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1-28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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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한 노년을 위하여
     한국은 현재 노인이 전체 인구의 15.7%를 차지하는 고령 사회이며, 2026년에는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날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축복이지만, 노후 대책이 없는 노인에게는 불행이 될 수 있다.20세기에 들어서 서구화 과정을 거치며 기존의 전통적인 노인부양체계가 무너졌으며, 2021년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에 의하면 노인들은 거의 자녀와 따로 살고 있으며 10명 중 7명은 생활비를 직접 마련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34조 제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과연 한국의 노인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에는 의문부호를 던질 수밖에 없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한국 노인의 노인빈곤율과 자살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은 노인은 젊은 때와는 다르게 건강이 나빠지기 쉽고, 소득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청년은 삶의 황혼기에 인간다운 생활을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행복한 노후를 위하여 미리 철저하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먼저 행복한 노년 생활을 위해서는 일정한 소득과 안정적으로 살 집이 있어야 한다. 소득과 집은 노년의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노후 생활에 소득이 없어서 어려운 처지라면, 주택연금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연금이 노년을 행복하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주택연금은 유한 주택을 담보로 일정 기간 연금을 지급하는 금융상품이다. 만 60세 이상의 고령자가 주택을 담보로 맡기면, 평생 혹은 일정한 기간 동안 매월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이 연금을 이용함으로써 자녀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고, 노인 자신의 남은 삶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다음으로는 건강 관리에 힘써야 한다. 천하를 얻고도 건강을 잃는다면, 다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좋은 음식을 잘 먹고 적절한 운동을 꾸준히 하고 그리고 가족과 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겠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은 삼가고, 유산소 운동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를 통해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겠다.   평상시 이렇게 살아간다면, 노인 중 가장 피하고 싶은 질병인 암과 치매도 예방할 수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치매 예방법으로 몸은 어쩔 수 없이 늙어가지만, 마음만은 젊게 가지라고 한다. 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젊은 사람처럼 대화하고 행동한 것이 실제로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새로운 활동과 새로운 자극을 받을 때 뇌가 활성화되니, 젊을 때처럼 계속 배움의 삶을 이어가는 것도 바람직하다. 책과 신문을 즐겨 읽거나, 각 시군마다 있는 노인대학을 다니는 것도 권장하고 싶다. 또한 취미가 같은 동호회 활동이나 봉사활동도 치매뿐만 아니라 행복지수를 올려준다고 하니 추천한다. 아무리 잘 관리해도 치매가 올 수도 있으므로, 치매가 의심되면 바로 보건소에 가서 치매선별검사를 받아야 한다. 미리 진단하여 약물치료를 받으면, 10년 이상 일상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건강이 허락된다면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좋다. 더 나아가서 그동안 자신이 쌓은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유익한 일이다.노인은 젊은 세대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으니,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키우기 위해서는 문화 생활에 자주 접하는 것이 좋겠다. 문학관, 미술관, 박물관, 문화예술회관 등을 이용하거나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을 도전해 보는 것도 삶의 품격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의 종착지로서 참된 종교를 찾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영혼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종교를 통해 마지막 삶을 아름답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오피니언
    2021-11-25
  • 모든 유권자가 책임윤리로 내년 선거를
