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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홍글자(The Scarlet Letter)
    20C 사상과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로 평가되는 마르크스(Karl Marx)는 아이가 여섯 명 있었다. 그는 아이들 밥은 못 먹여도 춤과 피아노 교습은 시켰다. 그중 세 명이 일찍 죽었는데, 딸이 죽었을 때 외상으로 관을 사려 했으나 구하지 못해 절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아내가 사망할 당시 둘 다 병에 걸렸으나 돈이 없어서 자기 아픈 건 끝까지 숨기면서 아내의 마지막을 지켰다. 평생 혁명 생각만 하면서 아내를 고생시킨 마르크스가 유일하게 아내에게 잘한 일로 꼽힌다.세상천지에 처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디 그의 이야기뿐이겠는가. 더욱이 충효를 제일의 선(善)으로 하는 유가적 가치를 지키며 의와 예의 행동규범으로 훈련된 우리의 경우, 그러한 에피소드는 비일비재하다.산천에 선홍빛 철쭉이 피어나는 즈음, 비운의 한 사내는 검붉은 핏빛 절규를 하고 있다. 유죄가 확정되어 부인은 갇혀 있고, 딸은 대학/대학원 입학이 취소돼 의사 면허가 위태롭고, 자신은 재판을 받는 중이다. 5촌 조카와 동생이 구속되고, 부친은 무덤 속에서 처참하게 명예가 짓밟혔다. 그의 아들에게 허위 인턴확인서를 발급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선 국회의원은 배지가 떼일 위기에 처했다. 진보의 희망에서 진보의 고통으로 전락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다.17C 신성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엄격한 청교도의 마을 보스턴에서 재봉사 헤스터(Hester)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 벌을 받는데, 젊은 목사 딤즈데일(Dimmesdale)이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얼마 뒤,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홀로 살던 헤스터가 아이를 낳자 마을은 발칵 뒤집히고, 간통한 죄로 그녀는 평생 가슴에 ‘A’자를 달고 살라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는다. 사람들의 경멸에도 죄악의 징표인 ‘A’를 주홍빛 천으로 만들어 그 둘레에 금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아 당당하게 달고 다니는 헤스터와는 달리, 그녀의 간통 상대인 딤스데일 목사는 자신의 죄를 차마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나날이 쇠약해져만 간다. 한편 뒤늦게 미국에 도착한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스는 우연히 목사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의사직을 이용해 병약한 목사의 곁에 머물며 복수할 기회를 엿본다. 결국 궁지에 몰린 헤스터와 딤스데일 목사는 마을에서 함께 도망갈 것을 결의하지만 최후의 순간, 헤스터와 펄을 앞에 두고 딤스데일 목사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며 숨을 거두고 만다. 단 하나의 목적이었던 복수를 이룬 칠링워스는 삶의 목적을 잃은 후 자신의 재산을 모두 펄 앞으로 남긴 채 죽고, 펄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후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하여 행복한 삶을 누린다. 딤스데일 목사와의 사랑을 간직한 헤스터는 마을에 남아 여생을 보낸 후 목사의 곁에 묻힌다. 19세기 미국로맨스 장르의 원조인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초기 작품으로 우리에게는 ‘주홍글씨’ 라고 알려진 소설의 줄거리다.보스턴 주민들 사이에서 ‘A’자가 원래 의미했던 ‘간통(Adultery)’ 혹은 ‘간통을 범한 여자(Adulteress)’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간다. 처음에 ‘A’자는 인류 최초의 죄인인 아담(Adam) 또는 헤스터의 간통 상대인 딤즈데일 목사의 이름인 아서(Arthur)의 첫 글자를 나타냈다. 그러다가 점차 자원봉사자로서 헤스터의 능력을 함축하는 ‘능력 있음(Able)’을 가리키게 된다. 마침내 작품의 말미에 가서는 성스럽게 변모한 헤스터의 모습을 보여 주는 ‘천사와 사도(Angel and Apostle)’의 상징으로 바뀐다. 그래서 주홍 글자가 마침내 제 직분을 다했을 때, 그녀는 사회의 유대와 지속의 대행자로 변모한다.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조국’은 고통스럽게 극복해야 할 ‘시대정신’이자 주홍글자이다. 호손이 17세기 보스턴에 대해 쓰기로 선택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악마와 마녀를 믿었고 그들의 일상생활에 관여하는 질투의 신을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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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6
  • 반려견 토리 사랑하듯이
