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1-28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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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나주 금성관 은행나무
      1894년 음력 7월 초하루, 광주지역 5천 동학농민군을 이끄는 최경선이 나주 금안리에 진을 쳤다. 7월 5일 어둠이 내리는 시각 나주 접주 오권선과 함께 나주 관아의 서쪽 성문인 서성문을 공격했다. 하지만 나주 목사 민종렬과 수성군 도통장 정석진이 이를 잘 막아냈다.8월 13일, 전봉준은 수하 10여 명과 함께 민종렬과 담판을 하기 위해 나주 관아로 들어갔다. 하지만 목사 내아인 금학헌에서의 회담은 결렬되었고, 전봉준은 객사인 금성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옷 세탁을 핑계로 사지를 벗어났다. 10월 18일, 조정은 관군과 일본군을 파견하며 호남초토영을 나주에 설치하고 민종렬을 초토사로 임명했다.11월 23일이다. 수만의 농민군은 나주 금안리의 진을 나와 북망문 쪽 함박산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농민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했다. 이틀 뒤인 11월 25일, 농민군은 금구와 원평, 태인 전투에서도 연이어 무너졌다, 12월 2일, 피신 길에 오른 전봉준은 순창 피로리(避老里)에서 피체되었다. 그리고 호남초토영이 있는 나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되었다.나주는 천년을 넘어 역사의 고을이다. 이곳엔 영산강을 사이로 특이한 역사가 있다. 영산강 아래쪽이 마한일 때 위쪽은 백제였다. 아래쪽이 후백제일 때, 위쪽은 고려였다. 삼별초군과 동학군도 영산강 아래쪽에서는 기세를 올렸으나 나주성은 점령치 못했다. 특별한 편 가름은 아니지만, 고대사회에서 강이 위아래 고을의 소통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비단 고을 나주(羅州)는 호남의 중심 고을이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합친 말이다. 또 전라는 동서남북 온 세상을 아우른다는 뜻이니, 나주는 온 세상을 덮어주는 비단 자락이다. 그렇게 나주는 차령과 금강 이남의 웅도이자 수도였고, 앞으로도 그리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903년, 금성(나주)에 첫발을 디딘 왕건은 고려를 개국했고, 천여 년 뒤인 1894년에 온 전봉준은 동학혁명의 영웅이다. 하지만 1980년 나주를 다녀간 전두환은 치욕의 인물이다.나주는 삼한 시대에 마한의 54개국 중 불미국으로 추정되며, 목사 고을이 된 것은 983년 고려 성종 2년이다, 이 나주를 대원군이 결불여나주(結不如羅州)라고 평했다. 경지 면적 넓기는 나주만 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런 해석도 할 수 있다. 경지가 넓으니 수확량도 많고, 거둬들이는 세금도 많으니, 비리나 수탈도 함께 정비례했을 거다. 평안감사와 과천 현감, 나주 목사는 조선 시대 벼슬아치들의 1순위 선망처였다. 그러니 금성관 객사에는 선정비, 공적비가 즐비하다.그중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가 있다. 영산포 도내기샘의 처자 ‘나합’이 김좌근을 움직여 나주의 기근에 구휼미를 실어 보낸 데 대한 보은의 비다. 하지만 안동김씨의 세도가 끝나고 두 동강이 났던 걸 다시 붙여 금성관 경내에 세웠다.또 하나 눈에 띄는 비는 나주 수성군들이 동학농민군들을 물리친 내용을 기술한 ‘금성토평비’다. 그리고 전라관찰사 윤웅렬의 ‘창덕애민비’에는 1910년 일제의 남작 작위를 받은 민족반역자라는 표지판이 함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 30여 기의 비석은 역사의 굴곡과 백성의 애환이 서린 이정표이기도 하다.아무튼, 이를 700년 가까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나무가 금성관 뒤뜰의 은행나무이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야 못 봤겠지만, 두 왕조의 흥망성쇠, 전란과 민란, 동학혁명과 나주학생독립운동 등 근현대 역사를 품고 있는 나무이다. 그러니 이 노거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저 도도히 흐르는 역사라는 물줄기에 한 점 티끌의 오욕이 되면 안 되겠구나 한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1-25
  • 황제 고종, 절대권력을 행사하다
    # 매관매직이 풍습인 대한제국 o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본 조선의 정세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이 탄생했지만 매관매직은 여전했다. 흡혈귀 같은 관료의 수탈은 대한제국 시대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먼저 1898년 1월 11일에 일본 도쿄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외교관이 수집한 조선의 정세에 대하여 살펴보자. (한국엔 공사관이 없었다)“이 나라의 한탄스러운 상황은 무엇보다도 비양심적이고 부패한 관료  계층에 그 원인이 있다. 관료들은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보잘것 없는 곡물만을 받기 때문에 마치 흡혈귀처럼 민중의 피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이 나라에서는 거의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민중은 계속 비참한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관료들에 의한 철면피한 강탈체계가 폐지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조선의 새날이 밝아 올 것이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2020, p 253) o 주한프랑스 공사의 보고서 1899년 3월 25일에 주한프랑스공사 플랑시는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 했다.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사례금이 높아진 관직 매매입니다. 실제로 아무리 낮은 관직이라 해도 4000 피아스트르를 지불해야 한다고 최근 언론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가장 인기를 끄는 관직은 지방 수령입니다.최근 관직매매 소문이 점점 확산되어 의정부 참정(총리) 심상훈은 내부대신에게 이 같은 관행이 대한제국의 명성에 먹칠을 한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그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는데 내부대신이 황실에서 내린 명령을 집행하는 인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신들은 참정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그런데 황제는 내각의 태도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판단해 내부대신에게 10년 유배형을 내리고 심상훈은 15년 유배에 처했고, 다른 대신들은 파면에 처했습니다. 