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가 짐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2회)/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조선국왕에 明치는 길잡이 요구
임란1년전 전라수사에 이순신
1585년 7월 관백(關白)에 취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9월에 심복인 스에야스에게 명나라 정복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그는 기세를 몰아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를 정복하고자 한 것이다.
1586년 3월,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세계 지리에 눈뜨게 된 히데요시가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가스파르 쿠에료 등에게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쿠에료는 군함 두 척과 승조원을 지원할 의향을 밝혔다.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2008, p 16-18)
1587년 5월에 히데요시는 시마즈 세력을 복속시키고 규슈를 평정하자,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출병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1587년 6월에 소 요시시게는 조선 국왕이 히데요시에게 알현하는 조건으로 조선 출병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의 알현을 승낙했고, 9월에 소 요시시게는 가신(家臣)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 국사(國使) 자격으로 조선에 보냈다.
1587년 9월에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의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사(國使)로 조선에 왔다. 손죽도 사건이 일어난 지 7개월, 히데요시가 규슈를 평정한 지 4개월 후였다.
히데요시는 야스히로를 보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서신중에 ‘이제 천하가 짐(朕)의 손아귀에 돌아오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참으로 오만불손했다.
이에 조정은 히데요시에게 ‘수로(水路)가 아득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서를 보내 통신사 파견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크게 노하여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비롯한 그 일족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선조수정실록 1587년 9월 1일 3번째 기사)
# 2차 사신 : 외교승 현소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1589년 3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에게 조선으로 건너가라고 명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1588년 12월에 소 요시시게가 죽자 대마도주가 되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다.
6월 하순에 소 요시토시는 하카타 성복사의 승려 현소(玄蘇)를 정사(正使)로 자신이 부사(副使)가 되어 가로(家老)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하카타 상인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 등 25명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했다. (현소는 1580년에도 일본 국왕 사절로 조선에 온 적이 있는 외교승이었다.)
조선은 선위사 이덕형이 일본 사신을 맞이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공작새 1쌍과 조총 여러 정을 바쳤는데, 선조는 공작새는 남양(南陽) 해도(海島)로 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89년 7월 1일)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런데 조총에 대한 무관심은 선조나 무관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류성룡이 장계를 올려 훈련부정(訓鍊副正) 이봉으로 서울의 상번군사(上番軍士)를 통솔하여 조총 쏘는 법을 훈련시키도록 간청하였는데, 관계자들이 다 헛된 일로 생각하여 흐지부지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DB/서애선생문집 제16권/잡저(雜著)/ 임진년 일의 시말(始末)을 적어 아이들에게 보임)
8월 1일에 일본 사신이 서울 동평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선조는 북변과 왜적의 대비에 대해 의논하였다. 8월 4일에 선조는 교린책에 대해 조정 대신·비변사·제조가 의논하라고 도승지 조인후에게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8월 4일)
선조가 제시한 의논 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1587년 손죽도 왜변을 일으킨 왜구 주모자들과 향도 사화을동의 압송, 둘째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쇄환이었다. 아무 조건 없는 통신사 파견은 명분이 없으므로 일본이 거기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정은 위 내용을 동평관 관리를 통해 일본 사신에게 전달했는데, 예상외로 소 요시토시가 쉽게 응했다. 그는 가신 시게노부를 다시 일본으로 보내 이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이러자 선조는 8월 28일에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일본 사신을 접견하고 술을 내렸다. 일본 사신들이 ‘천세(千歲) 천세(千歲)’를 외치자 선조는 매우 흡족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8월 28일)
이윽고 소 요시토시는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김대기·공대원 등 116인과 반역자 사화을동 및 손죽도 사건의 적왜(賊倭) 긴시요라(緊時要羅)·삼보라(三甫羅)·망고시라(望古時羅) 등 3인을 데리고 왔다. 그러면서 “왜구가 쳐들어간 일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귀국의 반역자 사화을동이 오도(五島)의 왜인을 유인하여 변보(邊堡)를 약탈한 것이므로 지금 잡아 보내니 귀국의 처치를 기다립니다”라고 말하고, 조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9월 21일에 선조는 조정의 논의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토록 최종 결정했다. (선조실록 1589년 9월 21일)
선조의 통신사 파견 결정은 우호적인 관계 회복뿐만 아니라 일본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월에 정여립 사건이 터졌다. 기축옥사로 통신사 임명이 지체되다가 선조는 11월 18일에야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11월 18일)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 허성은 동인이면서도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1590년 2월 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헌부례(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1587년 손죽도 사건을 일으켰던 왜구 긴시요라등 3명과 왜구 향도(嚮導)노릇을 한 어부 사을화동(沙乙火同)이었다. 왜구들과 사을화동은 도성 밖에서 참수되었다.