    참으로 화끈거렸다. 윤석열 정부의 민낯이 나타난 것 같아서. 워싱턴포스트(WP)지 기자의 질문 하나로.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윤 대통령이 대선 기간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걸었던 사실과 한국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회라는 점, 내각 인선에서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은 점을 열거한 후, 여성의 대표성 향상과 성평등 증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윤 대통령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 즉각 답변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 “장관 직전 위치까지 여성이 많이 올라오지 못했다. 여성의 공정한 기회를 사회가 적극적으로 보장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궁색한 변명이다. 현재 윤석열 정부의 여성 장관은 3명이다. 이에 비해 문재인 정부의 초대 내각은 여성 장관이 강경화(외교부), 김영주(고용노동부 장관), 김은경(환경부), 김현미(국토교통부), 정현백 (여성가족부) 등 5명이었다. 역대 초대 내각 중 여성 장관 수가 가장 많았다. 장관급으로 격상된 국가보훈처의 피우진 처장까지 포함하면 6명이었다. 이와 단순 비교해도 문재인 정부의 반밖에 안 된다. 차관급은 더 심하다. 차관 및 처·청장급 41명 인선에서 여성은 2명뿐이다. 이에 비해 독일, 캐나다, 칠레, 프랑스 등은 남녀 비율이 똑같다. 청와대 비서진 역시 그렇다. 이러한 윤석열 정부의 노골적인 여성 패싱. 국제사회에서도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역이나 출신학교도 심하게 편중된 것 같다. 일명 말하는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이 주류다. 장관의 출신 지역을 보면 영남 7명, 서울 6명, 충청 4명, 제주 1명이다. 호남은 없다. 이처럼 편중된 인사를 한 대통령은 과거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없었던 것 같다. 참으로 지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편향성이 어찌 이런 부문에만 미치겠는가. 곳곳에 스며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자고로 음식도 편식하면 건강을 망가뜨린다. 독서도 편향적이면 사상이 편재되어 버린다. 때문에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일명 폰조착시(Ponzo illusion)현상이 나타난단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보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우긴다. 맞지 않아도. 아무리 옆에서 잘못을 수정해주려 해도 우이독경(牛耳讀經)일 뿐이다. 사실 이런 현상을 수정해주기는 극히 힘들다. 한번 프레임워크(frame work)가 형성되면 그 틀이 굳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참으로 답답하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 귀중한 존재다. 차별이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 현대와 같은 문명사회에서는 동물권까지 중요시한다. 윤 대통령도 반려견 토리를 사랑하잖은가. 토리에 대한 사랑의 잣대로 온 국민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국민 개개인을 토리만도 못하게 생각한다고 간주해도 될까. 독일 출신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자신과 남을 비교하거나 더 많은 것을 이루려 애쓰지 마라. 모든 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라. 그들을 변화시킬 필요도 없다. 당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그들을 이용할 필요도 없다.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불충분한 자신의 존재가 완벽해지기를 꿈꾸지 마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더 많은 것을 추구하려 할 뿐이다. 불행해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그렇다. 대통령도, 그 누구도 에크하르트 톨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면 어떨까. 그 어떤 의미에서의 명암이나 갈라치기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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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5