    윤리(倫理,ethics)란 무엇인가. 사전에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거나 행해야 할 도리나 규범을 말한다” 고 되어 있다. 인성이라는 뜻으로서 그리스에서 온 말이다. 오늘날은 대체로 윤리가 작동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주의가 강하기 때문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개개인의 자유는 강하게 주장하면서 그 자유에 따르는 의무는 방기하기 때문이다. 윤리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보편적 윤리는 어느 분야나 공용이겠으나 각 직역 또는 분야에 따라서는 상당히 다르다. 사회복지사 윤리, 의사 윤리, 간호사 윤리, 공무원 윤리, 사이버 윤리, 인공지능 윤리 등으로. 이런 모든 분야의 윤리를 총괄해서 총정리 해줄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정치다. 그런데 정치가 너무 타락해가고 있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정치가 타락하면 사회전체가 타락한다고. 지금 우리나라의 상태가 바로 그렇다고 본다. 현재의 집권 정부여당이 하는 꼴이 보기가 싫다. 특히 부동산 정책은 대부분의 국민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렸다. 더 이상 논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더 보기 싫은 것은 야당이다. 지금까지 야당이 한 일이 무엇인가. 날마다 정부여당 물어뜯는 일 아니던가. 잘했다고 칭찬해 준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취할 이익은 다 취하고 있잖은가. 이렇게 타락한 것이 그대들 아닌가. 당신들 같은 정치인들의 꼬락서니만 안 봐도 국민들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한다. 오죽했으면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는 사회전체를 타락시킨다고 했겠는가. 현재의 세태로 해석하자면 당신들과 같은 인간들은 절대로 의원 등 선출직으로 뽑히지 않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지역구에서는 선출된다는 사실이다. 굉장히 큰 모순이 아닌가. 학연, 지연 등등으로 얽히고 설혀서 선출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선출된 정치인들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결국은 우민정치가 되는 것 아닌가.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요 모양 요 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분야는 모두 초스피드로 발전해 가는데. 유독 정치 분야만 오히려 퇴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출신 생태철학자 요나스(Hans Jonas)는 책임윤리를 주장했다. 그는 인간중심적 자연관이 도구적 기술관과 맞물려 환경파괴와 기술유토피아라는 신화를 낳게 되었다고 했다. 이에 요나스는 새로운 책임의 윤리를 제창한 것이다. 책임 윤리란 무엇인가. 미래지향적 책임인 당위적 책임을 말한다. 행위의 예측 가능한 책임을 묻는 책임을 중시하는 윤리인 것이다. 현재에는 문제가 없을지라도 오늘날의 잘못으로 미래세대가 악영향을 받게 된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의 세대가 공해물을 많이 배출하게 되면 미래세대는 그로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미래에 자식이 잘 못되면 그 책임까지 지듯이. 이것이 바로 책임윤리다. 현재의 세대는 반드시 이런 책임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 특히 세상을 각종 오물로 더럽히는 정치인들은 더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때문에 유권자들은 이런 상황들을 잘 살펴보고 내년도에 실시되는 대선은 물론 지방선거까지 심사숙고해서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유권자가 깨어나지 않으면 정치의 후진성은 영원히 개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2021-11-24
  • 간절한 뜻을 드리니!
    지난 3월 17일자부터 제 이름을 걸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여덟 달이 지났습니다. 감회가 적지 않네요. 특히 무슨 결과가 있는지 돌이켜보니, 절로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서는 듯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바를 생각하면 참 놀랍지요.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다는 말도 드물지 않고, 죽었다가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시공을 초월했다는 주장도 합니다. 열 수레의 책을 읽고, 만금(萬金)을 모으며, 큰 권력도 다루지요. 공교(工巧)로운 언행으로 많은 사람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이도 있습니다.감히 그런 성취에 비하려는 것은 아니예요. 다만 앞뒤를 살피고 위아래를 헤아리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누구나 공감하고 의지할 수 있는 기준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런 것이 있기는 하고, 필요할까. 찾거나 만들고 확립할 방법은 뭘까. 실행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것이지요. 누구나 입만 열면 민주나 정의·공정·평화 심지어는 사랑 따위를 떠듭니다. 서로 적대한다는 자들이 똑같은 말을 하지요. 속셈은 뻔합니다. 무슨 수단을 쓰건 독단(獨斷)의 자리와 힘을 가지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배에 기름을 채우기 위해 온갖 더럽고 무서운 짓을 서슴없이 해댑니다. 후과(後果) 따위 전혀 걱정하지 않아요. 범죄(죄악!)