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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하가 짐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국왕에 明치는 길잡이 요구임란1년전 전라수사에 이순신1585년 7월 관백(關白)에 취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9월에 심복인 스에야스에게 명나라 정복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그는 기세를 몰아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를 정복하고자 한 것이다. 1586년 3월,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세계 지리에 눈뜨게 된 히데요시가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가스파르 쿠에료 등에게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쿠에료는 군함 두 척과 승조원을 지원할 의향을 밝혔다.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2008, p 16-18)1587년 5월에 히데요시는 시마즈 세력을 복속시키고 규슈를 평정하자,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출병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1587년 6월에 소 요시시게는 조선 국왕이 히데요시에게 알현하는 조건으로 조선 출병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의 알현을 승낙했고,  9월에 소 요시시게는 가신(家臣)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 국사(國使) 자격으로 조선에 보냈다.1587년 9월에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의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사(國使)로 조선에 왔다. 손죽도 사건이 일어난 지 7개월, 히데요시가 규슈를 평정한 지 4개월 후였다.히데요시는 야스히로를 보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서신중에 ‘이제 천하가 짐(朕)의 손아귀에 돌아오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참으로 오만불손했다.이에 조정은 히데요시에게 ‘수로(水路)가 아득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서를 보내 통신사 파견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크게 노하여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비롯한 그 일족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선조수정실록 1587년 9월 1일 3번째 기사) # 2차 사신 : 외교승 현소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1589년 3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에게 조선으로 건너가라고 명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1588년 12월에 소 요시시게가 죽자 대마도주가 되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다. 6월 하순에 소 요시토시는 하카타 성복사의 승려 현소(玄蘇)를 정사(正使)로 자신이 부사(副使)가 되어 가로(家老)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하카타 상인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 등 25명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했다. (현소는 1580년에도 일본 국왕 사절로 조선에 온 적이 있는 외교승이었다.)조선은 선위사 이덕형이 일본 사신을 맞이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공작새 1쌍과 조총 여러 정을 바쳤는데, 선조는 공작새는 남양(南陽) 해도(海島)로 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89년 7월 1일)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런데 조총에 대한 무관심은 선조나 무관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류성룡이 장계를 올려 훈련부정(訓鍊副正) 이봉으로 서울의 상번군사(上番軍士)를 통솔하여 조총 쏘는 법을 훈련시키도록 간청하였는데, 관계자들이 다 헛된 일로 생각하여 흐지부지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DB/서애선생문집 제16권/잡저(雜著)/ 임진년 일의 시말(始末)을 적어 아이들에게 보임)8월 1일에 일본 사신이 서울 동평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선조는 북변과 왜적의 대비에 대해 의논하였다. 8월 4일에 선조는 교린책에 대해 조정 대신·비변사·제조가 의논하라고 도승지 조인후에게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8월 4일)선조가 제시한 의논 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1587년 손죽도 왜변을 일으킨 왜구 주모자들과 향도 사화을동의 압송, 둘째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쇄환이었다. 아무 조건 없는 통신사 파견은 명분이 없으므로 일본이 거기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에 조정은 위 내용을 동평관 관리를 통해 일본 사신에게 전달했는데, 예상외로 소 요시토시가 쉽게 응했다. 그는 가신 시게노부를 다시 일본으로 보내 이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이러자 선조는 8월 28일에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일본 사신을 접견하고 술을 내렸다. 일본 사신들이 ‘천세(千歲) 천세(千歲)’를 외치자 선조는 매우 흡족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8월 28일)이윽고 소 요시토시는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김대기·공대원 등 116인과 반역자 사화을동 및 손죽도 사건의 적왜(賊倭) 긴시요라(緊時要羅)·삼보라(三甫羅)·망고시라(望古時羅) 등 3인을 데리고 왔다. 그러면서 “왜구가 쳐들어간 일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귀국의 반역자 사화을동이 오도(五島)의 왜인을 유인하여 변보(邊堡)를 약탈한 것이므로 지금 잡아 보내니 귀국의 처치를 기다립니다”라고 말하고, 조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9월 21일에 선조는 조정의 논의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토록 최종 결정했다. (선조실록 1589년 9월 21일)선조의 통신사 파견 결정은 우호적인 관계 회복뿐만 아니라 일본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그런데 10월에 정여립 사건이 터졌다. 기축옥사로 통신사 임명이 지체되다가 선조는 11월 18일에야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11월 18일)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 허성은 동인이면서도 중립적인 인물이었다.1590년 2월 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헌부례(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1587년 손죽도 사건을 일으켰던 왜구 긴시요라등 3명과 왜구 향도(嚮導)노릇을 한 어부 사을화동(沙乙火同)이었다. 왜구들과 사을화동은 도성 밖에서 참수되었다.3월 6일에 황윤길, 김성일, 허성, 무관 황진 등 200 명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 사신과 함께 서울에서 출발했다.