  • 직접정치, 오래 된 제도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새롭기만 한 것은 소멸(성) 자체’라고, 어떤 종교 경전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다.‘새로운 것’이 절대 제멋대로, 그냥 생긴 것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선악·빈부·강약·우열 심지어는 남녀만 보더라도, 시작부터 있었고 끝까지 있으리라는 지적 아니겠는가.왜 이렇게 밑자락을 까느냐면, 직접정치도 필자의 독자적 발상(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이 아니고 오랜 근거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사회 구성원들이 무척 좋아하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글에 탕론(湯論)이라는 것이 있다. 은(殷)나라를 세운 탕(湯)에 대해 논한 글인데, 유교사상이 근간을 이루는 동양에서 식자(識者)들 사이에 끊이지 않는 논쟁거리였다.내용은 간단하다. 신하인 탕(湯)이 왕인 걸(桀)을 쫓아내고 새 왕조(殷)를 세운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군신유의(君臣有義)뿐 아니라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유교사상에 비춰볼 때 확실한 반역이며 명백한 패륜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폭정과 압제에 시달리는 최대 다수 백성의 삶이 더 중요하고 따라서 역성(易姓)이 그르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다산은 후자(後者) 쪽이다. 아주 먼 옛날에는 백성들이 직접 지도자를 뽑았다. 즉 다섯 가(家)가 모여 린(隣)을, 다섯 린이 모여 리(里)를, 다섯 리가 모여 비(鄙)를, 다섯 비가 모여 현(縣)을 이루고, 각 단계 구성원이 장(長)을 뽑았다는 것이다. 최고위직(명칭이 무엇이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산은 악단을 예로 든다. 악단 대표가 무능하거나 범법을 하면 바로 물러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내세우는데, 국가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그렇게 ‘직접’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상황이 바뀐 것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다. 황제가 중앙과 지방을 독단적으로 통제하면서 백성들은 지배와 통치의 객체(客體)로 전락했다. 폭력으로 강제하는 억압과 수탈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행이 계속 이어지며 법과 제도가 됐다. 그 틀에 끼어들어 뭔가 주워 먹으려는 모리배들의 온갖 패악(悖惡)질이 현재 정치인 것이다.다산은 절대왕정시대에 살았다. 그런데도 극형에 처해질 만한 발언을 꺼리지 않았다. 옳은 생각이요 바른 실천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물 정치를 한다는 모리배들, 뭔가 아는 것처럼 시덥잖은 소리만 떠드는 책상물림들, 그냥 고상하게 아무것도 모른 척하는 뜨내기들, 이런저런 꼬투리만 잡으면서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는 게으름뱅이들, 그러니 듣고 보라는 것이다. 니들 생각도 이야기도 다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직접정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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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4
  • 자연을 존중한 조선의 선비
    설악산(1708m)은 한라산(1950m)과 지리산(1915m)에 이어 남한에서세 번째로 높은 산으로 조선 중기 이만부의 지행록에 의하면 ‘음력 8월 한가위에서 시작한 눈이 하지에 이르러 녹는다’하여 설악산이라고 한다. 흔히들 지리산을 남성에 비유하고 설악산을 여성에 견준다. 장대하고 너른 지리산의 풍채, 지극한 아름다움의 여성미를 지닌 설악산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다. 송강 정철은 “설악이 구경이 아니라 고경(苦境)이며, 봉정이 아니라 난정(難頂)이로다”고 봉정암을 오른 뒤 말했다고 한다.육당 최남선은 설악을 칭송하기를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그윽한 골속에 있으되, 고운 양자는 물속의 고기를 놀래고, 맑은 소리는 하늘의 구름을 멈추게 하는 듯한 뜻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취미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금강보담도 설악에선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케 할 것이다”고 하였다.매월당 김시습과 삼연 김창흡 선생이 그윽한 집을 이 산중에 얽고 지낸 것을 보면 설악의 아름다운 매력에 몸을 뺏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종대왕이 감탄한 신동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를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다. 26세 때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을 엮었고, 47세에 관동지방 방랑의 길에 나서 당시 양양부사 유자한과 교분을 쌓고 양양, 강릉, 설악 둥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그는 육경자사로 지방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그의 수작 ‘관동일기’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때 쓰인 것들이다.정조대왕에게 존경받는 두 선비가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과 어우당 유몽인이다. 둘 다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선대 임금을 위하여 절개를 지킨 인물이다. 정조는 선대 왕에 한결같은 절개를 지킨 두 인물을 거론하며 “김시습이 설악산이라면, 유몽인은 금강산에 비유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의 선비들이 산과 물을 찾는 목적은 오늘날 현대인이 건강을 위해 오르는 등산과는 차이가 크다고 본다. 