이 같은 느닷없는 조치로 인해 박제순 외부대신도 파면당했고, 후임으로 이도재가 임시서리로 임명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대사자료집성 19권 프랑스 외무부 문서 9 대한제국 Ⅱ·1899~1901 > 대한제국의 대외 정책과 주재 외국인 1899~1901 2권> 【3】 독립협회 현황과 관직 매매)한편 1899년 3월 15일의 ‘고종실록’에는 “심상훈이 군수 100명을 전보시킨 내부대신의 파면을 요청하자 고종은 의정부 여러 신하도 견책했다”고 적혀 있고, 3월 24일의 실록에는 “죄인 민병한은 10년간 황주군 철도(鐵島)에, 죄인 심상훈은 15년간 지도군(智島郡) 고군산에 유배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o 샌즈의 비망록 1899년 10월에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 샌즈가 궁내부 고문관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러·일 양국의 대립에서 벗어나 스위스처럼 영세 중립국이 되려면 내정개혁이 급선무라고 정부 고관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샌즈의 개혁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궁내부 관리들부터 부패했다. 특히 영친왕의 친모인 엄귀비는 샌즈의 개혁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샌즈는 1930년에 발간한 ‘조선비망록’에서 이렇게 회상했다.“지금도 관직 임용에 뇌물 수수 관행이 너무 심해 이를 직업으로 삼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어떤 지방 관직을 얻는데 필요한 뇌물 준비금을 토지와 농산물 거래 때의 통상적인 이자인 월 12%로 후보자에게 빌려주고 공직을 얻은 뒤 짧은 기간 내에 되받아 냈다. 뇌물은 황제에게까지 올라가는 데 조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뇌물을 그렇게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땅과 백성은 황제가 바라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곧 국가이다. 관리들은 황제의 징세 청부업자일 뿐이다. 지방행정도 부패했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샌즈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비망록, 2019, p127~128) o 청나라 공사 서수붕의 비웃음 1900년 12월에 청나라 공사 서수붕은 귀국하면서 고종의 매관매직을 비웃었다.“서수붕이 처음 고종을 뵈었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고종이 의아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본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가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귀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나 되었는데도 제위(帝位)가 아직 편안하니 기수가 왕성하지 않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고종은 크게 웃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말했다.‘불쌍하구나, 대한의 백성들이여’.”(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2006, p 282) #. 고종 황제, 재정권과 군권 · 인사권을 장악하다.  고종은 황제권 강화를 위해 재정권과 군권(軍權), 인사권을 무소불위로 휘둘렀다. 1898년 이후에 고종은 궁내부를 대폭 확대했다. 1894년 갑오개혁기에 관원이 163명이던 것이 1903년 말에는 470여 명으로 급증했고, 내장원(內藏院), 예식원, 철도원, 통신원 등 여러 기관이 신설됐다.   이들 신설기구는 기존의 탁지부, 외부, 농상공부 등이 관장했던 재원이나 업무를 가져갔다. 탁지부가 관장하던 화폐주조권, 홍삼 전매권, 역둔토 소작료 징수권, 상업세·어세 · 염세 등 허다한 재원들이 내장원으로 이관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부 재정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심지어 탁지부는 관원 봉급 재원도 부족하여 결세를 담보로 내장원으로부터 대규모  재정 자금을 차입하기도 했다. 고종황제의 금고인 내장원이 정부를 상대로 이자놀이를 한 것이다.  이후 내장원은 탁지부 대출금 환수를 위해 각 지방에 봉세관을 파견하여 결세를 직접 징수했는데,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원성(怨聲)의 표적이 되었다. 그 예로 1901년에 일어난 ‘제주민란(‘신축교안’, ‘이재수의 난’으로도 불림)은 봉세관이 과중한 과세를 강압적으로 징수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더구나 1900년 이후에 내장원으로 이관된 전환국은 황제의 의향에 맞춰 백동화를 대량 주조하여 ‘황제의 전환국’이 되었다. 백동화 대량발행은 물가를 폭등시켜 1904년의 물가는 1894년보다 3-5배 치솟았다. 또한 고종은 예식원을 신설하여 외교 업무를 맡김으로써 외교 업무도 외부와 예식원으로 이원화시켰다. 농상공부 산하 기관이었던 전보사,우체사, 철도사 및 광산 관리기능도 궁내부에 신설된 통신원, 철도원, 광학국으로 이관되었다.  아울러 고종은 군권(軍權)을 직접 장악했다. 고종은 1899년 6월에 원수부를 설치하고 황제가 대원수를 겸임하고 황제를 호위하는 부대인 시위대(侍衛隊)와 지방 진위대(鎭衛隊)를 증강해 배치했다. 한편 군부 예산은 지나치게 많았다. 1901년에는 정부 예산 중 44.8%에 이르렀고 1904년에 이르기까지 40%에 달했다.  고종은 인사권도 마구 휘둘렀다. ‘회전문 인사’를 자주 한 것이다. 1899년에 ‘대한국 국제’를 선포한 이후부터 1907년까지 군부대신의 임용기간은 길게는 14개월, 짧게는 2일이었다. 이들은 9년 동안 34명이 교체됨으로써 재직기간은 평균 96.6일이었다. (장영숙 지음, 고종의 인사정책과 리더십, 2020, p 338)이렇게 고종 황제는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했던 프랑스 루이 14세나 러시아의 짜르처럼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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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3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화순 고사정 의병청 회화나무
      ‘의병’이 무엇이냐? 정유재란(1597) 대책을 논하며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궁금했다. 왜는 성주가 항복하면 백성들도 복종했기에 의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 각처의 방백을 죽이고, 심지어 왕이 도망갔는데도 들불처럼 일어나는 의병은 이해불가였고, 뒤가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당시 곽재우와 의병총대장 김덕령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남쪽전선은 왜와 의병의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나라가 위기일 때 농민, 어민, 노비, 중인, 사림, 퇴직 관료, 장병 등 다양한 계층을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인 것은 ‘의병청’이었다.화순 만연산에서 흘러온 만연천과 삼천이 만든 삼천리(화순읍 상삼2길 31)의 의병청지(址)는 호남 의병군을 이끌었던 역사의 터이고 금산, 무주, 진주 전투 등의 승전 토대가 된 곳이다.여기 의병청지는 해주 최씨인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삼형제가 주역이다. 임진왜란에 삼형제는 의병청을 설치하고 병사, 전마, 군량을 모았다. 최경운의 아들 최홍재는 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 참여했다. 최경회는 금산전투에 참여했던 의병을 이끌고 전북 장수로 나아가 왜를 무찔렀다. 무주 우지치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후꾸시마 마사나리를 활로 쏘아 죽이고 ‘언월도’를 노획했다. 