한편 현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의 방비 상태와 조선 대신들의 생각, 민심 동향, 산천 도로 등 지리의 세세한 사항을 낱낱이 살피고 오라는 밀명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 일본 밀정은 조선 팔도를 돌아나니며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밀정 가운데는 사절단 수행원도 포함되었으나 장사꾼과 왜구, 심지어 포섭한 조선 백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현소는 세밀한 조선 지도를 여러 장 작성해 놓고 있었다.#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1590년 3월 6일에 조선 통신사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무관 황진 등이 일본 사신 현소 일행 등과 함께 서울에서 출발하였다.7월 22일에 교토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11월 7일에야 히데요시의 저택인 쥬라쿠타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8개월 만이었다.황윤길과 김성일은 먼저 히데요시에게 선조가 보낸 국서를 전하였다. 선조의 국서에는 조선통신사를 보낸 것은 히데요시의 일본 전국 통일을 축하하고 양국간의 우호를 돈독히 하자는 뜻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일본 통역관은 조선통신사를 복속 사절로 소개했다. 이러자 히데요시는 매우 기뻐하면서 명나라를 침략해도 되겠다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대마도의 복속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2021, p 37)히데요시의 오만은 조선통신사들에 대한 접대에서 표출되었다. 우리 사신이 도착하자 여러 명의 신하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가 자리에 앉도록 인도하였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앞에는 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 떡 한 접시가 있었다. 또 옹기 사발로 탁주를 돌려 마셨는데 예법이 매우 간단하였다. 얼마 후 히데요시가 갑자기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히데요시가 웃으면서 시종을 부르니 한 여자가 공손히 대답하거 달려나와 그 아이를 받았다. (이 아이는 1589년에 태어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스쿠인데 1591년 8월에 죽었다) 히데요시는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방약무인(傍若無人)했다. 황윤길과 김성일 등은 곧 작별하고 물러나왔는데, 다시는 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정사와 부사에게 각기 은 400냥을 주고 서장관 이하는 차등을 두어 은을 주었다.그런데 히데요시는 답서를 곧바로 주지 않았다. 통신사는 답서를 기다리다가 11월 11일에 교토를 떠났고, 11월 20일에 사카이(오사카에 닿아 있는 항구 도시)에서 답서를 받았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답서를 읽고 조선통신사는 경악했다. 조선 국왕에게 ‘정명향도(征明嚮導 명나라를 치는 데 길잡이가 되라)’를 명한 것이다.1591년 1월 28일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산에 배가 닿자마자 정사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국서를 급히 서울에 보내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터이니 곧 서울에 들어와 복명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2월 13일에 선조는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정3품)에 임명했다.3월에 선조는 조선통신사를 접견했다. 정사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해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위인이 못 된다고 일축했다.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로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동인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동요시킨다’고 서인을 공격하여 서인은 조정에서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선조는 ‘전쟁이 없다’ 고 결론 내리고 국론(國論)으로 정했다.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가 있은 지 1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와 집권당의 오판이 나라를 토붕와해(土崩瓦解)로 만든 것이다.
    • 기획.연재
    2023-01-2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해남 대흥사 표충 연리근
      한국 남쪽의 큰 절인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를 삼보사찰이라 한다. 삼보는 불교의 수행 주체인 불(佛), 법(法),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보사찰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돌아오며 불경과 불사리를 가져와 창건한 절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셨기에 주법당인 대적광전에는 불상이 없고 불단만 있다. 해인사는 부처의 말씀인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있어서 법보사찰이다. 송광사는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승보사찰이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이 해인사에서 송광사로 왔고, 그 뒤 제자인 혜심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이 삼보사찰의 이름은 조선 중기 이후에 붙여졌다 하며, 승려 교육과정인 선원, 강원, 율원의 기능을 다 갖추어서 총림이라고도 한다. 또 이 삼보사찰에 못지않은 절이 해남 대흥사이다. 그렇다면 대흥사는 어떤 절일까? 먼저 자장율사가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응진전전삼층석탑과 거대한 암벽을 다듬어 조각한 높이 6m의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이다. 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선승인 초의선사가 다도와 참선은 하나라며 ‘다선일여’를 실천한 한국 다도의 본산이다. 초의는 일지암에서 차를 직접 재배하고 만들었다. 정약용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우고, 김정희와도 교우했다. 대웅전 앞 백설당의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 편액이 있는 이유이고, 또 김정희가 감탄한 대웅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여기 표충사는 절이 아닌 사명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 뇌묵당 처영을 기리는 사당이다 또 대흥사 성보박물관의 ‘서산대사화상당명’은 정조가 휴정의 충절을 친히 적은 것이다. 휴정이 입적하고 180여 년이 지난 정조 12년(1788)에 대흥사는 표충사를 건립했다. 그리고 1794년 서산대사의 진영을 봉안할 때, 정조는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그 서문을 써주었다. ‘서쪽과 남쪽의 신하들이 선사의 초상화를 모신 영당에 편액을 청하기에, 나는 남쪽(두륜산 대흥사)에는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서쪽(묘향산 보현사)에는 수충(酬忠)이라는 편액을 내려주고 관리에게 제수를 갖추어 해마다 제사 드리라고 명하였다’는 그 내용 중 일부이다. 