선비들이 산수를 즐겨 찾고 풍류를 즐기는 데는 공자의 가르침이 크다고 본다. 공자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며 양생법에 “지혜로운 자는 움직이고, 어진 자는 고요하다(知者動 仁者靜), 지혜로운 자는 즐기고, 어진 자는 오래 산다(智者樂, 仁者壽)”고 했다.지혜로운 자가 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막히면 지혜를 갖춘 자와 같고, 아래로 흘러가니 예를 갖춘 자와 같으며, 깊은 곳도 머뭇거림이 없이 들어가니 용기를 가진 자와 같고, 막혀서 갇히면 맑아지니 천명을 아는 자와 같고, 험하고 먼 길을 흐르면서 남의 허물을 뜯는 법이 없으니 덕을 가진 자와 같기 때문이다.어진 자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산은 만인이 우러러 보는 대상이기때문이다. 초목이 그 곳에서 자라고, 만물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새들이 모여들고 짐승이 쉬어간다. 인간은 그 곳에서 이익을 취하고 산다. 천·지 중간에 우뚝 서 있는 산에는 구름과 바람이 불어 인다. 천지는 이로서 안녕(安寧)을 얻는다. 그래서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자연과 하나 되기를 꿈꾸었던 선비의 마음은 자연을 담은 정자, 별서, 정원 또는 원림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공간과 면학공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소쇄원은 옛 선비들의 교류의 공간으로 자연의 풍광을 관상하며 성리학의 이상을 꿈꾸며 인격을 수양하고, 시와 학문을 수련하며 후세를 양성하는 무릉도원이었으며, 심오한 담론의 장이 되었으며, 선비문화의 요람이었다.선비의 자연사랑은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도 않고, 신발도 편치 않는 짚신을 신고 두발로  팔도강산의 산수를 유람하면서 자연의 도를 깨닫고 자연과 살아가겠다는 풍류 세계관을 볼 수 있다.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은 유(遊)두타산기’에서 “산과 숲은 궂은 것을 감춰 준다는 도량에서 나의 가슴을 넓혀주는 것을 배우고, 맑고 서늘한 기운에서 나의 누추함과 더러움을 씻어 버릴 것을 배우게 한다. 또 게으름과 타락에 빠지게 하고, 경박함과 조급함으로 화를 발끈 내며 스스로를 소인 취급하여 애걸복걸하며 구차하게 여기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산과 물의 도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선비는 자연을 벗삼으며 시를 읊조리고, 독서하며, 담론을 나눌 수 있는 공간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살아간다.석주 이상룡 선생은 나라를 빼앗기고 1911년 나라를 떠나면서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강산,오백년동안 선비의 예의를 지켜왔네.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러 들어” (이하 생략)외세 문명 앞에 선비정신이 무너져버려 나라잃은 슬픔을 한 편의 시를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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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4
  • 따스함이 고이는 미조포구
    해당화 피는 미조포구는 아름다웠다. 항구의 화단에 식재돼 있는 수국과 붉게 핀 해당화는 이방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특히 어부들의 삶이 꿈틀 거리는 미조항구는 새벽부터 요란했다. 어선들의 엔진소리를 씻겨주는 파도소리와 어부들의 힘쓰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아니다. 먼 바다의 심장소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어항으로 불리는 미조포구, 그곳에는 낭만의 시간을 갖는 탐방객들이 줄을 있고 있었다. 승용차를 비롯해 관광버스까지 대형주차장을 가득 채우면서 수많은 탐방객들의 발길을 옮겨주고 있었다. 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미조마을의 곳곳을 살펴보면서 어부의 삶을 엿 보았었다. 정박해둔 어선들의 한산한 모습과 단독주택, 아파트, 빌라 촌, 팬션 촌 등 주거지를 둘러보았다. 어촌마을의 이미지를 벗어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예부터 남해의 전진기지역할을 해오고 있었던 미조마을은 부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황금어장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어획량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어촌수입금은 이를 방증했다. 주변경관역시 아름다움의 극치다. 올망졸망한 작은 섬들이 있고 따스함이 고이는 곳이다. 彌助라는 지명의 유래마냥 남해의 끝자락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의 삶도 순수하다. 공용주차장 바다광장에 세워진 오인태 시인의 ‘미조포구’는 오가는 길손들에게 그리움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오 시인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모이게 하는 곳으로 모든 것이 모여드는 미조포구라고 했다. 