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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腐敗)는 망국(亡國)의 길

1회 조선은 부패로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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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9.1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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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 영국 수상 글래드 스톤 (1809∽1898)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지은 지 100년도 못되어 조선은 망했다. 부패한 조정은 백성을 가렴주구 했고, 학정에 못 견딘  동
학농민들은 1894년에 봉기했다. 하지만 고종과 민왕후는 반성은 커녕 외세를 끌어 들여 진압하려 했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조선
이 망한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이 주된 요인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위정자의 부패도 한 몫 했다. 부패는 망국을 자초한다.  -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
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
지 아니한가?
(중략)
심서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 순조 21년(1821) 늦봄에 열수 정약용은 쓴다.
1800년 6월 28일에 개혁군주 정조(1752∽1800)가 붕어하자 정약용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정약용은 남양주 생가에 내려가
서   서실 이름을 여유당(與猶堂)이라 하였다.
“내가 노자(老子)의 말을 보건대, “여[與]여 !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유[猶]여 !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고 하였으니, 아, 이 두 마디 말이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사진 1 여유당 (남양주시 정약용 생가)
정약용은 겨울 내를 건너듯이, 사방의 이웃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매사를 조심했다.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11세로 즉위한 순조 대신 수렴청정(垂簾聽政)한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1801년 1월10일에 사학(邪學, 천주교)
엄금을 하교하여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사실은 집권세력 노론 벽파의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이었다.
2월8일 새벽에 정약용은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19일 만에 풀려나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귀양 갔다. 그런데 9월15일
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또 터졌다. 황사영은 큰 형 정약현의 사위였다. 정약용은 다시 끌려 왔다. 혐의가 없어 목숨은 건졌지
만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에게 거처를 내 줄 이가 없었다. 고맙게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토담집 방 한 칸
을 내주었다.
1802년 초봄에 정약용은 아전 자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황상, 손병조 등 네 사람이었다.
1803년(순조3) 가을에  정약용은 한 농민의 슬픈 사연을 듣고 ‘애절양 (哀絶陽)’ 시를 지었다. ‘남자의 거시기가 잘림을 슬퍼
하는 시’의 사연은 갈대밭 마을에 사는 한 백성이 낳은 남자아이가  사흘 밖에 안 되었는데 군적(軍籍)에 들어가고 아전이 못 바
친 군포(軍布)대신 소를 빼앗아갔다.
화가 난 백성은 칼을 뽑아 양경(陽莖: 성기)을 스스로 자르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런 곤욕을 당한다.” 라고 하였다
. 그 아내가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진 양경을 가지고 관청에 가서 울며 호소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다음은   ‘애절양(哀絶陽)’ 시이다.
 
갈밭 마을 젊은 아낙네 곡소리 길기도 해  
곡소리 동헌을 향해 하늘에 울부짖네.     
싸우러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있었으나                              
옛날부터 남자의 양기를 잘랐다는 말은 못 들었네.
                                      
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갓난애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조 · 부 · 자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네.   
하소연 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가 관청에 지켜 섰고,                
이정(里正)은 호통 치며 소마저 끌고 갔네.   
칼 갈아 들어간 방에 흘린 피 자리에 흥건하고
남편은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던 형벌도 억울한데  
민(閩)의 거세 풍습은 참으로 비통했네.     
옛날 중국 민(閩) 지방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환관을 시키려고 거세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 할 일인데, 하물
며 자기의 양경을 잘라서 군정(軍政)의 폐단에 대해 항의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식 낳고 살아가는 이치, 하늘이 주시는 일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지.  
말이나 돼지 거세도 가엾다 말하거늘         
하물며 우리 백성 자손 잇는 길임에랴.       
부자들은 일 년 내내 풍악 울려 즐기지만  
쌀 한 톨 삼베 한 치도 내놓는 일 없네.   
너나 나나 똑같은 백성인데 어찌하여 후하고 박한가?
객창(客窓)에서 거듭거듭 시구편(鳲鳩篇)만 외우네.
‘시구편((鳲鳩篇)’은 『시경(詩經)』 ‘조풍(曺風)’에 나오는 시인데, 조나라 사람이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자를 뻐꾸기에 빗대
어, 뽕나무에 앉은 뻐꾸기가 새끼 일곱 마리에게 골고루 먹이를 먹여 기르는 것을 칭송하고 있다. 
이 얼마나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는 시인가. 민중의 아픔을 읊은 사회시(社會詩)이다.  
애절양 시는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 폐해의 극치이다. 황구첨정은 젖먹이 어린애까지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
軍布)를 징수하던 횡포이고, 백골징포는 죽은 사람도 군적(軍籍)에 올린 횡포였다. 
 
16세에서 60세까지 남자 장정에게 부과된 군정의 경우도 양반은 면제되었다. 이런 불평등속에서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이 비일비재
했으니  백성들은 살 길이 없어 도망치고,  유민(流民)으로  전락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병전(兵典) 6조’ 제1조 첨정(簽丁 : 장정을 병적에 올리는 일)에서 군정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첨정하여 군포를 거두는 법은 양전(중종 때 인물)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폐단이 크고 넓어서 백성들의 뼈에 사
무치는 병폐가 되었다. 이 법을 고치지 아니하면 백성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순조 임금 시대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수령과 아전의 가렴주구는 극
에 달해 삼정(三政)이 더욱 문란해졌다. 부패가 풍습인 시대였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국민권익위원회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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