대흥사에 표충사가 세워진 것은 휴정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서산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1500여 명의 의승군을 지휘했다. 제자인 유정, 처영과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는 등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제자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에서 85세에 입적했다. 이때 제자에게 ‘내 의발 등을 호남도 해남면 두륜산 대흥사에 전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서산대사가 선조로부터 받은 의발, 염주, 신발 등 유품이 대흥사로 왔고, 표충사를 세워 모시게 되었다. 또 유물 중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은 그의 친필이며, 뒤에 사명대사의 친필도 있다. 서산대사의 친필인 이 서첩은 조선시대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이밖에도 선조대왕 교지는 선조 35년(1602)에 서산대사를 ‘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즉, 서산대사를 승군 대장 도총섭으로 임명하는 내용이다. 여기 대흥사 대웅보전 가는 길에 연리근이 있다. 뿌리는 하나이나 몸이 둘인 느티나무이다. 이곳 하늘로 치솟은 아름다운 자태의 소나무들도 눈길을 끌지만, 이 연리근 느티나무는 대흥사와 서산대사의 인연을 상징하는 듯싶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래서 대흥사는 연기(緣起)사찰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3-01-2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밀양 아랑각 나비 느티나무
      아랑(阿娘)의 이름은 윤동옥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연꽃봉오리처럼 예쁘고 향기롭게 자랐다.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이다. 아랑은 밀양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밀양으로 왔다. 밀양강이 흐르며 감싸 안은 밀양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을이다. 밀양강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고헌산에서 발원, 밀양시 삼랑진읍에서 낙동강이 된다. 이 밀양강이 흘러 밀양시에 이르러 아동산을 앞에 두고 섬 하나를 만드는데 마치 누에고치 모양이다. 또 아동산 앞을 지난 뒤 이번에는 둥글게 휘어지며 버섯송이 모양의 둥그스름한 섬을 하나 더 만든다. 이 아동산은 밀양관아의 동쪽에 있어서 얻은 이름으로 마치 거북 모양이다.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물을 마신다고 하여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터라고 한다. 그렇게 밀양강의 두 섬을 거느린 아동산의 거북 머리 위에 아름다운 누각이 있다.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인 영남루이다. 평양의 부벽루가 웅장하며 단정하다면 진주 촉석루는 웅장하며 장엄하다. 그리고 영남루는 웅장하고 우아하니 3대 누각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아씨! 영남루 달 구경하러 가시지요.” 어느 달 밝은 밤이다. 아랑은 유모를 따라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 그런데 이 달밤의 영남루 구경은 아랑의 유모와 관노인 ‘주기’가 짠 흉계였다. 아랑의 유모는 아랑을 영남루 아래 으슥한 곳으로 데려갔다. 기다리고 있던 관노 주기가 아랑을 겁탈하려고 했다. 아랑이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자, 뜻을 이루지 못한 주기는 아랑을 죽여 주검을 대숲에 묻어 숨겼다. 아랑의 아버지는 6년여 동안 딸을 찾았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양으로 돌아갔다. 그 뒤 부임하는 밀양부사마다, 첫날 밤 귀신을 만나 죽는 일이 이어졌다. 이때 ‘이상사(李上舍)’가 자원하여 부사로 왔다. 이상사도 첫날 밤 피투성이로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을 만났으나, 담이 큰 그는 침착하게 귀신과 말을 주고받으며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귀신은 바로 아랑이었다. 이상사는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되었고, 원한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이상사는 관아의 관노를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이때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관노 주기의 패랭이 갓에 앉았다. 그 나비는 바로 ‘나비가 되어 범인을 알려주겠다’고 한 아랑의 원혼이었다. 또, 아랑이 이상사와 만날 때 붉은 깃발을 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상사가 이 붉은 깃발의 의미가 무얼까 고민할 때, 그의 부인이 ‘붉은 깃발’이니 범인 이름은 ‘주기(朱旗)’라고 알려줬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이상사는 범인을 잡았고, 문초한 끝에 영남루 대밭에서 아랑의 주검을 찾았다. 아랑의 주검은 칼이 꽂힌 채,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그 칼을 뽑으니 비로소 뼈만 남은 형체가 되었다. 이상사는 범인 주기를 처형하고 아랑을 좋은 자리에 묻어주었다. 또 아랑각을 지어 해마다 4월 16일에 재를 지내 아랑의 넋을 위로하였다. 이 아랑각은 영남루 아래 대숲에 있다. 아랑각 정문인 정순문 앞을 예닐곱 아름의 우람한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다. 이 느티나무의 모습이 꼭 날개를 활짝 편 나비 모양이다. 이 나비 모양의 느티나무 앞에서 넘실넘실 흘러가는 밀양강을 바라본다. 문득 헛것처럼 강물 위로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가 보인다. 그 나비 환영을 보며 ‘부디 다시 환생하여 아름다운 삶을 살아갔으면…’ 두 손 모아 아랑의 넋을 위로한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3-01-12
  •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 도전
    조총, 전술에 큰변화 가져와임란, 대비 가능했던 전쟁 # 임진왜란, 동아시아판 세계대전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한·중·일 3국이 싸운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 없이 200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1592년 4월 13일에 명나라를 친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었지만, 1592년 7월부터 명나라가 참전함으로써 임진왜란은 조선·명나라와 일본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임진왜란은 한때 30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싸운 유례가 없는 국제전쟁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보는 한·중·일의 시각은 서로 다르다. 전쟁에 대한 명칭부터 각기 다르다. 