이 언월도는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오동나무꽃 문장이 새겨진 보물급 칼이다. 또 이때 왜장의 품에서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와 ‘고려청자’까지 되찾았다.또 최경회는 진주성에서 왜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 황진, 고종후 등과 함께 9일 밤낮을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때 최경회를 따라 종군하던 주논개는 남편의 순절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남강으로 유인하여 투신 순절하였다.선조는 최경회의 형인 최경장을 ‘계의병대장(繼義兵大將)’으로 임명하였다. 장남인 최경운은 500여 의병을 이끌고 화순의 오성산성을 지키다 1597년 순절했다. 1782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화순 현감이 올린 ‘오성산최경운전망유허도(烏城山崔慶雲戰亡遺墟圖)’가 그때의 기록이다.이들 해주 최씨 삼형제와 의병청지를 기리는 곳이 의병청지인 고사정이다. 이 고사정은 1678년(숙중 4)에 삼형제의 둘째인 최경장의 아들로 칠곡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최후헌이 지었다. 고사정은 선조가 칭송한 남쪽 고을의 높은 선비라는 뜻의 ‘남주고사(南州高士)’에서 유래한다.여기에 수령 200여 년의 회화나무가 있다. 이 회화나무는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가 나오며 잡귀신이 범접을 못 한다는 길상목(吉祥木)으로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일제강점기 때이다. 왜의 헌병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언월도’를 내놓으라고 최씨 가문의 종손 상투를 회화나무 가지에 묶어놓고 사흘을 고문했다. 하나 종손은 꿋꿋이 버티며 끝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6·25 때 경찰이 언월도와 청산백운도, 고려청자를 가져갔다. 언월도가 불법무기라는 명목이었고. 이 언월도를 경찰서 난로의 조개탄 쑤시개로까지 썼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으로 언월도는 되찾았으나, 청산백운도와 고려청자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또 여기 고사정 앞에는 의병청지의 수천 명 의병이 마시던 우물이 있다. 당시에는 우물이 세 개였으나 지금은 하나만 남았다. 최경운 의병대장의 호인 삼천, 그 세 우물은 이곳 삼천리의 지명이기도 하다. 또 여기 고사정은 계의병대장인 최경장의 후손이 지키고 있다.‘상투를 묶었던 가지는 아버님이 보기 싫다고 잘라 버렸지요.’최현신 종손의 말에 다시 올려다보는 회화나무에 햇살이 빛나고 흰구름 한 조각이 걸려있다. 어찌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졸렬한 자들이 조선 선비의 기개와 의기를 깨닫으랴?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세 분이 이끈 의병청의 의기가 문득 삼천의 샘물로 솟구친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1-18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진도 굴포리 윤선도 소나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는 진도의 남서쪽이다. 여기에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가 있으니, 원둑이라고 하는 굴포리 간척지의 윤선도 제방이다.윤선도가 60세 때인 1646년이다. 이 무렵 인조 때 전라도관찰사,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윤선도 역시 이 무렵 진도에서 ‘화이정승 삼수(和李政丞 三首)’라는 시에 ‘이경여(李敬輿)가 진도에 있는 병술년(1646)’이라 썼다. 이를 근거로 여기 간척지 축조 시기를 윤선도가 완도 보길도와 진도를 오가던 1640년부터 1660년 사이로 추정한다. 또 1646년 무렵 윤선도는 이곳 굴포리 처자 경주 설씨와 혼인했고, 1남 2녀를 낳았다.그렇게 윤선도는 간척사업을 통해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130여 정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여 정보의 갯벌을 농토로 만들어 주민을 돕고 부를 축적했다.윤선도의 이러한 개척정신과 간척사업은 조상에게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조부 윤의중은 장흥, 강진, 해남, 진도 등지의 해안에 방죽답인 언전(堰田)이 많았다. 또 그의 후손에게도 이어져 증손으로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는 해남 현산면 백포만에 간척지와 염전을 만들어 가뭄에 시달리는 주민을 도왔다. 또 윤두수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간척사업을 위한 방조제 및 배수문 축조 방법’을 썼고, 수원성 설계와 축조를 주도했다.그렇게 1235년 몽골의 침입에 방어용 연안 제방을 시초로 하여 이루어진 간척사업이 조선 시기로 이어졌는데, 민간 간척사업을 선도한 집안이 윤선도 일가였다.윤선도가 이곳 굴포리에 원둑을 쌓을 때의 일화가 전설처럼 있다. 윤선도는 이곳 사람들과 함께 제방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큰 파도에 쉽게 무너져버렸다. 다시 쌓으면 무너지고 쌓으면 또다시 무너져서 깊은 시름에 빠졌다.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제방을 쌓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갔다. 꿈을 깬 윤선도가 제방을 쌓는 곳으로 가보니 꿈속의 구렁이가 기어가던 자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있었다. 윤선도는 뱀이 지나간 형상으로 석축을 쌓도록 했고 그 뒤부터 둑은 무너지지 않았다.당시만 해도 진도는 쌀이 귀했다.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 쌀 한 말을 먹었으면 부잣집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쌀은 곧 금이었다. 따라서 굴포리 간척지는 여기 사람들에게 그 귀한 하얀 금을 먹게 해 주었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곳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고산사와 굴포신당에 윤선도의 신위와 당신인 할머니 신위를 모시고 정월 대보름에 당제를 지냈다.하지만 그 사당과 신당이 태풍으로 무너진 뒤, 1959년에 삼별초 장군인 배중손 사당이 들어섰다. 그리고 60년 넘게 오랫동안 불편한 동거를 하다가, 2021년에 배종손의 절충사는 용장산성으로 옮겨갔다.이유야 어떻든 이곳 원둑의 윤선도 고산사와 할머니 신당은 그동안 배중손 사당으로 잘 못 알려졌다. 뒤늦게나마 제 자리를 찾았으니, 다행이다. 이를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거나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멈추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바로 세우고 바로 잡아가야 한다. 하지만 한 마디로 ‘역사를 바로 보며 사는 게 참으로 어렵디야’이다.그렇게 제 이름을 되찾은 이곳 고산사의 굴포리 신당을 지키는 소나무 이름은 ‘고산송’이다. 소나무 나이가 250여 살이니 원둑 축조 시기에 윤선도가 심었던 소나무의 아들뻘 나무이다.그동안 우리들이 역사를 잊고 진실을 버려두고 있을 때도, 늘푸른 청정함으로 고산사와 할머니 신당을 꿋꿋이 지켜온 고마운 소나무이다. 새삼 고산송을 우러르다가 깊이 허리 숙인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1-11