3월 6일에 황윤길, 김성일, 허성, 무관 황진 등 200 명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 사신과 함께 서울에서 출발했다.
한편 현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의 방비 상태와 조선 대신들의 생각, 민심 동향, 산천 도로 등 지리의 세세한 사항을 낱낱이 살피고 오라는 밀명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 일본 밀정은 조선 팔도를 돌아나니며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밀정 가운데는 사절단 수행원도 포함되었으나 장사꾼과 왜구, 심지어 포섭한 조선 백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현소는 세밀한 조선 지도를 여러 장 작성해 놓고 있었다.
#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
1590년 3월 6일에 조선 통신사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무관 황진 등이 일본 사신 현소 일행 등과 함께 서울에서 출발하였다.
7월 22일에 교토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11월 7일에야 히데요시의 저택인 쥬라쿠타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8개월 만이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먼저 히데요시에게 선조가 보낸 국서를 전하였다. 선조의 국서에는 조선통신사를 보낸 것은 히데요시의 일본 전국 통일을 축하하고 양국간의 우호를 돈독히 하자는 뜻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일본 통역관은 조선통신사를 복속 사절로 소개했다. 이러자 히데요시는 매우 기뻐하면서 명나라를 침략해도 되겠다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대마도의 복속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2021, p 37)
히데요시의 오만은 조선통신사들에 대한 접대에서 표출되었다. 우리 사신이 도착하자 여러 명의 신하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가 자리에 앉도록 인도하였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앞에는 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 떡 한 접시가 있었다. 또 옹기 사발로 탁주를 돌려 마셨는데 예법이 매우 간단하였다.
얼마 후 히데요시가 갑자기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히데요시가 웃으면서 시종을 부르니 한 여자가 공손히 대답하거 달려나와 그 아이를 받았다. (이 아이는 1589년에 태어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스쿠인데 1591년 8월에 죽었다)
히데요시는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방약무인(傍若無人)했다.
황윤길과 김성일 등은 곧 작별하고 물러나왔는데, 다시는 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정사와 부사에게 각기 은 400냥을 주고 서장관 이하는 차등을 두어 은을 주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답서를 곧바로 주지 않았다. 통신사는 답서를 기다리다가 11월 11일에 교토를 떠났고, 11월 20일에 사카이(오사카에 닿아 있는 항구 도시)에서 답서를 받았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답서를 읽고 조선통신사는 경악했다. 조선 국왕에게 ‘정명향도(征明嚮導 명나라를 치는 데 길잡이가 되라)’를 명한 것이다.
1591년 1월 28일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산에 배가 닿자마자 정사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국서를 급히 서울에 보내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터이니 곧 서울에 들어와 복명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2월 13일에 선조는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정3품)에 임명했다.
3월에 선조는 조선통신사를 접견했다. 정사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해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위인이 못 된다고 일축했다.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로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동인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동요시킨다’고 서인을 공격하여 서인은 조정에서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선조는 ‘전쟁이 없다’ 고 결론 내리고 국론(國論)으로 정했다.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가 있은 지 1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와 집권당의 오판이 나라를 토붕와해(土崩瓦解)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