다가 눈물 콧물이 범벅이네      해 지고 어두워지면        뭇 새들도 자기 집 찾건만. 떠도는  두 남매        찾아갈 집이 없네.       불쌍하다. 이 백성들      천륜마저 다 잃었구나.   부부 사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어미도 제 자식 돌보지 못하네.    옛날 내가 암행하던       그 해가 갑인년이었는데  정조 임금은 1794년(갑인년) 10월28일에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경기북부 지역 4개 고을을 암행하도록 했다. 그 지역은 적성(파주시), 연천(연천군), 삭녕 · 마전(두 곳은 북한지역)이었다. 정약용은 곧바로 현장에 가서 샅샅이 민정을 살피고 11월15일에 정조에게 복명했다. 그는 적성 현감 이세윤과 마전군수 남이범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복명하면서, 연천 전 현감 김양직과 삭녕 전 군수 강명길의 탐학스런 행위를 고발했다.  김양직은 궁중의 어의(御醫)로 권세가 막강했고, 강명길은 임금 가족 묏자리를 잡는 지관(地官)으로 왕실과의 끈을 이용해 토색질을 했다. 하지만 그간 암행어사의 처벌 요구가 있었지만 대신들이 가로막고 이들을 옹호했다. 다산은 이들을 처벌하라고 강력하게 정조에게 보고했다.(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2003, P 173-180) 임금님 당부가 고아들을 보살펴 고생 없이 하라고 부탁했건만   모든 목민관들은              감히 그 분부 어기지 말아야지 흉년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안타깝게도, 흉년에는 천륜도 인륜도 다 무시된다. 그런데 『전간기사』 6수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들로부터 시를 얻어 읽어본 이백진이  경상도 김해에서 귀양 사는 사촌 아우 이학규에게 편지와 함께 시를 필사하여 보냈다. 이백진은 편지에서 “정약용은 당대의 사백이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깨우치는 뜻이 있다. 두보의 수노별(垂老? 병사로 나가는 노인의 할멈과의 이별)· 무가별(無家? 가족도 없는 고향과의 이별) 이후 이런 시는 없었다.”고 썼다. 다산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은 이학규는 1810년에 『己庚紀事(기경기사)』를 완성했다.  이학규는 정약용과 가까이 지내던 후배로 그 역시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1801년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2014, p 470)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20-01-29
  • 다산 정약용, 전간기사 6수를 짓다
    1810년에 다산 정약용은 전간기사(田間紀事) 6편을 지었다. 즉 다북쑥, 뽑히는 모, 메밀, 보리죽, 승냥이와 이리, 오누이 시이다.전간기사 6편에는 다산의 서문이 적혀 있다. “기사년(1809년)에 나는 다산초당에 머물고 있었다.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어 지난 해 겨울부터 봄을 거쳐 금년 입추에 이르기까지 붉은 땅이 천리에 연했다.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고 6월초에는  유랑민들이 길을 메워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참상이어서 살 의욕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나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몸이라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는 처지이기에 오매초(烏昧草)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은대(銀臺)의   그림 한 장도 바칠 수 없었다.그래서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로 적었다. 그것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와 더불어 풀밭에서 슬피 우는 것과 같은 시들이지만, 성정(性情)의 올바른 것을 구해서 화기(和氣)를 잃지 않으려 했다. 오랫동안 써 모은 것이 몇 편 되기에 ‘전간기사(田間紀事)’라 이름하였다.”여기에서 오매초는 고사리의 이칭(異稱)이고, 은대(銀臺)는  신선이 사는 곳인데, 모두 백성의 굶주림과 관련 있다. 그러면 전간기사 제1수 ‘다북쑥’ (채호)을 음미해보자.다산은 원주(原註)에서 이렇게 적었다. “다북쑥은 흉년을 슬퍼한 시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들이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1.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양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등성이 오르니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붉은 머리 숙이고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눈물만 쏟아지네.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다북쑥만이 자라서               무더기를 이뤘기에             말리고 또 말리고           데치고 소금 절여          된 죽 묽은 죽 쑤어 먹지달리 또 무엇하리.       2.