잠시, 그 명시를 옮겨본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 사람의 마음은 따뜻한 곳으로/ 고여 듦을 알겠네//여기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새섬 범섬 매섬 뱀섬/ 그 올망졸망한 섬들과/ 바다를 떠돌던 고단한 배들//또한 제집들 듯 찾아와 마음을 풀어놓고/ 밤이면 불빛 환하니/ 참 따뜻해라 거기//미륵이 아직 머물러 계시더라//(미조포구 전문)그렇다. 미조항 ‘촌놈 횟집’의 박대엽씨와 20 여 년간의 우정을 나눴었던 오 시인은 미조마을의 교육열에 힘을 쏟았었다. 다시 말해 미조초등학교로 전근 온 오 시인은 아이들의 절도행위와 부도덕적인 문제점을 바로잡았던 장본인이다. 당시, 교육현실의 안타까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를 고민하면서 드나들던 술집이 ‘촌놈 횟집’이었다. 사진작가이며 촌놈횟집의 주인이었던 박씨는 오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의 참교육에 동참했었다. 그들은 틈이 나면 사진과 펜으로 시를 썼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교육정서에 도움이 되는 작품들을 탄생시켰으며 따뜻한 마을정서를 심어주었다. 어쩌면 소홀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참모습을 가르쳤는지도 모른다. 어촌생활의 단면을 살펴보자. 생활고를 해결해야하는 아버지의 일상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가야 했고, 어머니역시 갯것을 해서 가정살림을 꾸려야했기에 가정교육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시인과 박 작가는 열악한 가정환경의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가르쳤었다. 부처가 남해에 수행하러 왔다가 갑자기 불어나는 물로 인해 오고 갈수 없었는데, 불쑥 부처님 앞에 마을 앞섬 하나가 자진해서 엎드려 디딤돌이 돼주어 미륵이 도왔다고 해서 미조마을이라는 것이다. 즉, 미륵이 도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남해의 최남단에 자리한 마을로써 그 아름다움이 빼어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항과 남항으로 나누어진 미조항은 동백과 잣밤나무 해송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다.망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노량과 하동 사천방향으로 국가의 위급사항을 알리던 봉수대가 있었고, 미조초등학교 뒤, 망산 자락에는 조선 성종시대에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축성한 성곽이 있다. 또 임진왜란 시 이 충무공이 지휘하던 함선과 부산 첨사 충정공 한백록 장군의 전함, 전선, 병선, 하우선과 수백명의 용병이 이곳 앞바다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곳이다. 아직도 700미터의 성곽이 남아 있다.이외에도 미조본촌마을과 사항마을을 가르는 미조 상록수림이 있다. 이곳은 마을의 지형적인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선조들이 숲을 가꾸어 왔다고 한다. 현재는 천연기념물 제29호로 지정돼 마을사람들과 탐방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더욱이 힐링을 즐기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사랑받는 상록수림이 되고 있다.아무튼 모든 따스함이 스며들고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이 고이는 미조포구는 남해 최남단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삼천리금수강산인 미조포구 사랑은 현대인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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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3
  •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처님 오신 날, 제20대 대통령 취임식,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축하하고 기념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 많은 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즐겁고 행복하지 아니할까? 특히나 오월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광주민주화운동이 지워지지 않아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이해서 윤석열 대통령이 ‘오월정신은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며 우리 국민 모두는 광주 정신이다’라고 말하였고 앞으로 매년 참석하여 오월정신을 계승하고 국민통합의 길로 우리 모두가 나아가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직도 상처는 아물지 않고 가슴에 멍이 든 채 남아 있다. 5월은 왜 그렇게 빨리 가려고만 하는가, 빨리 가려면 혼자 가거라.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머릿속에서만 기념하고 퇴색되어 가는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땅에 어린이가, 어버이가, 스승이 없었다면 이 사회는 이만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을까? 