우리가 오늘날 쓰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임진년에 왜인들이 쳐들어와 일으킨 난동’이라는 의미이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정유년에 왜인들이 다시 쳐들어와 일으킨 난동’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왜인들이 쳐들어와 조선인을 죽이고 잡아가고 물건을 약탈하고 불지르며 국토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강한 용어이다. 참고로 북한은 임진왜란을 ‘임진조국 전쟁’이라 부른다. 그런데 일본은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라 부른다. ‘분로쿠’는 1592년부터 1595년까지, ‘게이초’는 1596년부터 1614년까지 일본 천황이 사용한 연호다. 따라서 ‘문록경장의 역’은 ‘문록경장 시대의 전쟁’이라는 일견 중립적인 용어인데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이후부터 사용했다 한다.  일본은 19세기까지는 임진왜란을 ‘조선 정벌’이라 불렀다. ‘조선을 손봐주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는 이 용어는 조선에 대한 멸시와 우월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한편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征韓論)이 부각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활되었고 교토에 ‘풍국신사’가 세워졌다. 지금도 일본 오사카성 천수각에는 임진왜란이 영어로 ‘Korean Campaign’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임진왜란을 코리언 캠페인으로 영역한 것은 조선침략을 은폐하려는 꼼수이다. 한편 중국은 임진왜란을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만력은 임진왜란시 명나라 황제의 연호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항왜원조(降倭援朝)’를 더 선호한다. ‘일본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왔다’는 이 용어에는 은연중에 ‘은혜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중국은 1950년에 중공군이 참전했던 6·25 전쟁을 ‘항미원조(降美援朝)’라 부른다. 35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항왜원조’에서 ‘항미원조’로 단 한 글자만 고친 것은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 대하여 중국이 한국을 도왔다는 역사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이는 한국이 중국의 종속국이라는 생각과 한반도에 대한 개입 의지로 이어진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동아시아 7년 전쟁’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호응이 별로 없다. 요컨대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지축을 뒤흔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멸문당했고 도구카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하여 에도 막부 시대는 250년간 지속했다. 중국에선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세웠다. 조선은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하게 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으로 섬겼다. 그리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1543년에 샴(지금의 태국)을 출발하여 중국으로 가던 포르투갈 상인을 태운 중국 배 한 척이 폭풍우를 만나 일본 규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 )에 도착했다. 종자도 영주 도카타가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개인 소총 두 자루를 비싼 값에 구입했는데 이를 철포(鐵砲 뎃포)라 불렀다. 철포는 탄환이 순간적으로 발사되는 화승식(火繩式)으로 사격이 신속하고 정확했다. 이후 철포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전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가장 먼저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였다. 조총수 양성에 진력한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최강의 기마군단 다케다 가쓰요리 군을 이겼다.1582년에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쥬고쿠(中國) 지방의 모리 테루토모(毛利輝元) 정벌에 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원하기 위해 5월 29일에 교토 혼노지(本能寺)에 여장을 풀었다.그런데 6월 2일에 가신인 아케치 미츠히데가 1만 명의 군대로 혼노지를 급습했다. 100명 정도의 호위군 밖에 없었던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의 배반 소식이 알려지자 “어쩔 방도가 없다(是非に及ばず)”라는 말을 남기고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자결하였다. 향년 49세였다.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리 가문과 화친을 하고 즉시 회군해 6월 13일에 교토의 야마자키에서 미쓰히데를 토벌했다. 미스히데가 반역한 지 12일 만이었다.히데요시는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에서 지방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18세인 1554년 무렵에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小者, 무사들의 시중을 드는 직책)로 일하였다. 변소 지기에서 시작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짚신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며 따뜻하게 신을 수 있게 하고, 심부름을 가면 자신의 돈으로 물건값을 보충하여 누구보다 싼 값에 구해 오는 등 재치를 발휘했다. 히데요시는 곧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1568년에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교토에서 정무를 보게 되었다. 1573년에 히데요시는 오미 3개 군을 하사받고, 이마하마에 성을 축조해 성주로 부임했다. 이후 노부나가가 전국을 장악하면서 그도 전공을 세워 신분 상승의 계단을 밟았다.히데요시 인생의 전환점은 1582년 6월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한 ‘혼노지의 변(變)’이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급사 소식을 듣고 즉시 교토로 진군하여 미쓰히데를 패퇴시켰다.기회를 잡은 히데요시는 1583년에는 노부다가의 중신 시바타 가츠이에를 멸망시키고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를 자살케 했다. 이 해에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大阪城)을 지어 천하 통일의 발판으로 삼았다.1584년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와 그의 동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웠는데 곧 굴복시켰다. 1585년에 히데요시는 관백(關白)이 되고 1586년에는 태정대신이 되어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 임진왜란과 조선 수군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미리 대비할 수 있었지만 선조 임금의 무능과 집권당의 안일, 그리고 장수들의 오만이 조선을 미증유의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1591년 3월에 선조는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를 접견했다. 