를 처단해야 할 자(들)도 같은 부류라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잘 꾸민 무대 위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막이 내려가면 호사스러운 만찬을 함께 즐기지 않던가요. 주인인 줄 착각하는 ‘무지렁이’들의 피와 살로 만든 요리를요. 저는 주장해 왔습니다. 난장판 선거제도를 철폐하고, 복마전 정당제도를 폐지하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갖고 참여하는 ‘직접정치’를 실행하자는 것이지요. 차별적 용어인 민주를 인주(人主)로 바꾸고, 주의(主義) 대신 합의(合議)를 지향해, 사회의 모든 문제를 공개적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결코 어렵지도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 동가(同價)라는 데 대해 아무도 반대할 수 없으며, 구성원 전체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술도 보편화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불휼위라고 들었습니다. 세상 일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최소한의 이성이라도 갖겠다고 거듭 다짐합니다. 이때 이 땅에 태어나 큰 혜택을 누렸으니, 마땅히 보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간절한 뜻이 제대로 값하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 오피니언
    2021-11-23
  • GDP 10위권, 한국의 자화상
    노벨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 창립 300주년을 맞아 1969년부터 수상되고 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미국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카드(David Card)와 조슈아 앵그리스트(Joshua Angrist), 휘도 임번스(Guido Imbens) 교수가 수상했다.데이비드 카드는 최저임금 인상과 고용 간의 인과관계를 다룬 1994년 논문을 통해 ‘적절한 수준의 최저임금 인상은 일자리 감소 등 고용 시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작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 논문이 나오기 전에는 ‘최저임금 인상은 고용 총량을 줄인다’라는 것이 경제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공동연구자인 앨런 크루거(Alan Krueger) 프리스턴대 교수는 2년 전 작고했다.논문 <최저임금과 고용,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 패스트푸드산업 사례연구>는 뉴저지주와 펜실베이니아주 접경지역에 위치한 410개 패스트푸드점을 설문조사해 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 분석했다. 당시 뉴저지주는 경기 불황에도 최저임금을 시간당 4.25달러에서 5.05달러로 올린 반면, 펜실베이니아주는 4.25달러의 최저임금을 유지했다. 임금이 오르면 고용이 감소할 것이라는 기존 주류 경제학의 시각과 달리 뉴저지주 패스트푸드점은 고용이 늘어난 반면, 펜실베이니아주 고용률은 오히려 감소하는 결과가 도출됐다. 이후 최저임금과 고용 사이 인과관계를 둘러싼 여러 학자들의 도전적인 실증 분석이 뒤따랐다. 이 연구는 심화하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미 오바마 정부가 추진한 최저임금의 공격적 인상을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됐다.2017년 이후 과감한 최저임금 인상에 나선 문재인 정부도 카드와 크루거의 연구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은 국가 단위에서 최저임금을 실험했다. 국가의 번영은 개인이나 특정 기업집단만이 이룩할 수 있는 성취가 아니고, 모든 경제주체가 집합하여 함께 이룩할 수 있는 성취다. 임금은 인적자본에 대한 가격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가야 할 방향이며 이것이 사회보장을 강화해야 하는 당위성이다.2018~19년 기준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6.7%로 조사 대상 OECD 37개 회원국 중 상대 빈곤율이 4번째로 높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 빈곤율 16.7%라는 수치는 국민 6명 중 1명이 중위소득 50%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다. 올해 기준으로 기준 중위소득 50%는 1인 가구 91만4000원, 2인 가구 154만4000원, 3인 가구 199만2000원, 4인 가구 243만8000원이다.한국의 상대 빈곤율은 OECD 평균인 11.1%보다 5.6%포인트나 높게 나타났다. 상대 빈곤율이 낮은 핀란드 6.5%나 덴마크 6.1%, 아이슬란드 4.9% 등 북유럽 국가와는 수치상으로 큰 격차가 있다. 일본 15.7%, 이탈리아 14.2%, 영국 12.4%, 캐나다 11.6%, 프랑스 8.5% 등 주요 선진국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높은 상대적 빈곤율은 급격한 고령화에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43.4%(2018-19년 기준)로 OECD 평균 15.7%의 약 3배에 달한다. OECD 회원국 최고 수준이다. 노후 준비를 하지 못한 중장년층이 고령화하면서 상대 빈곤층이 크게 늘어난 셈이다.긴급 재난지원금이 가져온 긍정적인 경험 중 하나가 성장지향에서 벗어나 소득 불균형 해소와 이익분배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을 우리 사회에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더 과감하고 더 확장된 기본소득제에 대한 더욱 치밀한 설계와 논의를 시작할 수 있기를, 소득 불균형과 양극화를 넘어 국가가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위대한 첫걸음의 시작을 기대해 본다.