  • 독립협회의 근대적 개혁운동 종말 고해
    #. 독립협회 강제 해산    1898년 12월 15일 오후 4시에 중추원이 개원되었다. 의장은 이종건, 부의장은 윤치호였다. 12월 16일 오전 11시에 속개된 중추원은 ‘헌의 6조’와 ‘조칙 5조’의 조속 실시를 촉구했다. 이윽고 독립협회 출신 의관 최정덕은 정부 대신에 임명할 11명을 선발하여 황제가 서용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의결되어 중추원 의관들의 투표에 의하여 11명이 천거되었다. 개혁파로는 민영환·이중하·박정양·한규설·윤치호·김종한·박영효·서재필 8명이고, 수구파로는 민영준·최익현·윤용구 3명이었다.그런데 중추원이 박영효와 서재필을 천거한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박영효는 대역죄인의 죄명을 쓰고 일본에 망명 중이었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의결된 것이라 원안이 확정되었다.중추원의 11명 공천 결의안은 곧 정부에 제출되었다. 이 와중에 내부 주사 이석렬 등 33인이 연명 상소하여 박영효의 소환과 서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내 소장 급진파들인 이건호,현공렴, 이승만, 최정덕 등이 중심이 되어 박영효의 귀국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의 소환 운동은 고종과 수구파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고, 만민공동회에 호의적이었던 일반인의 반발을 샀다.   12월 17일에 수구파 민영기 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진언함에 따라, 고종은 영국·독일·러시아·미국의 공사들을 불러 의견을 타진하였다. 외국의 공사들은 순검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도록 권고하였다. 고종은 순검의 힘이 약하니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킴이 어떠한가를 물었으나, 외국 공사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12월 18일에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가 고종을 단독 면담했다. 고종은 가토에게 “군대로 민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가토는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 초기에 군대로 민회를 제압한 일이 있다”고 답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하였다.일본 공사 가토는 무려 3시간 면담하면서 민회가 처음에는 충군 애국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난민의 부류에 빠져있다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규탄하였다. 고종은 가토의 진언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12월 18일에도 만민공동회는 수구파 관료들의 추방과 개혁정부 수립을 요구하면서 집회를 계속하였다. 이 날 고종은 의정부 찬정 윤웅렬을 경무사에 겸임시켰다. 윤웅렬은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의 부친이었다.     12월 20일에도 만민공동회가 계속되었다. 이날 이승만은 보부상의 주모자는 민영기이니 그의 체포에 은 1천 원의 현상금을 걸자고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또한 만민공동회는 21일에 고등재판소 문 앞에서 보부상 배후 조종자인 전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군부대신 민병석 등 4인을 체포하여 공개 재판에 부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날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박영효 임명을 상소한 이석렬 등을 잡아 진상을 밝히도록 명했다. 강경 대처를 예고한 것이었다. 마침내 고종은 12월 23일에 군대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 시위대(侍衛隊) 제2대대 대대장 김명제는 부하 병정들에게 각 3원씩 나누어 주고 술을 마시게 한 다음 만민공동회를 해산토록 명령했다. 술 취한 시위대 병정들은 일제히 만민을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만민들이 흩어지자, 시위대 병정들은 만민들을 총검으로 위협하며 추격하였고 그 뒤에는 보부상들이 뒤따라오면서 ‘민회를 밟아라’, ‘회원 연설자를 잡아라’등 고함을 치며 만민들을 추격했다. 만민들은 시위대 군인들의 총검과 보부상들의 몽둥이에 쫓기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해산하였다.12월 24일에 서울 시내는 완전 계엄 상태였다. 시위대는 종로를 봉쇄했으며, 서울 시내 요소요소에는 총검을 든 군인들이 배치되어 시민이 모이면 즉각 총검으로 위협하고 귀가시켰다.  12월 25일에 고종은 민회(民會)에 칙유(勅諭)하였다. 그 내용은 민회가 법을 어기고, 대신을 능욕하고, 황제의 잘못을 외국공관에 투서하고, 역적 박영효를 임용하라는 등 11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어서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집회를 금지시키고 구경꾼까지도 단속하라고 내부(內部)와 군부(軍部)에 명했다. 12월 28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백성들에게 생업에 안착할 것을 명했다. 1899년 1월 15일에 고종은 독립협회 지회를 해산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아울러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고종은 1월 3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신해영, 어용선, 변하진, 이승만, 홍재기를 해임시킨데 이어, 박영효와 내통해서 고종 폐위와 공화제 시행 음모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이승만·연홍식·연홍기·임만용·김봉구·조문식을 체포 투옥했으며, 놓친 최정덕·정항모 등을 긴급 체포했다. 무려 430여 명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중견간부들이 체포당했다. (이승만이 구금되자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은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했고, 이승만은 1899년 1월 말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5년 7개월간 한성 감옥에서 지내다가 1904년 8월 9일에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로써 만민공동회는 완전히 해산되었다. 독립협회의 근대적 개혁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한편 고종은 개혁 관료들을 모두 파면하고, 수구파 중심의 정부를 편성하였다. 심상훈이 의정부 참정, 유기환이 법부대신, 민영기가 탁지부  대신, 신기선이 학부대신, 민병석이 군부대신, 홍종우가 의정부 총무국장, 이기동이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이근용이 경무사, 이한응이 한성판윤, 이기동이 참령, 길영수가 참위에 임명되었다. 이용익은 전환국장으로 복귀하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의해 규탄받던 가장 부패 무능한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했는데, 가장 현저한 변화는 보부상들의 진출이었다. 보부상 단체 간부 46명이 모두 정부의 중견 관직을 차지했으며, 길영수는 곧 농상공부 상공국장으로 영전하였다.  #.