그런데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은 선조에게 엇갈린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다. 이러자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대세는 동인 김성일에게 기울었고 선조는 ‘전쟁 없음’으로 결론내렸다.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4월 28일에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전사하자, 선조는 30일 새벽에 폭우를 맞으며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신했다. 5월 3일에 왜군은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6월 21일에 압록강 근처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하려 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나라를 구한 것은 전라도 수군이었다.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1545~1598)은 유비무환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는 나대용(1556~1612)이 만든 거북선 화포 훈련을 마쳤다.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첫선을 보였다. 거북선이 돌격하자 왜군은 공포에 질렸다.  7월 8일에 이순신이 한산해전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 이순신과 싸우지 말도록 명령했다. 사실상 일본 수군에 대한 사망선고였다.9월 1일에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본영인 부산을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다.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세계 7대 전함에 선정된 거북선의 공이 컸다. 그 배후에는 거북선을 건조한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난 나대용이 있었다. 2022년 7월 27일에 김한민이 감독한 영화 ‘한산:용의 출현’이 상영되었다. 한산은 726만 명이 관람하여 거북선 건조자 나대용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에 대한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임진왜란 재조명과 조선 수군의 활약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 기획.연재
    2023-01-11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나주 공산 오득린 호랑가시나무
      오득린(1564~1637)은 고려 때 사정공인 오경진의 7세손이며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에서 오숭수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암, 해남, 목포, 진도를 두루 다니며 전황을 살피고 의병을 일으켜 마을을 지키다, 송희립의 천거로 이순신의 수군이 되었다. 정유재란에 옥포, 당포, 명량, 노량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고 역시 송희립의 상소로 1605년 선무원종일등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1598년 노량해전을 앞둔 때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에게 철수령이 내려졌다. 이를 알고 조명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 왜교성을 수륙으로 포위했다. 이때 명의 진린은 왜군과 전면전보다 화의 협상을 하면서 뇌물까지 받았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왜선 한 척이 왜교성을 빠져나가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 그 결과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자 대마도주인 남해의 소 요시토시가 500여 척의 왜선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으로 몰려왔다. 자칫 조명연합군이 왜군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에 이순신은 1598년 11월 18일의 노량해전 하루 전날 몇 척의 전선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 2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물목이 좁은 노량해협에서 왜군 선단을 기다렸다. 이때 명과 왜의 화의 협상, 구원을 요청하는 왜의 연락선 등을 탐망하여 이순신이 작전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공을 세운 장수가 바로 오득린이다. 또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오득린은 송희립과 함께 끝까지 전투를 이끌었다. 그리고 왜탄에 크게 다쳐 고향으로 왔다. 이 오득린을 기리는 나주오씨 재실이 고향 마을 앞 각궁산의 경승재이다. 여기 오득린의 고향 마을 상방리 남쪽으로 삼포강이 흘러 영산강으로 들어간다. 이 삼포강으로 거북이가 내려가서 하리, 다시 올라와서 상리인데 지금은 두 마을을 상구마을이라 한다. 또 이 상방리의 거북이 마을 들머리 방풍림은 마을을 보호하는 비보풍수로 오득린이 심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그믐에 당산제를 지내며 소원을 빌고 음식을 나누며 나무 밑에도 묻었다. 또 당숲의 나무가 다칠까 싶어 가지를 꺾으면 큰 병이 든다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초상집 상여와 혼례를 치른 신랑신부도 나무 사이로는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 상구마을 들머리의 아름드리 호랑가시나무는 오득린이 암수한그루가 되게 심은 연리목이다. 늘푸른 상록수인 호랑가시나무는 암수딴그루로 암나무에만 열매가 열린다. 그래서 여기 호랑가시나무 수그루 쪽은 꽃만 피고 암그루 쪽은 가을이 깊어가면서 빨갛게 열매가 익는다. 호랑가시나무는 잎이 호랑이 발톱처럼 날카로워서 얻은 이름이다. 또 호랑이등긁개나무라고도 한다. 한자어 묘아자는 고양이 새끼발톱 같아서고, 구골목은 나뭇가지가 개뼈다귀 같아서다. 그리고 구골목은 초가을에 꽃이 피고 호랑가시나무는 늦봄에 꽃이 핀다. 열매도 구골목은 검고 호랑가시나무는 붉다. 서양 이름 ‘홀리(holly)’는 성스럽다의 ‘홀리(holy)’와 뜻이 같고 잎을 성탄절 장식에 쓴다. 예수의 가시관나무였다고 하며, 이때 예수의 머리에 박힌 가시를 뽑으려다 죽은 작은 새는 ‘로빈’이다. 오득린이 이 호랑가시나무를 암수 한 그루가 되게 연리목으로 심은 것은 마을 사람들이 단결하여 사이좋게 살라는 뜻이었다. 나무 한 그루에도 선열의 깊은 뜻과 얼이 깃들어 있으니, 이는 끝없는 사랑이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연유이다. 겨울을 앞두고 어김없이 대를 이어갈 빨간 열매를 매단 호랑가시나무 앞에서 새삼 몸가짐을 다시 살핀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3-01-05
  • 2023년 새해맞이 축시