    • 오피니언
    2021-11-23
  • 낙안읍성의 겨울
    소설(小雪)이다. 겨울의 문턱을 넘는다는 절기로 양력 11월 22일경을 말한다. 1년 24절기 중에서 20번째로 맞는 이날은 첫눈이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낙안읍성 초가지붕과 돌담위에 내리는 첫눈은 동심을 낳게 한다. 무엇보다도 추수가 끝난 후, 노란볏짚으로 날개를 엮어서 새롭게 지붕을 단장한 낙안읍성 초가지붕은 포근함을 안겨 준다. 게다가 누르스름한 돌덩이로 쌓아둔 돌담길은 풋정과 옛정을 불러일으키는 정겨운 길이다. 낙안읍성동문에서 성곽안길을 따라 연못주변의 초가에서부터 남문과 서내의 돌담길은 초겨울의 진풍경을 엿볼 수 있다. 까치밥이라 할 수 있는 붉은 감열매가 옹기종기 달려있으며, 아직껏 떨어지지 않는 단풍잎들의 풍광을 지켜볼 수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첫눈의 기억을 간직하는 습성이 있다. 그것은 첫눈이 내릴 때 느꼈던 감성과 상상력이 순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솜털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감촉과 감정은 서정성이 깃들어 있을 뿐 아니라 감수성까지도 동반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낙안읍성에서 맞이한 첫눈은 유별하다. 우리선조들의 흔적과 삶을 엿 볼 수 있고, 고풍스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초가지붕위에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쳐 든 소녀이야기가 꿈틀거리고, 돌담길에서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라는 술래 잡이의 소년의 앙증스런 행동도 활동사진으로 펼쳐진다. 현 사회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사라져가는 미풍양속을 그리워하는 까닭일까? 필자의 낙안읍성의 지난생활이 다시금 떠오른다. 좀처럼 잊혀 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낙안읍성의 겨우살이였다. 새하얀 눈송이가 소복하게 쌓인 초가지붕을 바라보며 새들과 대화를 나눴던 지난시간이 기억으로 되살아난다.눈이 내린 날 새벽은 길거리가 부산했다. 방문을 열고나간 그 시간부터 눈밭을 쓸고 길을 트이는 작업을 했었다. 마당을 쓸고, 고샅을 쓸고, 연못가를 쓸고, 성곽주위를 쓸고, 돌담길을 쓸면서도 콧노래를 불렀었던 옛 시간이었다. 더욱이 첫눈이 내리던 날은 자신도 모르게 돌담길과 성곽 길을 거닐었었다. 늘 첫눈 내리는 추억담은 기억으로 되새김이다.며칠 전이었다. 인천에서 살고 있는 송준용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주옥같은 수필을 쓰면서도 시를 쓰는 작업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지녔다. 송 시인은 최근에 쓴 자신의 수필을 읽어보라며 ‘첫눈에 대한 記憶’의 설레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첫눈은 아름답고 순결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에 겨울은 언제나 설레임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추워진 날씨로 움츠러들기도 했지만 그 추위를 녹여줄만한 사랑이 있었다. 거리엔 자선냄비가 등장하고 불우이웃을 돌보아주는 대부분의 자선행사가 연말에 있었다. 그래서 겨울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온기를 전해주는 따뜻한 계절이 되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또 그는 12월부터 1월 사이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그리하여 얼룩진 세상을 덮어주었고 사람들은 성자처럼 보이게 했다”고 표현했었다. 필자가 낙안읍성 시인의 집에서 거주할 때다. 그는 낙안읍성의 유별함을 남다르게 여겼다.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자신의 시편과 수필작품을 탄생시켰었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서 ‘낙안성에 내리는 비’는 훌륭한 작품으로 고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송 시인과 필자는 젊은 시절부터 2인문학을 해왔으며, 낙안읍성에 관한 많은 작품을 창작했었다. 비와 눈에 얽힌 사연과 흙과 돌 그리고 물과 불 등 원초적인 이야기들이 내포돼 있다. 특히 서민들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인간애를 그리는 작품들이다. 가끔 필자는 첫눈 내리는 거리를 그려볼 때가 있다. 그중에서도 낙안읍성의 눈 내리는 거리와 풍광을 그려보는 상상력을 그려볼 때가 많다. 아마도 정겨움이 묻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욱이 겨울철에 추녀 끝에 매달리는 고드름과 여름철에 떨어지는 집시랑 물은 필자의 시어로 탄생되기에 더욱 친근감이 서린다. 