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 반포  1899년 8월 17일에 고종은 정치체제는 ‘만세불변할 전제정치’이고 황제권은 ‘신성불가침한 권력’임을 천명한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를 반포했다.  그러면 〈대한국 국제〉를 살펴보자. 제1조대한국(大韓國)은 세계 만국에 공인된 자주독립(自主獨立)한 제국(帝國)이다.제2조대한제국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래 되었고, 앞으로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정치(專制政治)이다.제3조대한국 대황제(大皇帝)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 공법에 이른 바 정체(政體)를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제4조대한국 신민이 대황제가 지니고 있는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가 있으면 이미 행했건 행하지 않았건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한다.제5조대한국 대황제는 국내의 육해군(陸海軍)을 통솔하고 편제(編制)를 정하며 계엄(戒嚴)과 해엄(解嚴)을 명한다.제6조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만국(萬國)의 공통적인 법률을 본받아 국내의 법률도 개정하고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減刑), 복권(復權)을 한다. 공법 이른바 율례를 자체로 정하는 것이다.제7조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관제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며 행정상 필요한 각 항목의 칙령(勅令)을 발한다. 공법에 이른바 치리(治理)를 자체로 행하는 것이다.제8조대한국 대황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과 임면(任免)을 행하고 작위(爵位), 훈장(勳章) 및 기타 영전(榮典)을 수여 혹은 박탈한다. 공법에 이른바 관리를 자체로 선발하는 것이다.제9조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국에 사신을 파송주재하게 하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한다. 공법에 이른바 사신을 자체로 파견하는 것이다. (고종실록 1899년 8월 17일)‘대한국 국제’의 핵심 내용은 대한제국은 전제국가이고,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가지며, 육해군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면권, 조약 체결권 등 주요 권한을 모두 황제에게 집중시킨 것이다. 더 나아가 “황제의 권한을 손상시키는 자는 신민(臣民)의 도리를 잃은 자”로 규정하여 복종만 강요했다. 한마디로 고종은 프랑스 루이 14세나 러시아의 짜르처럼 무한한 군권(君權)을 가졌다. 대한제국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 왕권에 대한 어떤 견제도 없었고, 서구 근대국가의 대세인 입헌군주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 기획.연재
    2021-11-09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가거도 후박나무
      가거도는 섬이다. 동경 125° 07´, 북위 34° 04´로 한반도 최서남단이니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곳이다. 오래전 ‘아름다운 섬’인 ‘가가도(嘉佳島·可佳島)’라 하다가 1896년 무렵 황금어장인 걸 알고 ‘가히(可) 살기(居) 좋은 섬’인 ‘가거도(可居島)’라 했다. 가거도에 가거든 오지 말고 살라는 섬이라고도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소흑산도’가 됐다가 해방과 함께 이름을 되찾았다.해안 백사장에 유리 원료인 규사가 풍부하고, 한여름에 산거머리가 있는 숲은 원시림의 비경이다. 겨울에도 콩난, 일엽초, 고비 종류가 우거지고 달래가 지천이며, 유난히 붉은 천남성 열매와 천리향, 굴거리, 동백, 후박나무로 숲은 늘푸름이니 난대수림의 보고이다.최부의 표해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기록처럼 임진왜란 무렵엔 무인도였고, 그 전후에도 왜구 때문에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곳에 선사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돌바늘, 패총 등이 있으며 섬 북쪽의 등대로 가는 길에 그 유적지가 있다. 또 거센 바람을 피해 100여 종의 철새가 쉬어가고, 제주해류의 바다에서는 봄엔 조기잡이, 가을엔 멸치잡이로 불야성이다.그러나 바람과 파도는 무섭다. 거센 파도가 장군봉을 넘어 마을 깊숙이 날아오고, 방파제에 있던 64톤짜리 테트라포드를 선착장까지 날렸다. 2011년 8월 8일 태풍 무이파 때의 일이다.섬들 중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독실산(犢實山, 639m)은 송아지 열매산의 이름처럼 야생 소가 송아지를 낳아 키우는 산이다. 이 산에 올라 바라보는 섬등반도의 풍광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과 상관없이, 독도가 동해의 지킴이인 것처럼 가거도는 서해의 파수꾼이다. 나아가 대양으로 나아가는 뱃머리이니, 위치만으로도 보석이요, 보물이다.그렇게 어디를 둘러봐도 한 폭의 그림 같은 가거도지만, 가거도의 수호신인 회룡산에 오르지 않고는 가거도에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 이곳 회룡산 선녀봉에서는 거센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장군봉과 크고 작은 두 녹섬이 감싸주는 가거도항과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이 회룡산에 전설이 있다. 용궁의 왕자가 이곳 회룡산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하늘의 선녀들이 가거도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잠시 머물렀다. 역시 이들 선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용궁의 왕자가 선녀들과의 만남에 공부를 잊었다. 이에 불같이 화가 난 용왕은 왕자 대신 호위 무사를 장군봉으로 만들어 버렸다. 선녀들은 바닷가의 장군봉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하늘로 올라갔으니, 그 뒤로 이 산을 회룡산이라 하고 선녀가 올라간 봉우리는 선녀봉이라 했다.이야기가 좀 허술하고 줄거리도 밋밋하다. 더하여 이제 용궁의 왕자와 선녀도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바라보는 장군봉은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우니 가거도항의 수호신임이 틀림없다.가거도에는 음양곽, 현삼, 목단피, 갈근 등 희귀 약초가 자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후박나무는 전국 생산량의 70%라고 한다. 가거도항에 내려서 산을 바라보면 이 후박나무가 원시림으로 덮고 있다.이 후박나무는 녹나뭇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으로 반들반들하고 깨끗한 잎과 나무껍질이 두터워 후박이라 한다. 브로콜리를 닮아 브로콜리 나무라고도 하며 쏭긋쏭긋 나오는 새순이 단풍처럼 붉어 예쁘다. 웅장하고 울창하게 우거진 후박나무 숲이 해 질 녘 석양빛에 반짝이는 모습은 신비롭다. 또 최근 수요가 급감했지만, 후박껍질에서 추출한 약재는 식중독 원인균인 장염비브리오와 비브리오 패혈증균에 우수한 항균작용을 보인다고 한다.그러니 이 후박나무 원시림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가거도는 아름답고, 가히 살만하며 가볼 만한 섬이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1-0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금안동 쌍계정 한글 푸조나무