특히 스승의 날은 제자와 스승이라는 단어가 입가에서만 맴돈다. 우리는 너무 빨리 가려고만 하지 않는가, 참 스승을 뵙기가 죄송스러워진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74년간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된 최고 권력자를 위한 공간이 국민 품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용산대통령 집무실로 새 역사의 장을 열었다.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든 메르켈 독일 총리의 말이 생각난다. “빨리 가고자 하면 혼자 가거라. 그러나 멀리 가고자 하면 함께 가라.” 이 말은 메르켈 총리의 저력을 의미하는 말 곧 화합의 힘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 국민 모두는 광주의 정신이다”라고 강조 했다. 이제 새로운 정부는 혼자 가지 말고 국민과 함께 화합하여 가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은 566일 만에 야외 마스크를 해제하면서 크게 호흡하고 자연의 소리와 향기를 접할 수 있는 공간들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민들은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힘겨운 생활을 겪었다. 우리 국민들은 대단한 저력을 갖고 있다. 어려운 고통을 감내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새로운 대통령도 취임하여 신 용산 시대의 역사를 시작했다. 모든 역사는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간다고 한다. 이제 새 정부는 그동안 힘겨웠던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치유하며 이해하고 공정과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그런 나라를 만들 것인가? 어렵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국민들에게 그동안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힘을 키우고, 또 하나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보태는 힘이 필요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아픔을 보면 새로이 보인다고 한다. 우리는 ‘아픔’이라고 하는 용어들을 보면 외로움. 그리움, 슬픔, 불편함, 번거로움 그리고 진짜 아픈 것까지 모두 다 ‘아픔’이다. 아픔의 특징을 보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나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노력한다. 왜냐하면 아픔은 말 그대로 너무 아프기 때문에 잊으려 급급하고 감추려 급급하다. 그렇기에 국민들의 아픔을 다 들여다보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번 새 대통령에게 기대를 해 본다. 그래서 빨리 가는데 급급하여 혼자 가려고 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고 함께 가라는 말에 의미를 두고 싶다. 
    • 오피니언
    2022-05-22
  • 문학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귀에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듣고 있다. 책이나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디지털 기술의 진화가 독서의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지만, 문학이 주는 사회적 영향력은 여전히 대단하다. 즉, 디지털 매체가 인쇄물을 완전히 대체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영상을 보는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문학 작품을 통해서 읽는 즐거움과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영상은 쉽게 접근하여 보지만, 깊이 생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없기에 한계성이 있다. 문학은 오래 전부터 우리 인류와 함께해 오면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바람직한 가치관을 제시하거나 자신과 타인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힘을 키워주는 소중한 역할을 꾸준히 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는 먹을거리가 풍부해졌지만,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스트레스 등의 각종 정신적인 질병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인 질병에 문학이 놀라운 치유 기능이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점점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슬픈 내용이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주인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믈을 흘리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이며, 그동안 마음 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가 해소되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다.