어쩌면 “낙안읍성의 겨울”은 동심을 노래하고 미풍양속을 전해주는 어른들의 고향인지도 모른다. 기성세대에서 mz세대까지를 아우르는 인성교육장으로도 필요한 장소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사실 호연지기교육(浩然之氣敎育)이 필요한 시점에서 더욱 절실함을 느낀다.낙안성 초가지붕에 세차게 떨어지는 빗방울은추녀 끝 집시랑 물로 수직선을 긋다가 수평선을 긋는다어느덧고향을 잃어버린 빗방울은옆으로 모아지고 밑으로 모두어서이정표 없는 곳 낮은 곳만을 찾아드는 유랑시를 쓰고 있다도랑과 이랑을 헤매고계곡과 골짜기를 훑고개천과 강을 쏘다니다바다로 흐르는 빗방울은 모닥이는 소리 콸콸 주르르한 방울 두 방울 큰 방울로고향 찾는 빗방울은하늘땅을 오르내리다낙안성 초가지붕집시랑을 타고 있다(필자의 ‘집시랑 ‘ 전문)
    • 오피니언
    2021-11-22
  • 무궁화를 심고 가꾸는 것은 ‘나라사랑의 지름길’
    요즘 같은 나라가 혼란스런 시기에는 더욱 이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고 조국과 민족을 늘 함께 걱정하며 목숨을 바칠 각오로 살아오셨던 선열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죄스럽다. 영암은 역사가 깊은 만큼 나라가 어려울 땐 너나 할 것 없이 의연히 일어섰던 의병들부터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을 하셨던 민주열사들의 덕분에 또 민주주의가 이렇게 발전하는데 기초하신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나라의 소중함은 말할 수 없이 당연하겠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영암 도포출신인 양달사장군은 1500년대 초에 전국에서 최초 의병장으로 왜놈들을 막기 위해 의병들을 모집하여 전투결과 대승을 거두었던 일부터 여성 최초의병장 양방매 할머니를 기억할 수가 있다.임진왜란 7년 전쟁 때에는 김완장군을 비롯한 김치홍, 전몽성, 전몽진 의병장들의 목숨을 오직 나라를 위한 충정심에 모두 바쳤던 그 분들의 흔적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암에 낭산 김준연 선생기념관이 있다. 그분은 ‘조국이 살아야 내가 산다’고 청년들을 잠에서 일깨워 주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에서 항일운동 그리고 제헌의원으로 헌법을 기초하시는 등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셨기에 영암인 들은 그 업적을 기리고 민족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기위해 건립된 기념관이다. 그 경내에 무궁화나무를 심어 민족공원으로 만들어서 “무궁화를 많이 심고 가꾸는 것이 곧 나라사랑이다”를 다짐하는 구심점으로 만들자고 제언 한다. 무궁화는 우리민족이 힘이 들 때 마다 가는 길에 항상 고락을 같이했던 잊을 수 없는 민족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일제강점기 때에는 우리민족성과 역사말살운동의 일환으로 무궁화를 향한 모욕과 추잡하고 더러운 꽃으로 보면 눈병이 온다고 보지도 말고 뽑아 불 태워 버리라는 잔인한 왜놈들에게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던가.우리는 지난 과거를 잊지 않고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이제 과거를 살았던 미안했던 마음을 모아 무궁화가 받았던 그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사실은 아주 깨끗한 꽃, 어쩌면 우리 민족성을 그렇게 닮은 꽃이 아닌가. 한 송이 피는 데는 아침에 5~6시에 피었다가 저녁7~8시에 지는 하루이지만 한 송이 한 송이 피고지고 하여 약3개월 여 동안 계속해서 피고 지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한그루씩 심기 하는 마음을 모아 함께 무궁화 꽃이 만발하여 환한 모습을  볼 수가 있기를 우리 모두가 희망한 것이다. 영암에 수많은 문화 유적지 중에서 먼저 상징적으로 서호면에 있는 고조선의 청동기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선사주거지주위와 지석묘, 마한의 역사중심지인 시종면 일대 고분군과 마한문화 공원, 전통 문화가 생생히 살아 2200여년의 긴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함께 간직하고 있는 구림 등 영암 전체가 무궁화 꽃이 만발하는 모습을 전국에 알려서 처음으로 3개월 여 동안 ‘대한민국 무궁화 꽃 대 축전’을 열어서 한국인의 긍지와 자존심으로 함께 나라사랑 운동을 작은 일부터 꽃 피우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민주 열사들의 눈물겨운 깊은 원한도 풀어드리고 편안히 영면에 들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며 코로나의 극복과 함께 무궁화 심기 운동을 하루 빨리 시작해 만개하는 그때를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설렌다.      