      나주 노안의 금안동은 정읍의 태인, 영암의 구림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촌마을이다. 금안(金鞍)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의 한림학사를 지낸 정가신이 쿠빌라이에게 금안장과 백마를 받은 데서 유래한다. 또 금안(禽安)은 ‘새들의 낙원’이란 뜻도 있다.정가신은 신숙주 어머니의 고조부이다. 여기 외가마을에서 태어난 신숙주(1417~1475)는 설총의 이두는 물론,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이자, 한글창제의 주역이다. 여기 두 내를 거느린 쌍계정은 신숙주가 어린 시절 공부한 곳이고 편액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이곳 금안동을 기말리, 또는 오룡동이라고도 하는데 오룡동은 신숙주의 5형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신숙주의 부친 신장(1382~1433)은 술을 좋아해 아들 이름을 술주(酒)자와 음이 같은 주(舟)자인 맹주(孟舟), 중주(仲舟), 송주(松舟), 말주(末舟)로 지었다는 뒷말을 들었다. 친구인 허조가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헤쳤다’고 안타까워하고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절주를 당부했건만, 결국 숙주 아버지의 사인은 과음이었다. 16세 때 아버지를 여읜 신숙주는 신혼 생활을 하며 막내인 말주를 부모 대신 키웠다.신숙주는 세종대왕에게 발탁된 집현전 8학사로 훈민정음의 창제와 발전, 보급에 기여했다. ‘동국정운’, ‘사성통고’ 등 운서 편찬을 주도했고 국가의 기본질서인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했다. ‘세조실록’, ‘예종실록’, ‘동국통감’, ‘국조보감’, ‘영모록’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1452년(문종 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면서 그와 깊은 유대를 맺어 세조의 즉위과정에 참여했고, 영의정으로 조선 초기 왕조의 기둥 역할을 했다.그런데 훗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은 절의의 상징, 세조와 함께한 신숙주는 변절자의 꼬리표를 달게 됐다. 잘 쉬는 녹두나물을 신숙주에 빗대 숙주나물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웃기는 소리일 뿐이다.그러니까 신숙주 사후 200여 년 뒤다. 정묘·병자호란을 겪고 명나라에 절의를 지키자며 성삼문은 의리의 상징, 신숙주는 그 반대로 만든 것이다. 영웅과 악당의 짜여진 각본이었다.또 친일파 문인 이광수도 한 몫 했다. 흥미본위로 고증도 없이 쓴 소설 ‘단종애사’가 그것이다. 그가 눈물 나게 묘사한 사육신이 처형되는 날, 죽지 않고 퇴근하는 남편을 보고 신숙주 부인이 목을 매 죽었다는 것은 허무맹랑하다. 이미 5개월 전에 죽은 신숙주 부인이 또 어찌 살아나서 다시 죽는단 말인가? 그렇게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정주, 모윤숙 등은 교묘, 교활하게 글로 민족을 현혹하고 민족정기를 더럽혔다.이제 신숙주 선생의 명예는 복권되고 복원되어야 한다. 성삼문이 훌륭했으면 신숙주도 똑 같이 훌륭한 것이다. 다같이 조선과 백성을 위해 초개와 같이 자신을 바치고 헌신한 선열이기 때문이다, 곡학아세자가 위정자의 입맛에 따라 역사를 바꾸거나 바꾸려해서는 안 된다.금안동의 신숙주 생가 터를 둘러보고 그가 형제들,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뛰놀았던 쌍계정으로 간다. 쌍계정 앞 뒤를 지키고 있는 두어아름 푸조나무를 우러러본다.한줄기 바람이 ‘우수수’,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간다. 그 바람 소리가 영특하고 사리에 밝아 부모와 이웃은 물론 보는 이들의 칭송을 받았을 어린 신숙주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로 들린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0-28
  • 독립협회 부활·보부상 단체 폐지 칙령
    1898년 11월 10일 만민공동회는 이상재 등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의 석방에  만족하지 않고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등의 처벌을 결의했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 5흉(凶)의 처벌, ‘헌의 6조 실시’, 독립협회 복설 등을 요구했다.   11월 15일에 만민공동회는 집회 장소를 경운궁 인화문(仁化門) 앞으로 옮겨 집회를 계속했다. 11월 16일에 법부대신 한규설이 조병식등 5흉을 잡아다 신문할 것을 상주(上奏)하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이런 가운데 수구파들은 이기동·길영수·유기환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의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황국협회 세력을 이용하여 만민공동회 공격을 계획한 것이다.  11월 20일에 수 천 명의 보부상들은 영수인 과천군수 길영수를 호위하면서 종로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날 경운궁 인화문 앞에는 만민공동회가 농성하고, 종로에서는 황국협회의 시위가 벌어져 위기가 고조되었다. 11월 21일 새벽에 길영수와 홍종우의 지휘 아래 2000여 명의 보부상들이 인화문 앞에서 농성 중인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이때 시위대 대장 김명제와 경무사는 고종의 칙령을 비밀리에 받아 보부상들이 진격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연일 철야한 시민들은 물푸레나무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보부상들의 기습이 승리로 끝나자, 궁중에서는 백반과 육탕을 보내어 보부상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보부상들의 승리는 잠깐이었다. 보부상들이 만민들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서울 안에 퍼지자 격분한 시민들은 정동으로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격분한 시민들에게 놀란 보부상들은 사태가 역전되었음을 느끼고 오후 2시쯤 병정들의 호위 아래 도망쳤다. 이후 시민들은 다시 종로에 모여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시민들은 황국협회를 격렬히 규탄하였다. 이 날 아침 일찍 나무를 팔러온 나무장수들이 만민공동회의 피습 소식을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이기동·조병식·민종묵·홍종우·길영수·유기환·윤용선·민영기 등의 가옥을 파괴했고, 보부상들의 도가인 신의상무소(信義商務所)도 부숴버렸다.11월 22일, 이른 아침부터 더욱 많은 시민들이 종로에 모여들었다. 학생들도 휴학하여 수만 명의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군인들도 일부 고급장교를 제외하고는 만민공동회를 지지했고, 경무청의 순검들까지도 만민공동회를 지지했다.  이때 마포에 사는 한 시민이 만민공동회에 달려와서 마포에 둔을 치고 있는 보부상의 행패가 크다고 보고하였다. 분격한 일부 시민들은 빈손으로 마포로 달려갔다. 그런데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신기료 장수 김덕구가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어 시민들이 패퇴했다.   