문학을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아는 것도 많아서 화제가 풍부하여 대인 관계도 좋을 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다양하여 기발한 아이디어도 잘 생각해 낸다고 한다. 4차 혁명시대를 맞이하는 오늘날, AI가 대체할 수 없는 창의성은 문학 속에서 찾아야만 하기에 여전히 문학책을 읽어야 할 당위성은 존재하고 있다. 토머스 칼라일이 인도를 잃어버리더라도 셰익스피어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듯이, 세익스피어의 영향력은 숱한 세월이 흘렀어도 빛을 발하고 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세익스피어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작품 속 등장인물의 심리나 갈등을 메타포(metaphor 은유법)를 이용하여 표현했다. 이러한 메타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미의 연결성을 찾아야 하기에, 이 작품을 읽는 사람은 평소에 잘 쓰지 않은 인간의 뇌를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창의성이 발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또한 문학은 엄청난 경제적 효과도 창출한다. 환타지 동화 ‘해리포터’ 한 편이 영화·애니메이션·캐릭터·게임 등 문화 상품으로 진화되어 308조의 엄청난 수익을 낸 사실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각 나라마다 유명한 작가의 문학관을 세우거나 문학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 그리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무대를 부각시켜 여행객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실제로 여행객들도 의미있는 여행을 위해서 이곳을 찾고, 여기 주변에서 식사와 잠자리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앞으로 문학이 대중들과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다양한 전시 콘텐츠를 매개로 한 문학관 건립과 문학 작품을 주제로 한 행사 마련 그리고 작가가 태어난 고장이나 문학 속에 나오는 공간 주위에 산책길을 만들어 생활 속에서 문학을 만나도록 한결같이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독서와 문학을 모르는 사람은 날개를 쓸 줄 모르는 새와 같다’는 말이 있다. 모두가 문학을 가까이 하여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알아서 남은 인생을 풍요롭고 가치있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 오피니언
    2022-05-19
  • 기고/바람직한 집회·시위 문화 만들자
      최근 집회 현장에서 과도한 방송 차량의 확성기 소음으로 인하여 고통을 호소하는 시민들의 민원이 잦아지고 있다. 특히 여수지역 공사 현장 입구에서 아침 시간대 과도한 방송 차량 소음 반출로 인해 시민과 집회 참가자 간 마찰을 빚는 일도 있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4조에는‘주최자가 기준을 초과하는 소음을 발생시켜 타인에게 피해를 줄 때는 그 기준 이하의 소음 유지 또는 확성기 등의 사용 중지를 명하거나 확성기 등의 일시 보관 등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제24조 벌칙조항에는 6월 이하의 징역 또는 50만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경찰에서는 심야·주거지역 소음 기준을 상향조정하고 최고소음도를 도입하여 시간대별·장소별로 강화된 소음 기준을 적용하여 집회·시위의 자유와 시민의 평온 보장을 위하여 소음관리팀을 운영하고 있다. 집회 현장에 소음관리팀이 출동하게 되면 피해지역을 중심으로 대상소음도를 측정해서 허용 기준 초과시 주최자에게 소음을 기준 이하로 유지하도록 설득 또는 명령하는데, 일부 집회 주최 측은 이러한 소음 측정이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여겨 확성기의 소음을 고의로 높이는 등 경찰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잘못된 생각이다. 집회 주최 측에서는 확성기 소음을 크게 할수록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시민에게 피해를 주고 이로 인해 시민과의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어 결국은 공감받지 못하는 집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에서는 다양한 시책 개발, 법 기준 마련 등을 통해 집회·시위의 자유와 시민의 평온을 보장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주최 측에서도 확성기 소음이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자신들의 주장과 시민의 공감,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잡을 수 있는 바람직한 집회·시위 문화를 만들길 기대한다.    
    • 오피니언
    2022-05-18
  • 여성성(女性性)은 폭력성인가?