    • 오피니언
    2021-11-21
  • 겸손해 지면 복이 시작된다
    ‘석’이라는 목수가 제나라를 여행했을 때 곡원이라는 지방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신목(神木)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그 거대함이란, 상수리나무 그늘에서 몇천 마리의 소가 더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났다. 나무의 굵기는 남자 장정 100명이 손을 뻗쳐야만 겨우 잡을 수 있었고, 높이 또한 70~80척이나 되어서 산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다. 그래서 나뭇가지 하나만 가지고도 큰 배 하나쯤은 거뜬히 만들 수 있었다. 거대한 신목 주위에는 그것을 한번 구경하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석의 제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삼키며 이 거목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석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 거목을 지나쳤다. 그를 수행하던 제자들이 석에게 질문했다. “저희가 스승님한테서 목수 일을 전수받은 이래로 이렇게 좋은 재목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좋은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그냥 지나치시니 저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께서 관심조차 두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그러자 석은 제자들을 바라보며, “저 상수리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배를 만들면 무거워서 가라앉아 버리고, 시신을 넣을 관을 짜면 곧 썩는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가구를 만들면 곧 부서지고, 문을 만들면 진딧물들의 놀이터가 된다. 그 나무로 기둥을 만들면 금세 벌레가 먹는다. 저 상수리나무가 저렇게 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느냐?”라고 말했다.석이 제나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밤, 상수리나무의 목신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너는 도대체 나를 무엇과 비교해서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배나무나 탱자나무처럼 열매가 있는 나무들은 너희들에게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나무들은 열매가 달려 있으므로 그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잡아채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 그들이 가진 스스로 장점은 스스로 생명을 단축하게 하고야 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오늘날까지 일관되게 쓸모없으려고 노력해왔다. 천수를 마치려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수많은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나무 그늘을 제공해주는 쓸모 있는 나무가 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오래전에 쓸모가 있었다면 벌써 옛날에 베어졌을 것이다.”이 상수리나무가 말하는 것은 굳이 쓸모 있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일관되게 쓸모없는 길을 선택했기에 장수를 누릴 수 있었고 누군가에게 그늘을 만들어줄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사람들은 ‘유용(有用)의 용(用)’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무용의 용’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곧은 나무는 먼저 벌목되고, 물맛이 좋은 우물은 먼저 말라 버린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유용의 용’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고 옛 어른들은 말한다.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판단된다.사람이나 사물은 모두 다 자신의 존재 이유와 존재가치를 갖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하찮아 보이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일지라도 그것을 함부로 대하고 소홀히 여겨 무시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게 다 소중하다.더욱이 지금은 휴먼-네트워크의 구축을 통해 모든 구성원이 함께하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각자의 개성과 선호의 다양성, 그리고 존재가치의 상대성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상호 존중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개인주의 성향에서 벗어나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해나가는 신뢰와 진실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정성으로 대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 일이 나에게 유익이 될까?’ ‘이 사람이 도움이 되는 사람일까 ?’를 지나치게 따지는 바람에 오히려 유익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종종 보게 된다.나의 유익을 먼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시대이다. 강한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강한 사람은 공격을 받고, 강한 사람은 외롭다. 강함이 오래가는 것도 아니다. 강한 것보다 오히려 약한 것이 오래간다. 약하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약하면 도움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 배려의 대상이 된다.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보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약함의 결과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어린 아기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 속에서 잉태된 열매이고, 공동체는 서로의 상처를 나누는 가운데 태어난 열매이며, 친밀함은 서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짐을 통해 자란 열매다”고 말했다. 강함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다. 강함보다 약함을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은 연약함을 감추기보다 연약함을 드러낸다. 연약한 마음을 가꾼다. 연약한 마음 때문에 너무 괴로워 말라. 약함 때문에 사랑받고, 약함 때문에 인생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 복의 시작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연약함을 깨달을 때 겸손해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사람이 겸손해 지면 복이 시작된다. 배가 금이 가기 시작하니까 쥐들이 다 기어 나온다. 쥐는 벌써 파선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미는 홍수가 날 것을 미리 알고 집을 나무꼭대기로 옮긴다고 한다. 거미는 바람이 불기 전에 어디서 바람이 불어올 것인지 바람 부는 방향을 알고 거미줄을 친다고 한다. 한 마리 미물만도 못한 게 우리 인생이라는 사실이다.사람은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강한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미련한 것이 좋은 것이 다른 사람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약함이 많다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가치 없는 것이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이 많다 멸시받고 천대받는 것이 요긴한 것이다.