이날 오후부터 고종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불러들여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미 윤치호의 능력 밖이었다.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의 부활과 보부상들의 단체인 상무사의 폐지를 칙령으로 승낙했다.   그런데 시위대와 순검들이 궁궐을 잘 호위하지 않고 만민공동회를 지지하자, 고종은 11월 22일 밤에 각국 공사·영사와 그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서 자신을 호위토록 하였다. 고종을 하룻밤 호위해 주고 나온 각국 외교관들은 11월 23일 아침에 회의를 열어 논의해 보았으나 통일된 안을 만들지 못했다. 일본 공사 대리는 병력을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할 것을 제안했지만 영국 공사와 미국 공사는 반대했다.고종은 이날 내부대신서리와 경무사를 보내 독립협회 복설이 승인되었으니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이기동·조병식·민종묵·유기환·김정근·길영수·박유진·홍종우 등 8역(逆)의 처벌, 마포 강변에 둔취하고 있는 보부상들의 해산, 명망있는 정부 인사 임명의 3개 항을 해산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고종은 24일에 박정양을 의정부 참정, 민영환을 내부대신, 권재형을 농상공부대신, 이근호를 경무사, 윤치호를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보부상을 혁파하는 등 만민공동회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러자 만민공동회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일시 해산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부상들이 강력 반발했다. 이들은 각 지방에 통문을 돌려 비상 소집을 하였다.    한편 11월 25일까지 정부가 보부상의 해산 불응을 방조하고 조병식 등의 체포에 소극적이자 만민공동회는 11월 26일 오전 10시 종로에서 대규모 집회를 다시 개최했다.이즈음 보부상들은 은밀히 수구파의 지원을 받으면서 마포에 둔취(屯聚)하고 있어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자 고종은 26일 오후에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 대표를 직접 만났다.   11월 26일 오후 1시에 경운궁 앞에 정부 관원과 각국 외교사절이 대좌한 가운데, 고종은 만민공동회원 200명과 보부상회원 200명을 불러 면담을 하였다.  오후 2시 30분에 고종은 고영근·윤치호·이상재 등 만민공동회 대표를 면담하였다. 이들은 5흉의 재판, 보부상 혁파, 만민이 신임하는 대신의 임명, 헌의 6조의 실시를 주청했고, 고종은 긍정적인 답변을 하였다. 이러자 만민공동회 회원들은 만세를 세 번 부르고 해산하였다.고종은 오후 4시에 홍종우·길영수·박유진 보부상 대표를 면담했다. 이들은 상무소 복설, 만민공동회 혁파, 조병식 등 8인 석방을 주청했다. 고종은 역시 긍정적으로 답변하자 보부상들도 만세를 삼창하고 물러갔다.이날 고종의 양측 대표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양쪽의 주장을 모두 수용한 점이 곧 논란이 되었다.    11월 29일에 고종은 중추원 의관 50명을 선정 지명하였다. 지명된 중추원 의관을 계파별로 보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황제파 계열이 17명이었다. 즉 고종과 황국협회 등 수구파가 33석으로 3분의 2석을 차지한 것이다. 12월 1일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김덕구의 장례를 만민장(萬民葬)으로 거행했다. 김덕구는 11월 21일에 마포에서 보부상과 맨주먹으로 투쟁하다가 죽은 신기료장수(구두 수선공)였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시민들과 외국인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만민장 광경을 지켜보았다. 12월 4일에 고종은 개혁파 민영환을 의정부 참정, 박정양을 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하고, 수구파 심상훈을 군부대신, 민영기를 탁지부대신, 김명규를 학부대신, 이윤용을 법부대신과 내부대신 서리로 임명했다. 수구파를 다시 기용한 것이다. 이러자 12월 6일에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재개되었다. 이 날 독립협회장 고영근이 상소하여 보부상 해산과 조병식등 5흉의 처벌을 촉구했다.  12월 8일에도 고영근은 다시 상소를 올려 고종이 친히 약속한 국정개혁의 조속한 실행을 촉구하였으나, 고종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인가? 다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고 비답하였다. 12월 9일에 전 참서관 안태원이 상소를 올려 민회를 규탄하였다. 12월 10일에는 의관 이남규와 이복헌 등이 민회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날 찬정 최익현도 당장 시행해야 할 12개 조항을 상소했는데 7번째 조항에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라’는 주장이 들어 있었다. 12월 15일에 고영근 등은 만민공동회를 계속하면서 다시 상소를 올렸다.“신 등은 비답을 받을 때마다 모두들 기뻐하며 나랏일이 이제부터 펴질 것이며 백성들의 생업이 이제부터 안착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밤낮으로 기대하였으나 아직 실시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 아! 저 민영기, 심상훈, 김명규 세 신하는 폐하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들에게 해독을 퍼뜨려서 폐하가 쫓아버렸는데 어찌 다시 이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단안을 내려 빨리 이 무리들을 쫓아버리고 다시 슬기 있고 착한 사람을 선발하여야 모든 정령이 비로소 실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아직도 보부상(褓負商)들은 뭉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민간에서는 이들 때문에 소란이 나고 도로는 이로 말미암아 막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것이 점점 늘어나고 퍼지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엄격히 단속하여 나쁜 버릇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이에 고종이 비답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비답을 내렸는데도 이처럼 시끄럽게 구는가? 매우 무엄하다.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고종실록 1898년 12월 15일)   12월 17일에 만민공동회는 고종에게 다시 상소를 올렸다. ① 보부상을 혁파했다고 하지만 황국상무협회(皇國商務協會)로 개명하여 고종의 분부를 받아 행동하고 있고, ②보부상들의 경비는 황제의 하사금과 탁지부의 지출이라 하며, ③ 고영근·윤치호·이상재를 암살하려 하고 있고,  ④ 백민회(白民會)는 만민공동회를 공격하기 위한 단체로 그 경비는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지출했다 하니 이를 조사해서 처벌할 것이며, ⑤민영기·심상훈·김명규의 해임, 조병식·민종묵·김정근 대신의 징계, 유기환·이기동 2흉의 재판을 요구했다. 
    • 기획.연재
    2021-10-26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먹거리? 입거리?