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네.           명아주도 비름나물 다 시들었고     자귀나물은 떡잎은 나지도 않아    풀도 나무도 다 타고샘물까지도 말랐네. 논에도 우렁이 없고바다엔 조개도 없다네. 높은 분네들 살펴보지도 않고기근이다 기근이다 말만 하면서 가을이면 다 죽을 판인데봄이 와야 구휼이네 유랑 걸식 떠난 남편그 누가 묻어줄까 오호라 하늘이여어찌 그리도 무정하시나이까. 3.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캐다가 보면 들쑥도 캐고 캐다가 보면 쑥 비슷한 것도 캐고캐다가 보면 다북쑥을 캐네. 푸른 쑥이랑 흰 쑥이랑미나리 싹까지 무엇을 가릴 것인가모두 캐도 모자란데 그것을 뽑고 뽑아바구니에 쓸어 담고 돌아와서 죽을 쑤니아귀다툼 벌어졌네. 형제간에 서로 뺏어온 집안이 떠들썩하네. 서로 원망하고 욕하는 꼴들이마치 올빼미들 같네.  여기서 올빼미란 아귀다툼하는 간악한 사람을 비유한다. 하기야 배고프면 나만 살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닌가.전간기사 제2수는 ‘뽑히는 모(拔苗)’이다. 다산은 이렇게 적었다. “모가 말라 모내기를 할 수 없게 되자 농부들은 그것을 뽑아 버리는데, 모를 뽑으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온 들판에 가득했다. 어떤 아낙네는 너무 억울해서, 자식 하나를 죽여서라도 비 한 번 쏟아지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벼 싹이 나올 때면         연한 녹색에 짙은 황색     한 폭의 비단같이        푸른빛 은은하네.         어린 자식 보살피듯         아침저녁 돌보아서         주옥처럼 보물로 여겨      보기만 해도 흐뭇했네.     쑥대머리 한 여인이   논바닥에  주저앉아  방성통곡을 하면서       저 하늘 향해 호소하네.   차마 어이 정을 딱 끊고  이 벼 싹 다 뽑다니     오뉴월 한여름에         슬픈 바람이 쓸쓸하네.   우거진 나의  모를       내 손으로 다 뽑다니    무성한 나의  모를 내 손으로 죽이다니 우거진 나의  모를   잡초처럼 뽑아내고   총총한 나의  모를 화톳불 놓듯 태우다니   뽑아서 묶어서저 웅덩이에 두었다가 행여 비가 내리면 고인 물에나  꽂아볼까 내 자식 셋이 있어  젖도 먹고 밥도 먹는데 그 중 하나를 죽여서라도이 어린 모 살렸으면 이어서 전간기사 제3수는 메밀이다. 메밀은 현령(縣令)을 풍자한 시다. 조정에서는 메밀종자를 나누어 주도록 영을 내렸는데도 현령은 그 영은 따르지 않고 백성들에게 메밀만 심으라고  독촉만 한다.  넓고 넓은 논에 먼지만 풀풀 날리는데 어린 볏모 뽑아버리고 메밀 대신 심으라네. 집안에 없는 메밀 시장에 가도 살 수 없어 주옥은 구할지라도 메밀 종자 살 수가 없네. 현령이 통첩을 내려 ‘메밀종자 걱정 말라 내 장차 너희 위해 감영 통해서 구해주마’ 우리는 그 말만 믿고 논 갈아엎었는데 메밀은 주지 않고 우리들만 독촉하면서 “메밀 심지 않으면  나는 벌을 내리리니 흰 몽둥이 붉은 곤장에 너의 살점 떨어지리.”오호라  하늘이시여 왜 이다지 못 살피시나요. 메밀이나마 심지 않으면우리는 살 길이 없는데 우리 탓만 하며 호령이 벽력같네. 고기 쌀죽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벌 줄 것인가 메밀종자 주라는  나라 분부 내렸건만 그 분부는 안 따르고 우리 임금을 속이다니 조정에선 메밀 종자 나누어주라고 영을 내렸건만 현령은 종자는 안 나누어주고 메밀 심으라고 백성만 들볶고 있다. 이게 나라인가?    한편 전간기사 제4수는 보리죽이다. 다산은 원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거 역시 흉년 걱정이다. 가을 추수 가망이 없어 부잣집들도 모두 보리죽을 먹는 형편이고,  신세가 고단한 자들은 보리죽도 먹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앞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리죽을 먹고 있었는데, 나도 가져다 먹어보았더니 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되어 먹고 나면 속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동쪽 집이 들들들   서쪽 집도 들들들   보리 볶아 죽 쑤려고  맷돌소리 요란하네.   체로도 치지 않고     기울도 까불지 않고   그대로 죽을 쑤어     주린 창자 채운지만   썩은 트림 신트림에 눈앞이 어질어질     해도 달도 빛을 잃고 천지가 빙빙 돈다네.  아침에도 보리죽 한 모금   저녁에도 보리죽 한 모금    이것마저 잇기 어려운데     배부르기 바랄쏜가.   있는 물건 모두 팔아     보리를 사려 해도         내 물건은 팔리지 않아   기와조각 자갈이요     파는 곡식은 날개 돋쳐  옥 같고 구슬 같네.   보릿자루 하나 나면         모여든 자 수 백 명 이네. 내 보기엔 보리죽도     마을에서  부자나 먹네. 으리으리한 집에다가  정원 수목 우거져서    소나무 대나무에     감나무에 돌밤나무 옷걸이엔 명주옷   찬장에는 놋그릇   외양간에는  소 누웠고홰에서는 닭이 자고   말 잘하고 권력도 있고  수염도 멋지더라.      극심한 가뭄에도 부자들은 보리죽이라도 먹는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보리죽도 못 먹는 신세이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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