    넘실대는 시퍼런 파도를 헤치고 오색 이부자리 구름자락 걷으며 두 솟은 바위, 다리 기둥 사이로 조상님 계시는 선산 젖무덤에서 천년 당산나무 품어 안은 불끈 솟는 첫해를 거저 드립니다. 건강, 사랑, 행복을 갖고 싶나요. 취업, 승진, 사업 운이 필요하나요. 아들딸, 대를 이어갈 손주라고요. 그래요, 좋아요, 새해의 첫날이니 지난 한 해 이루지 못한 소망 올 새해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 소망 이룸의 첫해를 거저 드립니다. 오늘은 불끈 솟아 빛나는 둥근해를 누구에게나 원하는 대로 드립니다. 너울 파도 찬란한 첫해 셀 수 없고 풀잎 보석 이슬방울 첫해도 많고 백두산 천지 귀한 첫해도 있고 한라산 백록담 소중한 첫해도 있어. 동서 남해의 첫해를 나눠 드립니다. 욕심내지 마세요. 수십, 수백억의 첫해가 있으니까요. 소망 하나에 첫해 하나라면 내 것만이 아닌 우리 것이라면 나누고, 주고받는 마음이라면 불끈 솟아 환히 빛나는 황금해를 오늘은 누구에게나 거저 드립니다.        <김 목/ 시인·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3-01-03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부여 가림성 깃발 느티나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 이 글은 부여국립박물관에 옮겨놓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기공비’에 새겨져 있다. 이 글의 벌과 고슴도치는 백제 유민과 부흥군을 일컫는다.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662년, 신라 문무왕 2년이다. 백제부흥군과의 전투에 나선 나당연합군은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가림성을 피해 곧장 주류성(부안 우금산성)으로 갔다. 663년 마침내 주류성의 함락으로 부흥, 백제의 희망도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672년경까지 백제 유민들의 항거가 이어졌으니, 그 중심지가 바로 가림성이다. 이와 관련한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664년 3월, 가림성의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의 신라군을 몰아내고 되찾았다. 671년 6월, 신라는 장군 죽지를 보내 가림성 일대의 벼를 모두 짓밟았다. 이때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병 5300명의 목을 베고, 무관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 672년 2월, 신라군이 가림성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 가림성은 부여군 임천면의 테뫼식 산성으로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세워졌다. 부여 남쪽 10여 km인 이곳은 사비성을 보호하는 거점산성이었다. 동성왕은 백제의 정1품 관직이자, 궁궐의 군사업무를 책임지는 위사좌평 백가에게 이 가림성을 쌓게 하고, 지키게 했다. 이에 백가는 불만을 품었으니, 당시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501년 11월이다. 동성왕이 사비(부여)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큰 눈이 내리자 가림성 가까이의 마포촌(충남 서천 한산면)에 머물렀다. 이때 지방으로 가기 싫어 병을 핑계 삼다가 어쩔 수 없이 가림성에 부임한 백가가 자객을 보냈다. 그날 자객의 칼에 상처를 입은 동성왕은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 태어난 동성왕이 왕위에 오를 때 나이는 14세였다. 그 무렵 백제는 귀족을 대표하는 진씨 세력과 왕위를 넘보는 병관좌평 해구 세력 사이의 권력다툼이 한창이었다. 그러다 실권을 장악한 진씨 세력이 꼭두각시 임금으로 동성왕을 세웠다. 하지만 동성왕은 웅진 지역의 신진 귀족을 등용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책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신라와의 혼인동맹을 맺고 국방을 정비하여 웅진백제의 안정을 이루어갔다. 그러던 중 동성왕 21년(499), 한산 지역의 가뭄에 기근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결국 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신하들은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했지만, 왕은 들은 척도 않았다. 오히려 500년 봄에는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을 짓고 동물을 키우는 정원을 만들었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급기야 2000여 명의 백성이 고구려로 넘어가기도 했다. 아마도 501년의 비극은 이에 대한 업보이리라. 또 이곳 가림성은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후백제와 싸우기 위해 머문 곳이다, 당시 유금필은 패잔병의 노략질과 전염병, 흉년에 시달리던 빈민들을 위해 군량을 풀고 둔전을 운영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여기에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백제병사를 위로하는 충혼사와 유금필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연유이다. 나라의 멸망으로 백제는 잊혀진 역사이고, 되돌려 보는 세월이다. 하지만 붓으로 먼지를 털든, 지우개로 벗겨내든 ‘사가는 의심나는 것은 공백으로 남긴다.’는 ‘논어’ 위령공편의 경구를 잊지 말자. 여기 백제 가림성에 500여 살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부끼는 깃발처럼 역사와 세월을 말없이 표상하고 있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12-29
  • 나라는 망했어도 황실과 친일파는 호사 누려
    국치(國恥)에도 호사한 황실과 친일파들(完)                                                                                                                  총독부 세출 3% 이왕가 지급매국 친일파 76명에 귀족 칭호1910년 8월 29일에 조선은 망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해도 황실은 ‘한일 병합조약’ 제3조에 의거 예우를 받고 세비(歲費)도 받았다.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되었지만, 10월 10일에 조선총독부는 특별회계 세출예산 외에 이왕가(李王家)의 세비 금(金) 50만 원(圓)을 지출하였다. (순종실록 부록 1910년 10월 10일)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따르면 이왕가에게 지급한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매년 150만 엔(현시가로 198억 원)이었다. 1921년부터 1945년까지 매년 180만 엔을 지급했다. 1911-1913년 회계연도 조선총독부 세출예산은 5,047만 엔이었다. 조선총독부 세출의 3%가 이왕가에게 매년 지급된 것이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2020, p 347)10월 7일에 일본은 ‘한일병합 조약’ 제5조에 의거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었다.후작(侯爵)은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윤택영, 박영효, 백작   (伯爵)은 이지용, 민영린, 이완용(李完用 총리대신), 자작(子爵)은 이완용(李完鎔), 이기용,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민병석, 이용직, 김윤식, 권중현, 이하영, 이근택, 송병준, 임선준, 이재곤, 윤덕영, 조민희, 이병무, 이근명,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민영준에서 개명), 김성근, 남작(男爵)은 윤용구, 홍순형, 김석진, 한창수, 이근상, 조희연, 박제빈, 성기운, 김춘희, 조동희, 박기양, 김사준, 장석주, 민상호, 조동윤, 최석민, 한규설, 유길준, 남정철, 이건하, 이용태, 민영달, 민영기, 이종건, 이봉의, 윤웅렬, 이근호, 민형식, 김가진, 정낙용, 민종묵, 이재극, 이윤용, 이정로, 김영철, 이용원, 김종한, 조정구, 김학진, 박용대, 조경호, 김사철, 김병익, 이주영, 정한조였다. (순종실록 부록 1910년 10월 7일)작위를 받은 76명을 분석하면 세 가지 큰 흐름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왕실인사이다. 후작 이재완(대원군 조카),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윤택영(순종비 친아버지), 박영효(철종의 사위)는 모두 왕실 인사였다.  