    한 여자가 있다. 어떤 남자를 미워(좋아?)한다. 마음대로 안 되니, 해코지하고 싶다.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밝힌(떠든)다. 그 남자는 아무 대항도 못하고 파멸(죽음까지!)한다.이런 일이 실제로, 그것도 자주 많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처녀가 어떤 남자를 지목해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호소)하기만 하면, 그 남자는 ‘무조건’ 유죄가 확정되고 당연히 처벌받았다. 처녀성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지고(至高)’한 가치였다. 따라서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잃을 이익과 받을 손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 어느 누구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한 정치집단 구성원들의 ‘성폭력 범죄’로 인해 사회 전체가 시끄럽다. 얼마나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우면 그따위 짓을, 떼로, 지치지도 않고 하는지 모르지만, 권리를 넘겨주며 일을 맡긴 사람들 꼴이 안타깝고 애달프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 집단이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지칭해 2차 가해를 저질렀다고 매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사건(들)은 알려지자마자, 수사 등을 통해 밝혀야 할 실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성역(聖域)이 돼버렸다. 피해(내용)는 기정 사실이 되고 혐의자는 속절없이 가해자로 확정돼, 온갖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몇백 년 전 미개(未開)한 먼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 바로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괜찮겠는가?폭행(력)은 이론의 여지 없이 옳지 않다. 나쁜 것이다. 성(性)이 앞에 붙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어떤 행위가 폭행인지 아닌지, 그런 사실이 있기나 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도, 원인과 결과에 따라 정당방위와 오상(誤想)방위로 나뉜다. 한 인격체를 실정법으로 단죄하는 데 극도로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회의 법 체계에는 엄연히 ‘무죄추정원칙’이 존재한다. 추악한 범죄는 엄벌해야 하지만, 반드시 사회가 합의한 기준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여성은 비하의 대상이 아닌 꼭 그만큼 특권의 주체도 아니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척도를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혜택이나 특권만을 요구(강요!)하는 ‘피해자 행세’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 여성들이 결정할 때가 됐다.따라서 다시 묻는 것이다. 현재 이 사회는 정상인가? 여성성(女性性)은 오직 폭력성이고 특히 늘, 모든 일에 옳은가?
    • 오피니언
    2022-05-18
  • 외로움 그리고 또 외로움
    외로움이 짙어간다. 신록이 우거져가도. 삼라만상이 교향악을 피워내도. 지난주 토요일 오전 강의를 마치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버렸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밤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거의 없는 나. 피곤이 짙었나 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역시 밤 1시를 이미 넘어섰다. 글을 마쳐야 잠자리에 들 것이다. 한참을 지나니 얼음덩어리가 등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베란다의 금목서 사이로 보이는 창밖의 강한 바람은 세상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배가 고팠다. 먹기는 싫었다. 언젠가부터 음식의 맛을 잃어가는 듯한 나. 왜일까. 갑자기 근원을 알 수 없는 짙은 서글픔이 또 밀려왔다. 마치 어렸을 적 낮잠 자고 일어나 엄마가 없을 때 물밀듯이 밀려드는 그 어둠의 자식들처럼. 외로움의 결정체인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허수아비였을까.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 걸어 다니는 이방인이었다. 오랫동안 몸 없는 유령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략) 낯섦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 걷다가 걷다가 마침내 익숙해질 때까지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1987년 실천문학에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로 등단한 허수경 시인이. 필자도 아주 작은 섬에 홀로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언젠가 베란다 건너편 동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그때 급히 햇살이 쏟아지는 광주 천변으로 나가 무조건 걸었다. 사직공원을 거쳐 양림동을 지나 돌아오니 괜찮아졌다. 허수경 시인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사회, 온갖 물질로 도배질 되어 있는 풍요의 극치 시대, 그러함에도 왜 외로움은 오히려 커져만 갈까. 1573년에 태어나 37세에 요절한 부안의 명기 매창, 유희경과의 애닯은 사랑에서 빚어지는 고독이 이런 거였을까. 이런 매창을 사랑한다. 너무나 많이. 나만의 일방적 사랑이지만. 그래도 좋다. 시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외로움의 선율. 나를 적시고 또 적신다. 틈나는 대로 찾아가서 그녀를 쓰다듬어 주고 심연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곤 변산 앞바다에 놓아준다. 그녀는 짙은 노을로 답해준다. 서울 등 외지 출장을 다녀올 때도 그 노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항비치로 질주하곤 한다. 그러면서 카타르시스 한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시다. 외로움! 생명체라면 늘 안고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큰 사랑이 옆에서 속삭여줘도. 그래서 그 어떤 사랑보다도 빛나는 보석이 아닐까. 때문에 가슴이 에이도록 아픈 고독도 상처만 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세상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친구이고 사랑이다. 알퐁스 도테의 별도, 황순원의 소나기도. 매년 한 번씩 왔다가는 필리핀 해구보다도 더 깊은 한을 가진 오월도. 오월도 말이다.
    • 오피니언
    20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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