    • 오피니언
    2021-11-18
  • 진정한 정치 모르는 통치는 무리
     세상이 매우 혼탁스럽다. 마치 악과 악이 부딪치는 아귀들의 전쟁터 같다. 날마다 상대를 향해 토해내는 토설물 악취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하다. 특히 정치인들의 난폭성은 그 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도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떠들어댄다. 후안무치한 난동을 부리면서도. 사람의 탈을 쓴 인두겁 같다고 할 수밖에. 정치의 본분은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불행하게 하고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도 세력들 간의 난타전은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의 도만은 지켰다. 그 드넓은 대륙에서 수많은 이합집산을 해가면서도. 그런데 이 조그만 나라에서 벌어지는 정치권의 싸움박질은 유치하기 그지없다. 누누이 얘기해 왔듯이 국민의 의식은 매우 상향되어가고 있다. 아이오티(IOT), 아이오(IOE)의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네트워킹이 매우 발달되어가는 오늘날. 세상의 온갖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로 중무장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간에 차이는 필부필부다. 그런데도 자신과 아류만이 최고라는 의식으로 떠들어 대는 군상들.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코로나19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거기에다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서민들은 진한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러함에도 정치를 한다는 족속들은 오로지 패거리 질을 하면서 게거품을 품어대고 있다. 이러니 공감 능력인들 살아 있겠는가. 제대로 된 세상이 되려면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상호 간에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에게부터 해보라. 타인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용서해보라. 자신에게 베푸는 자비는 자신의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게 할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자각하여 실패하거나 잘못 행동했던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누군가가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따뜻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해주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그대로 실행한다. 그게 진정한 공감이다. 그동안 자연은 그리고 우주는 우리에게 수많은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대했던가. 날마다 난개발로, 배출되는 온갖 공해물로 망가뜨려 왔다. 이것이 시원이 되어 나날이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수많은 도시들이 수장될 것이라 한다. 또한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바이러스 등의 침범으로 인류를 멸망시켜 버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별다른 대책은 없다. 특히 이번 대선후보들의 경우는. 단지 조금 덜 무식하냐 더 많이 무식하냐의 차이일 뿐이다. 특히 어떤 후보는 정치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 중론인 듯하다. 정치를 모르고는 결코 정론 정치를 할 수 없다. 이 점을 국민은 잘 인지해야 할 것이다. 자칫 실수하면 앞으로의 5년이 지옥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이같은 무서운 사태가 예견됨에도 자아도취에 파묻힌 어떤 무식한 대선후보는 독일군 전차부대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듯하다. 그 아류들과 함께. 여의도 정치를 모르니까 더 잘할 수도 있다면서. 넌센스 중의 넌센스다. 바다의 생리를 모르는 사람이 드센 파도 속으로 돛단배 몰고 나가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 오피니언
    2021-11-17
  • 인연이 이년이 되겠네!