두 번째는 집권당인 노론이 절대다수이다. 작위를 받은 76명 중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을 분석하면 56명(87.5%)이 노론이고, 소론이 6명, 북인이 2명이며 남인은 없다(이덕일 지음, 근대를 말하다, 2012, p 93-95).  세 번째는 명성황후 민씨 척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병석,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민상호, 민영달, 민영기, 민종묵, 민형식이 그들이다.그런데 76명 중 8명은 작위 수여를 거부했다. 한규설(을사늑약 반대 참정대신), 유길준(개화파), 김석진(작위 거부 후 자결), 홍순형(궁내부 특진관), 윤용구(총리대신), 조경호, 조정구(대원군의 사위), 민영달(김홍집 내각 내부대신)이다.나머지 68명은 은사금을 받았다. 은사금은 후작 16만 8천 원, 백작 10만 원, 자작 5만 원, 남작 2만 5천 원이었다. 현시가로 2만 5천 원은 3억3천만 원에 해당하는데 은사금은 공채 이자로 받았다. 아울러 일본 천황은 대사령을 내려 국사범과 정치범 8백 명을 석방했고, 은사공채 3천만 엔(3,960억 원)을 발행해 왕족, 대신부터 시골 양반, 효자·열녀에 이르기까지 89,864명에게 골고루 뿌렸다. 이처럼 일본은 당근을 주어 친일파를 만들었다.  # 고종 승하와 3.1 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의 탄생  나라가 망하자 고종은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가 1911년 7월에 별세했다. 새옹지마랄까? 1912년 5월에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61세에 딸을 본 것이다. 고종은 사는 맛이 났다.   1914년 7월에는 광화당 이씨가 이육을 낳았고, 1915년 8월에는 보현당 정씨가 이우를 낳았다. 늦게 두 아들을 얻은 고종은 더욱 기뻤다. 그런데 1916년 1월에 이육이, 7월에는 이우가 죽었다. 이 시기 다섯 살 덕혜옹주가 유치원에 입학했다. 이후 고종은 덕혜옹주와 함께 함녕전에서 지냈다. 덕혜옹주의 재롱을 보며 하루하루를 지내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에 식혜를 먹고 갑자기 승하했다. “묘시(卯時 오전 6시경)에 태왕 전하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순종 실록부록 1919년 1월 21일)   그런데 1월 20일의 숙직이 이완용이었고, 일제는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로 발표했다. 일제가 발표한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이러자 ‘고종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유력하게 퍼진 설은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 탄 식혜를 올려 고종을 독살했는데, 그 두 나인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설이었다. (이덕일 지음, 근대를 말하다, p 230-231)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고종 인산일(因山日)인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명 중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2시 반에는 탑골공원에서 5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선언식을 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3.1운동은 8월까지도 계속되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임시정부가 국내외에서 6개 이상 조직되었다. 가장 먼저 생긴 곳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였다. 3월 17일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는 대통령에 손병희,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상해에서도 4월 10일에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의정원 대표 29명이 모여 4월 11일 오전 10시에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하였고,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임명했다.4월 23일엔 서울 봉춘관에서 13도를 대표하는 24명이 모여 한성임시정부 선포문과 정부 명단을 발표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등이었다.  3개의 임시정부 외에도 조선민국 임시정부(서울, 4월 10일), 신한민국 정부(평안도, 4월 17일)등도 등장했지만 이들은 문서로만 알려진 이른바 ‘전단(傳單) 정부’였다. 나중에 연해주와 한성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통합하였고, 통합된 임시정부는 상해에 두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1899년에 선포된 「대한국 국제」에서 규정한 ‘전제 군주국’에서 벗어나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로써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은 망국 9년만에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라고 되어 있고,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망국의 교훈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1894년 4월 하순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을 때, 고종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 안 했다면 청일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898년 12월에 고종황제가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하지 않고 중추원에 의회 기능을 부여했더라면 대한제국은 근대적 국민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고종 1인의 절대군주 국가였다.  신민(臣民)은 오로지 복종과 착취의 대상이었다. 국제관계도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를 짝사랑하면서 이이제이(以夷制夷)로 10여 년간 일본을 견제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크게 보아 국내 문제와 국제관계로 볼 수 있다.  국내 문제는 ‘견제 없는 절대 권력’ 때문이었다. 암군(暗君)·혼군(昏君)으로 평가되는 전제군주 고종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1887년 4월 5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이룬 빅토리아 여왕 (1819~1901, 재위 1837-1901) 시절에 살았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액턴 경(1834∽1902)은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고 말했다. 자유당 당수를 지냈고 수상을 4차례나 역임한 글래드스턴(1809~1898)은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다.”라고 역설했다. 국제 문제는 ‘코리아 패싱’이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1896년 웨베르-고무라 각서 등 여러 번의 러일협정, 그리고 1902년 제1차 영일동맹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 조약과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에서 조선은 번번이 패싱 당했다. 고종이 고작 한 일은 한반도 중립화 선언이었지만 자강(自强) 없는 선언은 국제적 웃음거리였다. 여담이지만 1945년 8월 15일에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미소 열강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말았고, 지금도 북한은 남한을 위협하고 있다.   이번 회로 ‘대한제국 망국사’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애독하여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 기획.연재