    앞글에서 존댓말(敬語) 사용의 황당한 실태를 말씀드렸습니다. ‘남을 존중’하는 의미의 말을 자신이 자기에게 쓰는 민망한 꼴이 자주 벌어진다는 것이지요.또 하나 예로 '여쭙다'라는 동사를 들어보겠습니다. 관공서나 기업의 민원부서 담당자가 민원인에게 "궁금한 것은 여쭤보세요"라고 말하곤 하지요. 그러나 "물어 보세요"라고 해야 하고, 자신이 고객에게 질문할 때'여쭤보는'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자기 이름을 말하면서 “무슨 자(字) 무슨 자(字)를 씁니다”라고 당당하고 특히 자랑스럽게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대단히 예의 바르게 잘 처신한다는 자부심까지 드러내면서요. 그러나 이런 표현은 피휘(避諱)라고 하여, 높은 분(현재는 주로 부모)의 이름을 말할 때나 쓰는 것입니다.어떻든 오늘은 동사를 명사화하는 것과 관련해 말씀드리지요. 요즘 ‘먹거리’라는 단어가 자주, 옳은 것처럼 쓰입니다. ‘먹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돼 ‘먹을 것’을 나타내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씀씀이, 괜찮겠습니까?‘먹을 거리’라고 해야 맞지요. 아무리 ‘쉽고 편한’ 한글이라도 기본적인 규칙(문법)은 지켜야 합니다.‘먹거리’에 쓰는 방식을 다른 동사에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수많은 동사를 명사화할 때 이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어간에 ‘ㄹ’이 아닌 다른 받침이 들어가는 모든 동사에 말입니다.입는 옷은 입거리, 삶을 것은 삶거리, 잡을 물건은 잡거리가 되겠네요? ‘씹을 것’은 또 어떻겠습니까? 물론 말과 글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합니다. 그래서 한글 맞춤법이 바뀌고 새로운 표기법이 제시되지요. ‘우뢰’가 ‘우레’로 바뀌는 것처럼요.그러나 그런 공식적인 조치가 있을 때까지는 입을 거리, 삶을 거리, 잡을 거리로 써야 합니다. 먹을 거리도, 씹을 거리도 마찬가지지요.우리 삶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이런 무법(無法)은, 극력 밝히고 피하고 막아야 합니다. 누차 말씀드렸지만, 있지 않아야 할 과오를 방관하고 용인하는 탓에 차츰 사회 전반이 망가지고 마침내 무너지지요. 무지는 표현의 착오가 되고, 소통을 저해하며, 결국 총체적 전도(顚倒)와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 기획.연재
    2021-10-26
  • ‘2021년 제 2회 강항문화제’
    ‘2021년 제 2회 강항문화제’ ■사업목적    강항 선생이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학술활동, 교육활동, 국내 및 한·중·일 문화교류, 등을 위한 교육 및 문화관광 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  1. 사업장소 및 수혜자   사업장소 : 한·중·일본 內 강항 선생 문화유적지   사업 수혜자 : 한·중·일본 국민 2. 사업 개요 및 사업 내용   1) 사업 개요      수은강항선생께서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국(倭國)에 피로   (被擄)되어 그들에게 유교를 전파해 ‘일본 유교의 비조’가 된  역사적 사실 증명과 선생의 현창(顯彰)사업을 위해 다양한 사업 분야로 나눠 매년 ‘강항문화제’를 개최함.   2) 사업 내용     강항로드(ROAD)를 통한      ◆ 강항문화제 : 국가승격을 위한 매년 강항문화제 개최           1) 강항선비상 국제 선비한복모델경연대회             (학생부, 일반부)            2) 강항선비음악 한·중·일 가·무·악 발표회             (학생부, 일반부)            3) 강항어록 50선 한·중·일 시화 경연대회             (학생부, 일반부)                  3. 사업효과○ 대한민국의 사회문화교육에 기여  매년 강항문화제의 한·중·일 각 부문별 문화교류 개최로 강항 선생의 학문적 업적 및 문화교류 정신에 바탕을 두고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학술토론, 발표회 인성교육 및 인문학강좌 개설, 문화유적 답사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국민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 인물의 학술적 조명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유교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강항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조명하여 지역민들이 자부심을 갖도록 한다. 매년 개최되는 강항문화제의 한·중·일 문화교류로 국내 및 국외에서 ‘강항’이라는 인물을 널리 홍보할 수 있다.   ○ 일본과의 민간교류 활성화  최근의 한일관계 악화의 영향으로 교류가 중단된 상태이다. 민간 차원의 교류 확대, 일본 오즈(大洲)시의 강항 유적지 답사, 문화교류 등을 통해서 한일 문화교류를 활성화한다. ○ 국내교류의 활성화  국내에는 역사적 인물을 내새워 학술적 조명, 지역축제, 민간교류를 추진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많이 있다. 매년 개최되는 강항문화제로 한·중·일 문화 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 2021년 제 2회 강항문화제 국제 선비한복대회 1. 장소 : 예선과 본선 광주양동시장          (신협 앞 1층, 시내버스 6번 도로 전 구간)          결선 장소는 상사화 상설무대          내산서원 관람 후 시상.(본선 진출자 포토촬영지)2. 일시 : 2021년 11월 20일(토)오전 10시 -3. 행사내용 :    1) 수은강항선생의 선비정신으로 여민동락의 의미를 되살리고 국내 최고의 광주양동시       장의 상인과 고객들에게 ‘선비한복의 랜드마크 양동시장’의 의미를 담는다.        또, 여타의 한복대회와는 달리 교양과 인문주의(人文主義)적 정신을 받들어 기품       (氣品)이 있는 선비한복대회로 승화시켜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4. 접수마감 : 2021년 11월 19일(금)오후 18시한(참가신청서 우편소인한, 유투브,                      페이스북 영상참가자 포함)5. 참가비(어린이부 2020년 7명 선발로 인해 올해에는 선발하지 않음) : ₩100,000원                (단, 양동시장 상인회에 접수시에 50%할인)₩50,000원(메이크업, 한복 대여 및                 구매별도) 6. 시상식 : 포스터 시상 부문 참조        (단, 전체 공히 지(진), 덕(선), 체(미)상으로         1등 상금 : ₩2,000,000원과 상장 또는 트로피         2등 상금 : ₩1,000,000원과 상장 또는 트로피         3등 상금 : ₩500,000원과 상장 또는 트로피7. 혜택 :  1) 1~30등까지 “한·일 강항로드(ROAD) 유적지 탐방” 기회 제공(일정 여비 제공) 2) 기타 혜택은 포스터 특혜참조요망. ● 접수처 : 광주양동시장상인회 전화 062-366-0884                   복지 TV방송 전화 062-606-5360                   팩스 또는 이메일 접수 062-385-5127 / 0504-005-5182                   yug42@naver.com / yj57245@daum.net【한·일 강항로드(ROAD) 유적지 탐방】▶ 탐방1코스 : 영광 내산서원 용계사 참배 후 관람 버스 출발! → 강항선생 탄생지 유봉마을 고인돌 → 불갑사 중수기 → 운제마을 종가와 삵고개 서당터 관람 → 맹자정비 → 팔용정 및 이흥서원 모현당 참배 → 영광군청 운금정 탐사 → 원불교성지 → 마라난타비 → 백수해안도로 → 섭란사적비 → 논잠포 → 기독교 염산교회 77인 순례지 → 무안 또는 인천국제공항 1박 → 대마도(쓰시마) 2박 → 대한해협 횡단 → 이키(壹岐) → 히젠(肥前) → 시모노세키(下關) → 가미노세키(上關) → 나가하마(長浜) → 에이메현 오카야마공항 → 오즈(大洲) 강언덕 도착지, 출석사, 피신동굴, 적송광통비 탐방 3박 → 오사카(大阪) → 교토 후시미(伏見) → 시모노세키(下關), 가미노세키(上關), 큐슈(큐슈박물관)4박→ 무안 또는 인천국제공항 도착 → 영광 내산서원 용계사 참배후 해산(4박 5일)단, 항공편과 선박편은 각각 여건에 따라 일정이 더 늘어나고 일본에서 개최되는 국제선비한복대회는 개최지에 따라 일정과 여행비 등이 변동이 생길 수 있음을 유의해 주시기바랍니다.
    • 기획.연재
    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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