    상식도 말과 글로 표현하고 소통되니까 아무래도 ‘상식 이야기’의 대부분이 말글(생활)과 관련된 것이었지요. 오늘은 한 공직 선거 후보자가 쓴 글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그 후보자가 ‘~반듯이 세우겠습니다’라고 쓴 것에 대해 상대 측이 ‘한글 맞춤법도 모른다’는 식으로 공격했다데요. ‘한글이라도 제대로 쓰자’는 제 주장에 공감하고 동조하는 줄 알고 기쁜 마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 꼬리가 느닷없이 황모(黃毛) 되겠나요? 그 전말(顚末)이 그저 참담합니다. “한글 맞춤법도 모른다”고 주장한 측은 친절하게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라고 고친 답안까지 제시했다네요. 그러나 초등학교만 제대로 나왔으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저 답안이 ‘옳은 것’이 되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즉 「‘꼭 지켜야 합니다’를 다르게 표현하려면?」 같은 문제의 해답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저 답안은 무지와 독단(獨斷)의 증거일 뿐입니다. “반듯이 세우겠습니다”는 한글 맞춤법 측면에서 전혀 문제될 것 없는 정확한 문장이예요. 어떤 사안에 대해 견해를 나타내거나 논의하려면, 먼저 대상을 정확하게 규정해야 합니다. 즉 ‘어떤 것’에 대해 다룰 것인지, 그 내용과 범위를 확실하게 정해야 하지요. 따라서 저 후보자의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면 먼저, 한글 맞춤법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인지 혹은 특정 사안에 대한 그의 견해를 비난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해야 했습니다. 최소한의 상식도 없이 그저 상대를 깎아내리려다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이 이 소동의 본질이예요. ‘견해가 문제’라며 트집을 잡으려 했지만, 어떤 근거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파헤칠수록 자기가 빠진 함정만 가파르게 깊어지고 있지요.그들의 본 바탕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스스로 전비(前非)를 자백(自白)하고, 팔자를 자조(自嘲)하고, 신세를 자학(自虐)하다가, 자승자박(自繩自縛)해 자멸(自滅)하는 꼴이니, 측은한 마음마저 듭니다. 걱정입니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요”라고 말하자 “이년”이라고 욕했다며 울부짖고 “맛나요”로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으니 추행이라고 날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이런 짓을 「기본」 생활화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 오피니언
    2021-11-16
  • 순국선열의 날
    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제2의 광복절이라고도 불리는 순국선열의 날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6월6일 현충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충일과 순국선열의 날의 차이점은 ‘순국선열’이라는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순국순열(殉國先烈)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를 의미한다.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현충일은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사람의 충성을 기념하기 위한 법정 공휴일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6·25 전쟁 참전용사 등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전몰한 장병들의 충열을 기리고 얼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정된 날이다.국가보훈처에서는 일제강점기 열사(烈士) 의사(義士) 지사(志士)를 구분하지 않고 ‘독립유공자’로 통칭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구분한다.열사는 나라를 위해 절의를 굳게 지키면서 의로운 죽음을 통해 굳은 의지를 내보인 사람들을 뜻하는 개념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자결한 민영환, 1907년 헤이그 밀사로 독립의지를 표명하며 자결한 이준,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해 자결한 황현 열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성패에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무력적인 행동으로 항거하며 죽은 사람을 뜻한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1932년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1932년 중국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해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사상자로 만든 윤봉길 의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지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품은 사람이란 뜻으로, 의사와 열사는 순국한 뒤 붙일 수 있는 칭호이지만 지사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쓸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순국선열의 날은 당초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39년 임시회의 총회 때 임정 요인이었던 지청천, 차이석 등이 매년 11월17일을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대한독립투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충성심을 기리는 날로 독립투사들을 추모하는 날로 정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광복회 등 민간단체 주관으로 열리게 되었다가 1955년부터 1969년까지 정부 주관의 기념행사로 거행되었고 1970년부터 다시 민간단체 주관이었으나 1997년부터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게 되었다.1970년부터는 민간단체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국가공인 법정기념일에서 제외되었으나 1997년부터 매년 11월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지정하여 국가공인 법정기념일로 지정하게 되었고 이날을 기점으로 추모식이 정부주관 행사로 열리게 된 것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돈, 명예, 권력 등 세속적인 가치가 많이 있겠지만 뭐니 뭐니해도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는 생명, 바로 사람의 목숨 아니겠는가? 그 목숨을 타인을 위해 초계처럼 버릴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 분들의 희생과 고통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 질수 밖에 없다.‘순국선열의 날’은 현충일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으며 조기(弔旗)를 게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날 하루 만이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고결하고 숭고한 희생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잠시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것은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 오피니언
    202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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