    2022-12-27
  • 주성식의 어른 왈/2022년 별곡(別曲) 2
      이제 나라 밖의 일 그리고 힘이 닿는다면 세상 전체를 살펴봐야겠다. 세계일가(世界一家)라는 시대이니, 다들 이리저리 얽혀 있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여러 곳의 전쟁과 그 가능성이 큰일이다. 드잡이질을 벌이는 나라들이야 직접 참상을 겪고 있지만, 그 영향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먹을거리와 땔감 값이 폭등하고, 선진국 가게에 석탄(!)마저 부족할 지경이라니 말이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가능성도 걱정거리다. 좁은 반도(半島)의 한쪽은 연일 완력(腕力)을 뽐내며 위협하고, 그 뒷배는 내치(內治)의 불안을 해소한다며 외부에서 일을 벌일 기세다. 돌림병은 ‘많은 것이 악(惡)’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겠다는 듯 맘껏 변신하며 위력을 뽐낸다. 그 틈새에서도 사람들은 푼돈을 헤아리고 향락과 절망의 구렁텅이를 헤맨다. 견뎌낸 괴로움이 끔찍하지만 앞으로 닥칠 아픔은 헤아리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국가와 종족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집단이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합의하기 어렵다는 아니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지구가 곧 열탕(熱湯)지옥에 빠지고 물에 잠겨 멸망할 것처럼 떠들면서 환경을 앞세우는 부류들이 있다. 그들은 자동차를 버리고 걸어 다니라고 요구하고, 역사적 유물(遺物) 파괴와 세계적 명품 훼손도 정당하다고 강변한다. 곰과 거북이를 살려야 한다며 햇빛을 모으고 바람을 쌓자고 한다.  수백 년 뒤에 있을 수(!) 있는 위험을 부풀려, 인류가 찾아낸 가장 값싸고 안전한 연료를 폐기하자고 한다.  재화(財貨)를 비롯한 자본은 악(惡)이며, 노동(勞動)은 신성하고 그 가치는 불가침이라고 우기면서 몽매(蒙昧)한 폭력을 부추긴다. 인간이 되는 것은 뒷전인 채, 그저 차이를 내세워 꿀물을 빨고 비단옷을 챙기는 부류들이 ‘오직 나만’ 정의이고 절대 선(善)인 양 세상을 윽박지르고 있다. 세상은 지옥이라는 비관(悲觀)을 무차별적으로 퍼뜨린다. 해결책은 분열과 대립의 극복뿐이라고 우기면서,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고 짖어댄다.  그러나 세상은 둘이 되면서 발생했다. 그리고 온전해졌다. 버릴 것 또한 소중한 반쪽인 것이다. 그 공존(共存)을 좇는 산통(産痛)이 비록 어둡고 또 길지만, 참고 견디다 보면 마침내 공영(共榮)의 너른 터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 2022년! 山重水複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 陸游 「遊山西村」 3·4 구(句)
    • 기획.연재
    2022-12-27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하동 옥종면 강민첨 은행나무
      거란족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은 물론 몽골까지 차지하며 요나라를 세운 북방 기마민족이다. 이 거란족이 크게 3번 고려에 쳐들어왔으니, 993년(성종 12)의 1차, 1010년(현종 원년)의 2차, 1018년(현종 9)의 3차가 그것이다. 이때의 영웅이 강감찬이다. 거란과의 2차 전쟁 때에 모두가 항복을 말했으나, 강감찬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강공책을 쓰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 좌임이 되었을 것이다.'며 강감찬을 문화평장사에 임명했다. 좌임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이니 곧 머리 풀어헤치는 거란족을 가리킨다. 이렇듯 거란 대신 여진이 북방의 패자가 되게 한 강감찬의 귀주대첩, 수나라를 무너뜨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왜의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연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한국사의 3대첩이다. 1018년 12월이다. 거란의 3차 침입에 고려는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여 출전하였다. 이때 고려군은 평북 의주 흥화진 동쪽의 하천 삼교천의 물을 굵은 줄로 쇠가죽을 꿰어 막았다가 터뜨렸다. 그렇게 기선을 제압했지만, 거란군은 굴하지 않고 개경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고립무원으로 사태가 불리해지자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를 넘겨 1019년 2월 1일(양력 3월 10일)이다. 퇴각하는 거란군 10여만 명을 고려군 20여만 명이 지금의 평북 구성시인 귀주 벌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군은 삼교천, 거란군은 청천강을 두고 배수진을 쳤다. 고맙게도 하늘이 고려군을 도왔다. 북풍이 불던 시기인데 갑자기 세찬 남풍이 억센 비를 뿌렸고, 때맞춰 도착한 김종현의 1만 기병이 거란군의 등을 쪼개어 청천강으로 밀어 넣었다.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고 포로와 낙타, 말, 갑옷 등 전리품이 산더미였다. 고려사절요 권3의 ‘살아서 돌아간 자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한 패배는 전례가 없었다.’가 그때의 기록이다. 이때 부원수 강민첨은 흥화진 전투 뒤 곧장 개경으로 가는 거란군을 막으며 내구산에서 크게 이겼다. 귀주 전투 뒤에도 별동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 섬멸하였다. 거란군이 평북 삭주군 반령에서 압록강을 건너며 군사를 점검하니 겨우 수천 명이었다. 고려의 대장군 강민첨(963~1021)은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방마을에서 태어났다. 진주 향교에서 공부하고 15살 무렵 고향으로 돌아와 활을 쏘는 사대를 세워 무술을 익혔다. 옥종면은 지리산의 덕천강이 진주 남강으로 흘러드는 산청, 사천, 하동의 경계 고을이다. 여기 두방산(569.7m)의 두양천이 내려와 첫 마을이 두방, 조금 내려와 두양, 덕천강에 이르러 숲촌 등 세 마을이 있다. 이 두방산에 강민첨의 사당인 두방재와 활 쏘는 사대 가까이 천여 살 은행나무가 있다. 바로 강민첨이 심은 나무이다. 또 강민첨의 무덤은 충남 예산에 있다. 무덤 아래에 마부 묘, 또 그 아래에 말 무덤이 있는데, 장군이 죽자 마부가 말의 목을 치고 자결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란 왕 현종은 3차 침략에서 혼쭐이 난 소배압에게 ‘적을 얕잡아 보고 경솔하게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나를 보느냐? 너의 얼굴 가죽을 벗긴 뒤 죽이겠다.’며 관직에서 쫓아냈다. 귀주대첩의 역사는 그렇지만, 역사는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 수든, 거란이든, 왜든, 아니면 지금의 누구든 역사를 거스르며 세상이 자기 것인 양 으스댄다면 그 ‘탐욕의 얼굴 가죽’을 벗겨야 역사가 바로 설 것이다. 여기 옥종면 두방리 천여 년의 세월을 품은 강민첨 은행나무는 올해도 노랗게 물들어 역사 앞에 한 점 부끄럼이 없다. 그 강민첨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며 천년도 한순간이구나 한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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